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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시대]문경지치[文景之治]

Bawoo 2016. 10. 9. 21:30


전한시대

문경지치


여씨가 멸망하고 다시 유씨의 한나라가 되자 조정의 중신과 제후들은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하는가를 논의하였다. 현재 황제의 자리에 있는 소제 홍(弘)은 비록 혜제의 정비 소생이라 하여 황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여태후가 여씨 일파의 세력을 심기 위해 여씨와 인연이 깊은 후궁이 낳은 아들이었으며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으니 이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것은 당연하였다.

새로운 황제의 후보로는 고조 유방의 여덟 아들 중 남아 있는 대왕(代王) 유항(劉恒)과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 두 사람이었다. 서열과 성격으로 볼 때 이 두 사람 가운데 대왕 유항을 옹립하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유항은 4남인데다 성격도 관후하고 자비심이 많았다. 반면 유장은 막내아들인데다 성격도 교만하고 침착성이 없었다. 유항을 선택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여씨 일파를 토멸하는 데 맨 먼저 군사를 일으켰던 제왕 유양은 고조의 적장손으로 또한 유력한 후보임에 틀림없었다. 적장손인데다 여씨 토멸에 공이 있으니 누가 이 사람의 옹립을 반대하고 나서겠는가.

결국 최종 선발에 남은 사람은 대왕 유항과 제왕 유양 두 사람이었다. 여씨의 집권에 골치를 앓았던 중신과 제후들은 이들 두 후보의 외척 문제를 최종적으로 평가하여 결정짓기로 하였다. 대왕 유항의 어머니는 박씨(薄氏)로 관후한 장자의 집안이라는 평판이 높았고, 제왕 유양의 어머니 쪽에는 외척의 세력을 업은 사균(駟鈞)이란 사람이 있는데 성질이 포학하고 거칠어 제왕이 황제가 될 경우 제2의 여씨 정권이 나올 염려가 있다 하여 마침내 대왕 유항이 옹립되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 유항이 황제로 옹립된 것은 그의 어머니 박씨가 어질고 착한 장자의 집안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박부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박부인은 소녀 시절 관부인, 조자아 등과 사이가 좋아 서로 약속하기를 “이 다음에 누가 출세를 하든 우리 서로의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굳게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 후 관부인과 조자아는 고조 유방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으나 박부인은 그렇지가 못했다. 관부인과 조자아는 소녀 시절의 약속을 잊지 않고 적당한 기회에 고조 유방에게 그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고조 유방은 “그렇다면 박 여인에게도 사랑을 주어야겠군!” 하고 박 여인을 입시토록 하여 총애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단 하룻밤을 모셨는데 임신이 되어 유항을 낳았다.

여태후 집권 시대에는 척부인처럼 고조의 총애를 독점하다시피 한 여인들은 된서리를 맞았지만 박씨처럼 총애가 두텁지 않았던 여인들에 대하여는 그렇게 혹독하던 여태후도 너그럽게 보아 대왕의 어머니로서 대 땅에 갈 수 있었다.

황제의 외척 선고(選考) 과정에서 대왕의 모계뿐 아니라 대왕의 부인인 두씨(竇氏) 문제도 거론되었다.

두씨는 장안 시녀 시절에 정리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다. 일찍이 여태후 시절에 각지의 양가집 처녀를 모아 여태후의 시녀로 삼은 일이 있었다. 이때 두씨도 시녀로 발탁되어 궁중에 들어왔다. 그 후 시녀의 수가 너무 많아 인원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각 제후들에게 각각 5명의 시녀를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고조가 죽은 후 무제가 즉위하기까지 취해졌던 것으로 사치와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시로 되어 있었다. 궁중도 마찬가지로 낭비를 줄이기 위해 지나치게 인원이 많으면 정리를 해서 감축했다.

여태후 시대 제후왕의 수는 약간 변동이 있긴 했으나 항시 13,4명 정도는 되었다. 정리 대상에 든 시녀들은 어떤 제후에게로 보내질지 알 길이 없이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했다.

두씨도 정리 대상에 든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고향 근처인 조나라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 사무를 담당하는 환관에게 미리 부탁하였으나 환관은 이를 까맣게 잊고 있어 그녀의 부탁은 허사가 되고 마침내 대왕에게 보내지게 되었다.

그런데 대 땅은 산서성 북쪽에 있는 흉노와 접경한 변방 지역이었다. 전국 시대 조나라의 영토로 진의 시황제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하고 조왕을 포로로 잡자 조의 공자가 탈출하여 대 땅으로 가 그곳에서 왕을 일컬은 일이 있는 고장이다. 망명 정권을 세울 정도의 곳이니 중원 천지에 비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두씨는 이러한 곳으로 가는 것이 몹시 서글펐으나 여태후의 명령이니 거역할 도리가 없었다. 울며 대 땅으로 가야 했다.

장안에서 온 시녀 다섯 사람 가운데 대왕은 두씨만을 사랑했다. 대왕에게는 물론 정처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씨는 2남 1녀를 낳았다. 정처에게서도 네 사람의 아들이 있었으나 무슨 일인지 모두 병사하고 말았다.

여태후의 죽음으로 여씨가 멸망하고 다시 유씨의 천하가 되자 대왕 유항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울며 대 땅으로 갔던 두씨는 이제 위세당당하게 장안으로 돌아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부탁받은 환관이 잊을 정도로 출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소극적이었다는 것으로 인정되어 대왕의 외척 선고 과정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던 것 같다.

