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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명문가 출신으로 청나라의 개국공신이 된 인물]범문정[Fan Wench'eng , 范文程]

Bawoo 2015. 12. 11. 00:16

범문정[Fan Wench'eng , 范文程]

 중국 청대의 재상.
(병). Fan Wencheng. (웨). Fan Wench'eng.

 

만주족의 군대가 중국을 정복하고 청나라(1644~1911/12)를 세우는 데 조언했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만주족이 마을을 침입했을 때 만주로 잡혀갔다. 거기에서 만주국의 건국자 누르하치(1559~1626)의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으며, 누르하치의 후계자들이 중국식 정부체제를 발전시키도록 도왔다.

 

1636년 만주의 도시 무크덴(지금의 선양[瀋陽])에 중앙집권적인 관료정부를 만들 때 새 정부에서 지도급 관료 가운데 하나인 태부(太傅)가 되었다. 1644년 명(1368~1644)의 수도 베이징[北京]이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李自成)에게 함락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을 정복하도록 만주족을 부추겼다. 그의 노력으로 만주족은 약탈을 삼가하고 무거운 세금을 줄이며 명대 마지막 황제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는 과거제도를 유지시켰는데, 이 제도는 유능한 한족을 정부에서 등용하고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 진출의 동기를 부여하는 데 매우 효과적임이 이미 입증되어 있었다. 1654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황제

4명의 조언자로 있었다.[다음백과 -범문정 [Fan Wench'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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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청제국의 개국공신 범문정(范文程)

범문정은 청초의 가장 유명한 책략가이며 청군에 여러 책략과 전술전략을 놓으면서 혁혁한 공헌을 해 청조의 강자아(姜子牙), 장량(張良), 유백온(劉伯溫)으로 칭송받았다.


범문정은 명말청초 사람으로 기인이었다. 그는 요동의 한인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경서를 두루 읽어 높은 지혜와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받아왔던 한문화의 수양과 만주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공훈와 업적을 세우리라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명조 무순성(撫順城)의 수장인 아버지 범남(范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조부가 만든 '산천전지요진도지(山川戰地要津圖志)'를 가슴에 품고 전쟁터로 나가 누루하치에게 의탁했으며, 꿈을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누루하치가 1618년 4월 무순성을 함락시킬 때 겨우 21세였던 범문정은 포승으로 결박되어 누루하치 앞에 서게 되었다. 마침 팔기병이 칼을 들고 반항할 힘도 없는 민중을 살육하려 할 때, 범문정이 소리 질렀다.

"어리석은 대칸이시여,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누루하치는 범문정을 가까이 데려오게 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범문정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천하는 인심입니다. 인심을 얻는 자는 창성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하게 됩니다. 대칸은 천하를 얻고 싶어하면서 오히려 백성을 함부로 죽이려 하니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습니까?"

누루하치는 크게 노했지만 범문정이 자기를 찾아와 신하가 되려고 한 이유를 물은 뒤, 그의 오랏줄을 손수 끊어버리고는 말했다.


"범문정, 나는 그대의 담력과 식견, 호기를 중시하오. 오늘부터 그대는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주시오."

 

명 만력(萬曆) 47년 1619년, 명나라 조정은 양호(楊鎬)를 요양으로 파견해 47만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후금의 본거지 하투아라를 에워싸 진공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누루하치는 기껏해야 8만의 군사밖에 없었으므로 누루하치 및 후금의 장수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범문정은 누루하치에게 말했다.

"병사들은 진실된 자와 거짓된 자가 섞여 있습니다. 명나라의 40만 대군은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요동에 주둔시킨 명나라 군사는 9만 4천 명인데, 최근 몇 십 년 가까이 명나라가 나날이 부패하여 변방 요새의 장수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기풍이 되었으며, 군인의 급료 및 지급품을 사취하여 실제 액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도망가거나 병사하는 병졸이 열에 서너 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양호는 오랫동안 전장을 전전했기에 절대로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수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요동의 전장에 투입된 병력은 많아야 3만 명일 뿐입니다."

범문정의 이 분석은 후금의 밀정이 보고한 9만이라는 수치와 너무 차이가 났기에 다른 장수들의 불신을 불러왔다. 그러나 누루하치는 예민한 판단력으로 범문정의 분석과 예측을 신뢰했다. 또한 범문정은 각각의 길에서 원조하고 있는 명군의 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저의 추론에 따르면 네 갈래 길에 포진한 명군의 병사는 기껏해야 12만에 불과합니다. 제 목숨으로 보증할 수 있습니다."

