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77

[일제의 조선 지식인 탄압 및 변절 유도 사건]수양 동우회 사건 [修養同友會事件]

수양 동우회 사건 [修養同友會事件] [요약]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한 사건. 당시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가 각 지부에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담은 문서를 발송한 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그 배후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동우회가 수사망에 들게 되었다. 이에 안창호를 비롯해 이광수, 김성업 등 동우회의 지역 지부 대부분의 회원들이 검거되었고, 재판 끝에 적게는 2년, 많게는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재판에 회부되기 전, 최윤세, 이기윤은 고문 끝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김성업은 불구자가 되었다. 동우회사건이라고도 한다. 1937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그해 5월 '멸망에 ..

[한국전쟁:공산 중국군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전투]삼강령 전투

삼강령 전투 중국은 1952년 하반기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상감령에서 의지와 끈기로 버텨내 결국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관점에서 상감령전투는 흔했던 고지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중국이 북한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였다. 중국군사과학원에서 출간한 항미원조전사는 상감령전투에 대해 ‘1952년 10월 14일에서 11월 25일까지 43일간의 전투’라며 ‘전투가 전역(戰役) 규모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한다. 또 유엔군과 국군의 전투 참가 병력은 6만 명이라고 주장하면서 기간 중 190만 발의 포탄을 쐈다고 간주한다. 포병 화력 운용 밀집도에 관한 한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을 넘는 격전이었다는 것. 이에 비해 중국은 4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포탄 40여 만 발을 소모했다고 소개하..

암태도 소작쟁의 [巖泰島 小作爭議]사건

암태도소작쟁의 [巖泰島小作爭議]사건 1923년 9월, 암태도에서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소작인들이 1년 동안 친일 대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쟁의를 벌여 마침내 소작료 인하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것이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에 편승한 대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의 통치 권력에 항거한 1920년대 초반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꼽힌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했다. 이에 소작농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 등을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불납동맹을 결성했다. 그러자 지주는 소작료 강제징수를 감행했고, 목포경찰서는 수십 명의 경찰을 보냈다. 소작회는 쟁의를 강화했고, 일경은 소작인 50여 ..

[임진왜란 - 조선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해유령 전투(蟹踰嶺戰鬪)

해유령 전투(蟹踰嶺戰鬪)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부원수 신각이 경기도 양주에서 조선 육군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나 작은 전투이고 이치 전투에 밀려 잘 조명되지 않고 있다. 전투가 벌어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양주 전투(楊州戰鬪)라고도 불린다. 배경: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게 크게 밀린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마지막 정규군이 전멸하자 조선 왕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를 맡긴다. 신각은 자신의 군사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 대장 이양원과 합류해 양주로 후퇴했다. 양주에 진을 친 신각은 함경남병사 이혼과도 합류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투 과정 해유령 접전 한편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제2진 가토 기요마사는 개성으로 피란가던 선조의 어가를 쫓기 위해 선발대 70명을 ..

[조선 후기 - 농민항쟁]임술민란 (壬戌民亂)

임술민란(壬戌民亂)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 내용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조선- 정조 시해 미수 사건] 정유역변(丁酉逆變)

정유역변은 1777년 정유년에 있었던 반역 사건을 일컫는다. '정조 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아버지 홍지해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가진 홍상범 등이 주축이 되어 장조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 정유년 7월 28일 밤 11시 무렵 정조가 있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한 흔적이 발견됐다. 정조는 바로 금위대장 홍국영을 불러 대궐을 수색하게 했고 자객이 지붕 위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후 정조는 거처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정조는 범인을 잡는 데 소극적인 우포도대장 이주국을 파면하고 구선복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구선복은 8월 9일 밤 임금을 암살하기 위해 서쪽 담장을 넘던 범인을 붙잡았다. 이 사건으..

[조선 후기-인동 장씨 수난 사건]인동작변(仁同作變)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인동장씨와 인동작변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인동장씨와 인동작변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나라가 어수선할 무렵, 경상도 인동고을(현 구미시 인동)에서는 부사 이갑회가 부친 생일잔치를 벌이면서 지역 유력 사족인 인동장씨 장윤혁을 초대.. www.yeongnam.com 인동작변(仁同作變)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나 당시 인동 부사였던 노론 무관 출신 이갑회(李甲會)는 풍악을 울리며 부친의 생일 잔치를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윤종의 동생 장윤혁(張胤爀, 1734~1800)이 생일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자 부사 이갑회는 추석날 장윤혁의 후원에 소머리를 던져놓고는 인산 전에 소를 도축하였다는 혐의로 장윤혁의..

[조선-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상적 갈등] 회니시비[懷尼是非]

개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

[조선- 명재상으로 불리운 "황희"의 사위 살인 은폐사건]서달(徐達)사건

태종, 세종조 명재상으로 불리운 황희(黃喜, 1363 ~ 1452)가 사위 서달(徐達)이 사람을 죽이자 이를 은폐하려고 역시 청백리로 불리운 맹사성(孟思誠, 1360~1438)및 서달의 아버지인 서선(徐選) -당시 형조판서-과 공모한 사건. 대표적인 권력형 비리이나 왕조시대인지라 당시 임금인 세종의 배려(?)로 형식적인 파직 뒤에 세 사람 모두 복직되어 승승장구했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이야기. [내용] 서달이 어머니를 모시고 충남 온양 온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신창현(충남 아산)을 지날때 이 지역 아전 2명이 서달을 지나쳐 갔다. 이들이 인사를 하지 않아 건방지다며 잡아서 때리자, 동료 아전인 표운평이 항의하자 이번엔 표운평에게 곤장 50대를 때려 다음날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서선과 황희는 진..

[서애와 학봉 선생의 위패 자리를 놓고 다툰 향전(鄕戰) ]병호시비(屛虎是非)

병호시비(屛虎是非)는 호계서원에서 퇴계 이황의 좌측에 김성일과 류성룡 중 누구의 위패를 둘 것이냐, 즉 김성일과 류성룡 중 누가 더 퇴계의 제자로서 서열이 높으냐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에 다툰 갈등이다. 1620년 처음 시작되었으며,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김성일과 류성룡의 후학들이 서로 절교하는 등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2009년 안동시에서 호계서원을 복원하면서 좌측에 류성룡을, 우측에 김성일과 이상정의 위패를 배치하기로 하면서 389년만에 종료되었다.[위키백과] ------------------------------------------ 1620년(광해군 12) 이후에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전개된 분쟁. 개설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