대왕에서 장안으로 맞아들여져 황제 위에 오른 이는 바로 명군으로서 그 칭송이 자자했던 한의 문제(文帝)이다.

친상탕약(親嘗湯藥)

문제의 효행에 대한 고사의 한 장면

문제는 중국 역사상 검소하기로 이름난 황제이다. 그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봄철에 친히 적전(籍田)각주1) 을 갈아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우경

한나라 때, 철제농구의 전면적 보급으로 우경(牛耕)이 일반화되었다.

문제는 또 각 지방 행정 관청에 명하여 농민이 농사지을 시기를 잃지 않도록 계몽·지도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주고 농지의 조세를 반으로 감하여 고조가 정한 15분의 1세를 30분의 1세로 개정하였다.

이어서 농지의 조세를 12년 동안이나 전액 면제하였다. 그때까지의 인두세(人頭稅)는 한 사람당 1년에 120전이었는데 문제 때에 이르러서는 그 3분의 1로 감액하여 1인 1년에 40전으로 하였다. 또 부역은 1인 1년에 1회 1개월이었던 것을 3년간에 1회 1개월로 개정하였다. 이처럼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시책은 사회 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크게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물
답차

물을 퍼올리는 농기구의 하나. 형태는 물레방아 바퀴나 달구지의 바퀴처럼 생겼는데 한가운데를 축으로 나선형으로 붙인 발판을 사람이 밟아 바퀴를 돌린다. 바퀴가 돌 때마다 물이 따라 올라온다. 염전에서도 많이 쓰였다.

문제는 농민에 대한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면서도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는 검소와 절약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는 노대(露臺)각주2) 를 지으려고 생각하였으나 필요경비를 계산해본 결과 황금 1백 근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금 1백 근은 중류 가정 10세대의 재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하여 노대의 건축을 취소하라 하였다. 그의 옷은 무늬와 장식이 없는 검정색 비단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질박과 절검의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실내의 커튼류는 무늬가 없는 단색의 천을 사용토록 하고 의복이나 치마의 길이도 땅에 끌리지 않도록 짧게 하였다.

나침반

한나라 때 자철광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나침반. 별자리에 근거한 24방향과 팔괘가 그려져 있는 청동판 위에 올려져 있는 숟가락 모양의 기구가 남쪽을 가리키게 되어 있다.

문제는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죽은 다음 장례를 치를 때는 거마와 의장병을 거창하게 벌여 세우지 않도록 하고 장례에 참석하는 사람이 머리에 쓰는 흰 베도 폭이 세 치가 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복상(服喪) 기간도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복상 중이라도 결혼과 제사를 제한하지 말며 술과 고기를 금지시키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능묘(陵墓)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산기슭에 만들되 금·은·동·주석이나 옥 따위를 사용하지 말고 모두 와기(瓦器)를 사용하고 그 규모도 적게 하라.”

한의 문제와 진의 시황제는 모두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그들이 한 일은 전혀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진의 시황제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웅략(雄略), 그리고 백성에 대한 포학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여산 기슭에 있는 거대한 능묘는 시황제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의 문제는 부역과 조세를 경감하고 친히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청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서안시 동북에 있는 그의 능묘인 패릉(覇陵)은 질박과 검소를 생활 신조로 한 한의 문제다운 간소한 면모를 보여주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한문제의 릉

문제는 재위 23년(기원전 157) 46세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景帝)가 즉위하였다. 문제와 경제는 모두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정책을 40년 가까이 실시하였기 때문에 사회 경제는 공전의 번영을 이룩하였고 사회 질서는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이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문경(文景)의 치(治)’(기원전 179~141)라고 부르고 있다.

경제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3분의 2세기 동안이나 침체되었던 경제가 활성화되어 각 군현의 정부 창고에는 식량과 동전이 꽉꽉 차 있었다. 도시의 국유 창고에는 동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식량은 오래 보관되어 변질되고 창고가 모자라 노적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황제의 마장(馬場)에서는 30만 마리나 되는 말을 길렀고 백성들이 타고 다니는 노새는 도시와 농촌의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한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당시 재상이나 장군이 외출할 때 마차가 없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은 동화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이 되어 보통 평민들까지도 말을 타고 다닐 정도였다.

인구도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여 어떤 지역에서는 4~5배로 증가하였다. 춘추·전국 시대 최대의 도시로 알려졌던 제나라의 임치에는 그 당시 7만 호였던 것이 이때에는 호수 10만, 인구 50만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가의신서(賈誼新書)》

한나라의 가의가 편찬한 중국의 서지

사회의 기풍도 크게 달라져 진나라 때는 오형 등 가혹한 형벌과 까다로운 법률로 매년 1백만 이상의 백성들이 범죄의 사슬에 걸려들었으나 한의 문제 때에는 이 같은 참혹한 형벌은 일찍부터 폐지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체형까지도 폐지하는 현상을 보였다.

중국 봉건 사회의 역사를 훑어보면 전한의 ‘문경의 치’는 후세 당대의 ‘정관(貞觀)각주3) 의 치(治)’, 청대의 ‘강희(康熙)의 치(治)’와 함께 모두 황제의 칭호와 연호를 붙인 봉건 왕조의 번영 시대를 칭송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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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