누루하치는 이때 이미 범문정을 완전히 신뢰하여, 마침내는 '자네가 몇 가지 길을 내면 나는 그중 한 가지 길을 가겠네'라고 하면서, 주력군 전부를 명나라 장수 두종(杜宗)이 지키는 길로 향하게 했다. 그 결과 후금은 건국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사르후<薩爾滸>대첩)

 

곧이어 범문정은 포상으로 내려주는 금은을 거절하고 누루하치에게 즉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개원과 철령을 손에 넣으라''여덟 글자의 책략'을 바쳤다. 즉, 먼저 개원, 철령 두 성을 공격하고 그런 연후에 요양, 심양을 점령해야만 후금이 공고한 기지를 건립하고 명나라 군대와 개전 후 대치할 때에도 공격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건의는 분명 누루하치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범문정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누루하치는 두손으로 그를 일으키고 여러 신하들에게 선포했다.

"오늘부터 군대의 장수나 병사들은 모두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그를 부를지어다!"

말을 마치고는 범문정에게 술을 따라주며 예를 행했다. 이때 범문정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살이호 전쟁 이후 명나라는 웅정필熊廷弼을 요동의 장관으로 기용하였고 웅정필은 군대를 엄격히 다스려 형세를 크게 바꾸어 놓아 후금은 경거망동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에 북부에 위치해 있던 몽고의 객이객 부대와 명나라가 결연을 맺어 후금을 위협하고 있어서 누루하치는 등에 종기가 난 것처럼 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범문정이 객이객 부대를 멸하고 그 수장을 포로로 잡은 후, 상대방과 동맹을 맺어 후환을 없애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누루하치는 범문정의 '농락籠絡 호해互解(서로 화해) 위핍威逼(협박)'이라는 여섯 글자의 책략에 따라 마침내는 객이객의 화해를 얻어냈고 또한 그와 반명연맹도 맺게 되었다.


명나라는 군대 일을 잘 모르는 원응태를 파견하여 웅정필을 대신하게 했다. 요양 전쟁에서 원응태는 5만 대군을 일자의 장사진을 치게하여 후금의 3만 군대에 맞서 싸우게 했다. 대부분의 후금 장수들이 명나라 군대가 아군보다 두 배에 이르는 것을 보고 누루하치에게 후퇴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범문정은 오히려 말을 채찍질해 누루하치 곁으로 와 말했다.

 

"명나라 군대의 진형을 보니, 분명히 얻어맞는 형세입니다. 이것은 병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장수가 용병술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아군의 팔기군 중 우익의 사기(四旗)를 두 갈래 길로 나눠 쳐들어간다면 명군을 세 동강으로 자를 수 있으며, 분리시켜 섬멸하면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장을 두루 경험한 누루하치의 생각과도 일치했기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고 먼저 적진으로 돌진했다. 후금의 장수들은 대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즉각 따라 나섰다. 그 결과 5만 대군은 크게 패하고 요양성이 후금의 수중에 떨어졌다. 전쟁 후, 누루하치는 팔기 장수에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유생은 쓸데없는 책만 읽을 줄 알고 용병은 모른다 했소? 그대들은 범선생을 보시오. 전투에 임했을 때 분석에 능하고 진영이 혼란하지 않게 하니, 이렇게 군사에 정통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범문정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때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이 한나라 유생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루하치는 또 말했다.


 

"옛날 주나라 문왕이 정권을 잡으려 할 때에는 지모가 뛰어난 신하인 강자아가, 한나라 유방이 정권을 잡을 때에는 장량이라는 신하가,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 곁에는 유백온이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었다고 했소. 범선생이야말로 우리의 강자아, 장량, 유백온이오!"


누루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할 때, 상처를 입어 병사한 후 황태극이 즉위했다.

영원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원숭환에 대해서 범문정은 밀계를 헌납했다.

"강화 대 강화를 방법을 쓰십시오."


 

황태극이 이해하지 못하자 범문정이 설명하였다.

" 강화를 하면 자연히 원숭환을 제거할 수 없으나 강화가 만들어 내는 소문과 시기심은 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강화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져 명나라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원숭환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황태극은 이때서야 문듣 깨닫고 범문정에게 숙연한 존경심이 일었다. 후에 그는 범문정이 내놓은 '우회해서 북경을 진공하는 계략'을 써 북경성 아래 가까이 갔을 때, 원숭환을 북경으로 유인해 의심 많은 숭정제에게 잡히게 하여 시신이 찢기고 그 가족들도 유배를 당하게 하였다. 이 것은 후금에 있어서 강력한 적수 중 하나를 제거한 것이고, 명나라에게 있어서는 만리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멸망의 발걸음을 재촉한 꼴이 되었다.

