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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여전사] 쿠둘룬

Bawoo 2015. 11. 21. 23:16

쿠툴룬은 카이두의 딸이다. 카이두는 우구데이 칸의 손자로 쿠빌라이가 대칸이 된 후, 중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두고 차카타이 칸국과 대립하다가, 결국 차카타이 가의 바락을 제압하고 일시적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비록 그의 패권은 다시 차카타이 칸국에 의해 단기간에 그쳤고, 결국 그를 끝으로 우구데이 가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만, 그의 세력을 쿠빌라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르네 그루쎄는

그를 "마지막 몽골인"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집사>에 의하면 카이두는 40명 혹은 24명의 아들과 쿠툴룬과 쿠르투진 차카라는 2명의 딸이 있었다. 그 중 쿠툴룬은 여장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는 쿠툴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또한 카이두에게는 쿠툴룬 차가라는 딸이 있었는데, 자식들 가운데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 그녀는 사내들 같이 하고 다니며 여러 차례 전쟁에도 나가서 용맹을 보였다. 아버지에게 신임을 받았고 사무도 처리하였다. 아버지가 그를 시집보내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가 자기 딸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게 아닌가 의심했다. 카이두의 사신들이 여러 번 이슬람 제왕(훌레구 울루스의 칸)-그의 통치가 영원하시기를!-의 어전에 왔었는데, 이 딸이 안부와 선물을 전하면서, '당신의 부인이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남편으로 맞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이 심해지자, 카이두는 최근에 들어와 그녀에게 남편을 맞아 주었는데 그는 코룰라스 출신으로 아브타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집사>의 기록에 따르면 쿠툴룬은 부친인 카이두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부친을 따라 전장을 종횡무진 다니며 남자 못지 않은 용맹을 떨쳤다. 뿐만 아니라,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치에까지 간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집사>에 의하면 카이두가 죽자 그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도 그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편견이겠지만, 이러한 여성일 수록 결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속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부친 곁에 계속 머물고자 했고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비난을 한 듯하다.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 마르코 폴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힘이 세고 용맹하여 아버지의 왕국에서 힘으로 그녀를 능가할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카이두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간절하게 바랐지만, 그녀는 자신을 무력과 용맹, 지구력, 군사적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말 100마리를 걸고 자신과 싸워 이기는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공개구혼'에 100명의 청년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쿠툴룬이 청년들이 가져온 1만 필의 말을 소유한 것으로 끝이 났다.

  1280년 경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며 무예가 뛰어난 한 청년 왕자가 카이두의 궁정으로 와서 쿠툴룬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1000 필의 말을 걸고 그녀와 레슬링 시합을 겨루고자 했다. 카이두는 부유하고 당당한 청년에게 마음이 끌려, 쿠툴룬에게 일부러 져주라고 은밀하게 부탁했다. 쿠툴룬은 도도하게 답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이긴다면 기꺼이 그의 아내가 될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쿠툴룬과 청년 왕자의 레슬링 시합이 벌어졌다. 전에 상대했던 젊은이들과 다르게 청년 왕자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쿠툴룬의 빠른 공격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젊은 왕자도 무릎을 꿇었다.결국 왕자는 말 1000필을 남긴 채 카이두의 궁정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카이두였지만 그도 '딸바보' 아버지였던듯 하다. 그녀를 시집보내고자했지만 실패하자 체념하고 딸과 함께 전장터를 누볐다. 하지만 쿠툴룬을 오랫동안 시집보내지 않는 카이두를 두고 주변사람들은 아버지와 딸의 불륜을 의심하고 부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카이두 같은 경우, 유목적 관습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딸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정주민들보다 자유로운 시각을 보인 듯 하지만, 그가 지배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는 정주 도시문명이었고, 보다 보수적인 여성관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카이두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딸을 아브타글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집사>는 그녀가 남편을 선택하여 결혼했다고 증언하지만, 한때 전장을 호령한 쿠툴룬에게는 '울며 겨자먹기 식'의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의하면, 이후 쿠툴룬은 타르사켄트와 카르발릭이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한때 일세를 풍미했던 한 몽골 '여전사'의 생애였다.

 

* 출처: 정보- 책 무서운 공주들/ 수집- 검색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