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화순을 스쳐간 김삿갓, 조광조와 정율성
석상 둘 누워 있는 화순… '罪人' 지식인들 스쳐가
18세기 이후 조선사회, 명문세가에 권력 집중
과거 급제 '하늘 별 따기'… '잉여 지식인' 양산
몰락한 지식인 김삿갓, 유랑 끝에 화순에서 죽어
16세기 과격파 조광조, 중종도 외면해 화순에서 사약
독립투쟁 위해 만주로 간 정율성, 중국·북한 군가 작곡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리움에 대하여
그리운 것이다. 적벽(赤壁) 아래 마을은 모두 사라졌으니,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적벽이 그리워, 강이 그립고 마을이 그리워서 해마다 적벽 앞 정자에 모여드는 것이다. 김삿갓이 그리운 것이다. 팔도를 떠돌다 화순 땅 동복마을 뜨내기 묘지 똥뫼에 묻힌 그 시인이 그리운 것이다. 그 화순 땅에서 동요를 부르던 정율성이 만주로 떠나,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악보를 들고서 독립 투쟁을 했던 연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왜 그가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북한 인민군가를 작곡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왜 거대한 석상(石像)들은 기립하지 않고 저렇게 하늘을 그리워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화순(和順)으로 갔다.
화순 적벽과 실향민
난산과 보엄, 월평을 비롯해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15개 마을은 1969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땅을 잃었다. 화순 북면에서 남면으로 흐르는 동복천을 가로막아 댐이 두 번 건설됐다. 마을들은 그때 수몰됐다. 댐을 막아 생긴 동복호는 광주 상수원이다. 5000명이 넘는 주민들은 실향민이 되었다.
한 번은 괜찮았는데 두 번째 일이 닥치자, 그리워졌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함부로 출입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도를 만들었다. 1996년이다. 임도 끝에 정자를 지었다. 망향정이라고 했다. 향토사학자 장두석이 주도했다. 옛 마을 사람들이 마을 돌과 흙을 가져와 탑을 쌓고 제단을 만들었다. 정자가 있는 뜰 정면에는 적벽이 있다. 붉은 절벽, 적벽(赤壁)이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에 유배당한 최산두가 붙인 이름이다. 눈 덮인 겨울, 꽃피는 봄, 녹음 창창한 여름, 단풍 불타는 가을 모두 아름답다. 적벽 또한 상수원보호구역에 갇혀 있다가 2014년 제한적으로 개방됐다. 30년 만에 풀렸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반갑다고 그리움이 소멸했을까. 대략 160년쯤 전 그 적벽을 찾은 시인이 있었다. 시인 이름은 김병연(1807~1863)이다. 흔히 김삿갓이라고 부른다. 김삿갓을 모르면, 간첩이다.
대량 생산된 잉여 지식인
18세기. 좋게든 나쁘게든 조선은 변하고 있었다. 세상을 지배하던 성리학이 비현실적임이 차츰 드러나고 있었다. 문제는 유통되지 않는 경제와 유통되지 않는 권력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양반계급이 토지를 기반으로 지배권을 유지하던 신분 체계는 농민들이 성장하면서 붕괴되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이 속출했다. 토지도 없고, 권력도 없는 '무늬만 양반'이 늘어났다.
양반은 직업이 독서다. 독서를 통해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몰락하면서 가난한 독서가, 그러니까 잉여 지식인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독서는 왜 하는가. 양반 신분 유지에는 과거 합격이 필수였으니까. 그런데 과거라는 것이 자리 잡는 놈 따로, 글 쓰는 놈 따로, 붓 놀리는 놈 따로 부리는 있는 집 자식들이 독차지하는 문란한 등용문으로 변해버린지라, 한번 몰락한 양반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개 그들은 남아도는 독서가, 잉여 지식인으로 떠돌았다. 자존심과 악만 가진 백수라는 말이다. 김병연이 그러하였다.
