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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분통이 터진 일은 동학농민전쟁에 투입된 일본군이 정규군이 아닌 제대 후 복귀한 예비군이었고 이들의 일부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 때도 가담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동학농민전쟁 학살 때부터 기산 하면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란 개연성은 농후하다. 그렇지만 이 무슨 통탄할 일인가. 나라 잃은 서름에 학살까지 당해야 했던 운명이라니. ㅠㅠ
*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전문적인 소개 글. 전문은 책소개 이하 내용을 참고 바랍니다
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이 역시 많은 일본인이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저자는 지진 재해 당시 소학교 아이들이 쓴 작문 등의 자료를 찾아 그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복원한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이 쇠갈고리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나룻배로 끌어당겼어요. 마치 목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두 학살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낸다. 그 가해자인 후비역 병사와 재향군인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자경단에 대해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하여 그 조직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책소개
“한국과 일본은 왜 역사를 두고 다투는가?”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등의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오랜 세월 갈등을 겪었다. 서로를 향해 혐한과 반일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왜 다투는 걸까?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 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역사 전문 기자로서 40년간 일선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사료를 찾아 나선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아래 일본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실史實을 하나둘 찾아간다. 동학동민전쟁, 3ㆍ1운동, 관동대지진에 얽힌 숨겨진 역사와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자신도 몰랐던 역사에 관해 놀라며 그는 거듭해서 이렇게 묻는다. “과연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까지 찾아내는 등 저자의 세밀하고 성실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두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이라는 불리는 ‘평화ㆍ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시작은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소송’을 둘러싼 한일 갈등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탐색이지만, 그 원인을 찾아가면서 숱한 의문점과 마주한다. 그 대부분이 한국인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모르거나 모호하게 아는 사실들이다. ‘불법적인 한국병합’ ‘동학농민전쟁의 의병 진압’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빨치산과의 전쟁’ 등이 그것이다. 기자로서 또 일본인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객관적이며 냉철하다. 이러한 입장과 자세는 어쩌면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의 차를 좁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인 것 같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제1장 징용공 소송
1. 징용공을 둘러싼 대립
2. “일본의 조선 지배는 불법이었다”
3.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제2장 동학농민전쟁
1. 숨겨진 역사
2. 일본군 수뇌부의 철저한 의도
제3장 관동대지진
1. 강해지는 주장, “학살은 없었다”
2. 어린이들이 본 요코하마 지진
3. 왜 유언비어를 믿었을까?
제4장 두 학살을 연결하는 선
1. 일본군 병사의 실상
2. 정체불명의 적
제5장 잊힌 과거
1. 개찬된 『일청전사』
2. 전쟁사 개찬의 진상
제6장 3.1운동
1. 새로 발견된 자료
2. 하라 다카시 총리와 조선총독부의 대응
제7장 모호한 자화상
1. 없었던 일로 치부된 학살
2. ‘갑자기 탄생한’ 자경단
제8장 여러 개의 전후
1. 말할 수 없는 전장 체험
2. ‘일본인의 마음의 틈을 겨냥한 속임수
제9장 다음 시대를 전망하는 역사상의 힌트
맺음말
옮긴이의 말
자료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 둘은 국토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진 싸움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보신전쟁의 기억이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계승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지를 상기하면, 한국 의병의 존재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신전쟁은 양 진영 사망자의 합계지만, 의병은 한쪽의 사망자 숫자다. 게다가 일본군과 의병의 희생자 수 격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역사는 한국과 일본의 사회에서 각각 어떻게 전해졌을까? 한일 간의 기억 격차는 희생자 격차 이상으로 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53P)
조선인을 지속적으로 학살한 이유는, 부대 지휘관의 일탈이라든가 병사의 개인적인 폭주 때문이 아니었다. 일본군 수장의 뜻이 병사들에게까지 철저히 전해진 결과였다. 동학농민전쟁은 근대 일본이 조선 민중과 직접 대면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민중에 대한 대처로 일본이 선택한 조치는 “모조리 살육한다”였다. ‘숨겨진 역사’의 정체가 이렇게 밝혀졌다. 2019년부터 한국에서 전개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된 것이 ‘죽창’이었다.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막강한 적에 맞선 동학 농민들의 정신이었다. 이를 깨달은 일본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일본인들은 전혀 몰랐던 큰 희생의 역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을까. (75P)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많은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저런 일을 저질렀으니 앙갚음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체도 없는 ‘불령선인’이나 ‘빨치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되살아났을지 모른다. 지진으로 경찰은 기능을 잃었다. 가장 먼저 유언비어가 나돌고 학살이 시작된 요코하마에서는 일곱 곳의 경찰서 중 여섯 곳이 붕괴 소실되었다.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의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37-138P)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
출판사서평
일본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역사들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한일 역사 인식의 차이로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징용공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골격이기도 한 ‘한국병합은 무효이자 불법’이라는 논리다. 이는 일본인으로서는 ‘헛소리’로 들릴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태진 교수가 말한 병합을 위한 일본의 “분명히 계산된 지속적인 노력”이 무엇인지 사료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전쟁의 ‘의병’이란 존재와 마주한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간의 전투 횟수는 총 2,852회이며, 일본군은 1만 7,779명의 폭도를 살육했고,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이었다.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에는 1,451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 1만 1,562명을 살육했다. 다시 말해, 190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어딘가에서 매일 평균 4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30명 정도의 의병이 살해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얼마나 될까? 부끄럽지만 나는 몰랐다.” 그는 의병 토벌대로 참여한 한 일본군의 종군일지를 살피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되살려낸다.
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이 역시 많은 일본인이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저자는 지진 재해 당시 소학교 아이들이 쓴 작문 등의 자료를 찾아 그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복원한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이 쇠갈고리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나룻배로 끌어당겼어요. 마치 목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두 학살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낸다. 그 가해자인 후비역 병사와 재향군인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자경단에 대해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하여 그 조직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왜 일본인의 기억에 사라졌을까?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는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까? 저자는 개찬된 『청일전사』를 예로 들며, 정부와 군이 역사 “기록을 처분하거나 정사正史를 날조”했고, 그로 인해 동학농민전쟁과 3ㆍ1운동에서의 조선인들의 희생은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관동대지진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처분”되어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진 재해 직후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방침은 “정상참작을 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소요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지 않고 현저한 행위를 한 자로 검거 범위를 한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모든 시와 마을 구석구석까지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킨 민중에 의한 살해가 있었던” 요코하마시에서 조선인을 살해한 행위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기록된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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