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중국 >

[삼국지-후한 말 영제(靈帝)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환관들]십상시(十常侍)

Bawoo 2016. 8. 28. 22:12




십상시(十常侍)는 중국 후한영제(靈帝)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역사서 《후한서》(後漢書)에는 십상시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가히 대단하였다고 쓰여 있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張讓)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趙忠)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십상시와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십상시는 그들의 이름과 숫자가 약간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12명, 《삼국지연의》에서는 10명이다.


전횡

이들의 기본적인 전횡은 매관매직이었다. 모든 관직에 가격을 붙여 판매를 했는데 다음과 같다.

  • 삼공 - 1천만 전
  • 자사 - 2천만 전
  • 태수 - 2천만 전
  • 현령 - 4백만 전

하지만 관직만 팔았을 뿐 임기는 전혀 보장해주지 않고 수시로 독우를 파견해서 퇴출시키기를 일삼았기 때문에 지방 수령의 임기는 1년을 넘기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그 때문에 십상시에게 돈을 주고 관직을 구매한 자들은 그 돈을 본전이라도 뽑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마구 수탈했고 이 때문에 도처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 난들 가운데 제일 규모가 방대한 것이 바로 다름아닌 장각을 수괴로 옹립한 황건적의 난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난이 무수히 발생하자 십상시들은 오히려 이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적(政敵)들을 황건적이나 다른 난을 일으킨 자들과 연루시키는 모함을 저질렀으며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는 지휘관에게는 싸울 의지가 없고 오히려 적과 내통한다는 식으로 무고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피해자가 과거

유비공손찬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던 노식이었다.


황보숭, 주준, 노식, 손견, 조조 등 당대의 영웅들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난을 간신히 진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십상시는 정신을 못차리고 오히려 그들의 공적을 다른 혐의를 만들어서 지워버리고 황건적의 난에 아무런 기여조차 하지 않은 자기네들이 그 공적을 가로채어 스스로를 열후에 봉했으며 조정 중신들을 모함하고 뒷돈을 받아먹는 등 만행을 저지르다가 하진과 대립하게 되었고 하진을 암살하면서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지만 원소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

후한서에서 등장하는 십상시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십상시

역사서에 따르면 후람은 172년에, 조절은 181년에 이미 죽었고, 조충은 하묘(何苗)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또한 하묘도 환관세력을 격파하는데 일조하였는데, 소설에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 건석(蹇碩): 하진을 죽이려다가 들키며, 2장에서 곽승(郭勝)에게 죽는다.
  • 봉서(封諝): 2장까지 나온다. 십상시 중에서는 서열이 낮았고 이 때문에 이를 만회하려고 황건적과 내통했다.

소제(少帝)를 인질로 잡고 도주한 사람들

3장에서 원술오광(吳匡)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

  • 조충(趙忠)
  • 곽승(郭勝)
  • 하운(夏惲)
  • 정광(程曠)
  • 십상시의 난후한 189년 8월 25일십상시에 의해 발생하여 무려 2000명에 달하는 환관과 사람들이 죽은 사건으로 동탁이 이 사건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으며, 권력을 휘두르던 대장군 하진이 죽었다.

    배경

    당시 후한의 정치와 권력은 십상시라 불리는 10명의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후한 12대 황제 영제는 무능하고 병약해 십상시들의 말을 따랐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십상시장양, 조충, 건석, 곽승, 단규, 후람, 조절, 하운, 정광, 봉서로 이 중 봉서로는 184년 황건적의 난과 연루되어 옥에 갇혀 처형되었다.


  • 189년 후한 영제의 병이 깊자 후한 영제십상시 중 한 명인 건석과 후계자 자리를 논의하고 건석후한 영제의 황후 하황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건석의 계획은 사마 반은에 의해 하진에게 발각되고 후한 영제가 곧바로 승하하자 하진은 자신의 조카 유변황제로 세우기 위해 사예교위 원소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궁궐로 쳐들어가게한다. 뒤이어 전군교위 조조와 신하 하옹, 순유, 정태 등 대신 30명도 궁궐로 들어와 태자 유변을 후한 13대 황제 소제로 즉위시킨다.


  • 한편 건석원소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십상시들 중 한 명인 곽승에게 살해당한다. 그 뒤 하진하황후는 진류왕 유협의 어머니 왕미인영제의 어머니 동태후동중 등을 내쫓아 독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원소는 주부 진림과 노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영웅들을 불러모아 십상시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이에 십상시의 수장 장양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서량 자사 동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올라와 민지에 주둔한다.

    십상시의 난

    189년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장락궁으로 불러들이고 하진은 결국 십상시들과 상방감 거목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에 하진이 죽자 하진의 부하 오광이 청쇄문 밖에 불을 질렀고 진군교위 조조와 사예교위 원소는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고 원소의 동생 원술도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 취화루 아래에서 조충, 정광, 하운, 곽승 등이 베이고 군사들은 십상시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환관들도 모두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수염 없는 사람들도 환관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했다. 하진의 동생 하묘도 난입해 십상시 중 한 명이던 조충을 죽였으나 오광에게 가담자로 오해받아 살해당했고 하진을 살해했던 상방감 거목을 포함해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장락궁에서 살해당해 십상시의 난이라 불리게 되었다.


  • 십상시들 중 남아있던 장양, 단규, 후람, 조절 하태후를 납치해 가려고 하나 중랑장 노식의 참여로 실패하며 결국 이들은 황제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피신한다.

    경과

    장양과 단규는 소제와 유협을 데리고 피신하다가 하남 중부연리 민공의 습격을 받아 장양은 연못에 빠져 자결하고 단규, 후람, 조절은 소제와 유협을 잃어버려 뒤쫓아온 민공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소제와 유협은 선비 최의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원소와 조조, 왕윤, 양표, 순우경, 조맹, 포신 등의 신하들을 만나 낙양으로 향한다. 이때 민지에 주둔하던 서량 자사 동탁이 사위 이유, 동생 동민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오고 동탁은 병권을 장악하여 원소를 발해 태수로 내쫓고 하진의 어머니 무양군을 비롯해 하씨 일족을 모두 멸족시키면서 하진을 죽게 했다는 혐의로 죽은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여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렸다.


  • 그리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세우려 들고 이에 병주 자사 정원이 양아들 여포를 내세워 동탁을 막으려 하지만 도리어 동탁의 부하인 중랑장 이숙의 음모로 양아들 여포에 의해 살해당하며 동탁은 반대하던 신하 정관을 죽이고 황제 유변과 하태후를 폐위시켜 살해했으며 진류왕 유협을 후한 14대 황제 헌제로 즉위시킨다.

    이후 한나라반동탁연합군을 거쳐 군중할거 시대로 돌입하는데 하진의 며느리 윤(尹)씨는 이후 조조에게 재가하였으며 손자 하안도 어머니가 조조에게 재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조의 양자가 되었다.


  •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