 

황태극 즉위 초,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고 게속되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아래서 범문정은 대외적으로 '서쪽으로는 영원의 백성들에게 진실되게 대하고 동쪽으로는 조선을 보호하며, 북으로는 몽고를 정벌하고 남으로는 명나라 장수를 끌어들이십시오.' 라는 책략을 냈으며 대내적으로는 '성대한 계승'과 '은밀한 변경'이라는 책략을 냈다. 이것은 누루하치의 문화교육과 군사상의 공적을 선양하고 한층 더 확대, 발전시키는 동시에 조용히 폐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황태극은 범문정이 바친 내외 방침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가장 신뢰하는 사람' 이라고 불렀다.

1635년, 황태극은 찰합이(察哈爾) 부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된 절세의 진귀한 보물, 옥새를 얻었다. 이에 범문정은 자신이 계획한 치국의 방침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침범, 즉 명나라를 부단히 침입하여 '적을 지치게 해 승리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다림, 즉 명나라 내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기를 조용히 기다려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다.

셋째는 호칭, 즉 황태극을 황제로 칭해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다.

넷째는 체제건립, 즉 역대의 정치체제와 제도를 참고하여 그에 상응하는 직능부분을 만들어 훗날에 대비하는 것이다.

 

황태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청淸'이라 바꾸고 공식적으로 제왕이 되어 대청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중년의 황태극은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궁 안에서 승하했다. 황태극 사후 또 한 차례의 황위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각 귀족세력집단은 자신이 지지하는 황세자를 옹립하려 했다. 이때 장비(莊妃)는 범문정의 '제왕의 힘을 제압하고 제왕의 분쟁을 평정하며, 제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 제왕의 희망이 될 것이다' 라는 책략을 써서 마침내는 자신의 여섯 살짜리 어린 복림을 황위에 올렸으니 그가 바로 순치황제이다.


하지만 내심 황제가 되고 싶어했던 다이곤 형제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결국 다이곤은 개주 탕천으로 '요양하라'는 명목으로 그를 쫓아냈다. 그러나 효장 황태후는 계략에 능한 이 공신을 잊지 않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심복을 파견해 범문정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장비의 계획 하에 범문정은 '섭정왕 다이곤에게 드리는 글'을 썼다.

 

'명적明敵' (이자성을 적으로 삼다), '급진急進'(관중에 들어 이자성과 천하를 다툰다), '조민弔民'(명나라 신하와 백성을 위해 군부의 원한을 갚아 민심을 얻는다), '도명悼明'(명나라의 역사적 지위를 인정하나 이자성은 배제하고 명나라의 계승자로 자처한다)이다.

 

이러한 '열 글자 계책'은 당시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가는 데 아주 필요하고도 합당한 방침이었기에 마침내 다이곤은 범문정에게 품었던 미움을 거두고 북경으로 진군해 이자성과 천하를 다툴 것을 결심했다.

다이곤이 승하하고 순치가 친정을 하여 다이곤에 대한 청산작업을 벌일 때 범문정도 '관직을 사고 파는' 일에 연루되었으며 온 조정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범문정은 소문과 화복을 따지지 않고 친히 나서서 순치황제에게 '군을 모아 황무지를 개간하라'는 상소를 올려 유랑민을 불러들여 황무지를 개간할 것을 주청했다. 순치황제가 이를 읽어본 후 크게 기뻐하며 칭찬했다. 그리고 즉시 범문정의 대학사 직을 회복시켜주고 의정議政대신을 수여했다. 한나라 사람으로 청나라의 의정대신이 된 것은 범문정이 처음이었다.


범문정의 '군을 모아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과 '중원입성', '만력의 부과금 사용'이라는 계책은 청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 때문에 역사가들은 그 것을 '범문정 개국 삼대의三大義' 라 부른다. 순치 11년, 범문정은 소보少保 겸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삼대의 제왕을 모셨던 대공신은 과로로 당직을 서던 책상에 쓰러져 거품을 토하며 의식을 잃었다.


다음 해, 범문정은 늙고 병들어 사직했다. 그러나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그는 여전히 국정을 잊지 않고 당대의 관리에게 '새로운 것을 구상하는 자는 성하고 옛 것을 고집하는 자는 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통치자들이 천하를 다스리는데 귀감이 되도록했다.


1666년 8월, 70세이던 범문정은 병상에서 10여 년을 보낸 후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그의 시신이 회유 홍라산에 묻히도록 배려했으며, 강희황제 어서御書에도 '원보고풍元輔高風'이라 쓰고 대청제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원로 공신을 치하했다.

[출처: 정보-책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자료 수집-다음백과,만청제국의 개국공신 범문정(范文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