소시민 김병연, 시인이 되다
1811년 12월 평안도에서 반란군이 봉기했다. 주력 부대는 농민이었으나 지휘자는 몰락 양반 홍경래였다. 홍경래는 지방 과거에는 곧잘 합격했으나 한양에서 열리는 대과에는 어김없이 떨어지는 양반이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 내내 차별받던 평안도 선비였다. 10년을 이를 갈며 기다린 홍경래는 1811년 거병을 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양반, 농민, 천민까지 다양한 계층이 호응했다. 평북 일대를 점령한 반란군은 선천을 접수하고 의주까지 이르러 관군에 토벌됐다.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신분 체계와 국가 인력 수급 체계 또한 붕괴된 표본이 홍경래의 난이다. 반란군에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반란군이 진압된 뒤 반란군 목을 1000냥에 사서 조정에 바쳤다. 항복을 숨기고 공(功)을 참칭했다. 이 사실이 발각돼 김익순은 사형당했다. 그 김익순의 손자가 김삿갓이다.
김삿갓이 강원도 영월 과거장에서 할아버지를 비난하는 글로 장원급제했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세상을 떠돌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과거시험 답안지 맨 위에 집안 가계(家系)를 먼저 적고 시험을 보니, 이 말은 그르다. 대신 누군가가 그에게 역적 집안임을 조롱했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높다. '노진이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더니 김삿갓이 참 잘 지었다고 피를 토했다.'(대동기문)
김병연 또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머리털이 겨우 자랄 제 운명이 점점 기박하여 가문이 잿더미처럼 주저앉으니 상전이 벽해가 되더라.'(난고 평생시) 1828년 김병연은 한양으로 가서 같은 안동 김씨 집안을 들락거리며 관직을 기웃거렸다. 폐족된 양반이 부활할 수는 없었다. 소시민으로서 입신양명을 꿈꿨지만 불가능했다. 한양 권세가 집을 기웃대다 영월로 돌아간 김병연은 1830년 다시 집을 떠난다. 삿갓을 쓰고, 세상을 조롱하는 시를 쓴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랑 시인 김삿갓이 탄생하기까지 소시민 김병연은 긴 세월을 거쳐야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바로 화순이다. 화순 동복마을을 세 번이나 찾아와 머물다가 죽었다. 1863년 3월 29일이다. 김삿갓을 거둬줬던 압해 정씨 집안이 그를 마을 뒷산 무연고 집단 묘지 똥뫼에 묻어줬다. 3년 뒤 아들 익균이 찾아와 그 시신을 지게에 싣고 영월로 돌아갔다. 영월에는 영면지가, 동복 똥뫼에는 초분(初墳) 유허지가 있다.
죽기 전 김병연이 적벽에서 시를 지었다. '무등산 높다더니 솔가지 아래고 적벽 강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누나(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 세상 높고 넓은 줄 모르고 까불지 말라는 경고다.
기묘사화와 조광조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이 된 중종은 젊은 학자 조광조를 중용했다. 과거 급제 3년 만에 장관급인 종2품 대사헌이 된 전도양양한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조광조는, 과격했다.
자기가 정한 이상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와 모든 제도는 악(惡)이었다. 심지어 중종의 행동 또한 악이었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이 너무 많다고 29명만 빼고 훈장을 빼앗아 적을 만들더니, 조선 개국 이래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던 도교사당 소격서까지 없애라고 주장했다. 훈장 박탈은 함께 받은 토지도 박탈함을 뜻했다. 적들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을 퍼뜨려댔다. 당연히 거짓이고 억지였지만,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터진 정변이 1519년 기묘사화, 급진 개혁파를 압살하는 훈구파의 역습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된 조광조는 화순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사약이 내려왔다. 그때 그가 물었다. "누가 정승이 되었는가." "(정적인) 남곤과 심정"이라는 말에 그제야 체념하고 그는 사발을 들이켰다. 서른일곱 살이었다. 조광조, 이상론을 편 혁명가였을까 아니면 김삿갓의 조롱처럼, 솔가지 아래 산에 불과했을까. 그 문제적 사내 조광조가 화순에서 죽었다. 1667년 조광조의 정신적인 후배 송시열이 그를 기리는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화순을 떠난, 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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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리 바뀐 것이다. 당대 금기(禁忌)요 범죄자 취급했던 그 이름들이 모두 부활해 대한민국의 시대, 영웅과 혁명가로 추앙받는다. 화순을 상징하는 천불천탑의 도량, 운주사에는 일어서지 못한 불상 2기가 있다. 거대하기에 전체 모습을 본 이가 드물다. 왜 그 석상이 누워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만들다 만 작품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는 분명하다. 불상은 하늘을 바라본다. 천 년째 변함이 없다. 늘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화순에 가야 하는 이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8/20180328003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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