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77

232년만에 명예회복, 단종과 광해군의 결정적 차이

왕이 된 이듬해인 1453년,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불리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당했다. 이때 나이가 만 12세. 2년 뒤인 1455년에는 수양대군이 주상(조선왕의 공식 명칭)이 되면서 단종은 상왕으로 밀려났다. 다시 2년 뒤인 1457년에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격하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가 ..

[제주 4,3사건 이야기]4·3 운명을 바꾼 세 명의 군인[김익렬, 박진경, 문상길]

제주 4·3 사건 (Jeju uprising, 済州島四・三事件) [운명을 바꾼 세 명의 군인] 제주 4·3 당시 9연대장이던 * 김익렬 중령은 인민유격대 사령관을 만나 협상했다. 하지만 평화를 못마땅해하는 미군정은 그를 해임했다. 끝내 제주도민 수만명이 죽고 말았다. 오늘은 네게 참 하기 힘든 얘기를 들려줘야겠구나. 올해는 2018년. 1948년 4월3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반대를 외치는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4·3 70주년이다. 무장봉기라고 하지만 무장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어. 구식 일제 소총 27자루, 권총 3정과 죽창이 그 ‘무장’의 전부였으니까. 실제 봉기에 참가한 이들도 수백명에 불과했어. 그나마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이들은 소수였고 미군정의 그릇된 행정과 경찰들의 만행에 분노한..

[한국전쟁-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했던 국군 6사단이 설욕한 전투]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

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는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7일 ~5월 21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 및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용문산 전투한국 전쟁의 일부날짜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장소용문산과 그 일대결과 대한민국 국군의 대승 ..

[한국전쟁- 국군이 중공군에게 가장 크게 패한 전투, 3군단의 해체]현리 전투(縣里戰鬪)

현리 전투(縣里戰鬪)는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공군이 춘계 공세를 벌였을 때 벌어진 전투로 인제군에 있던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현리 전..

[한국전쟁- 국군 6사단이 중공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사창리 전투 (史倉里戰鬪 )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받아 사창리일대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전투. 목차접기 내용 내용 중공군은 1951년 4월 공세의 조공부대인 중공군 제9병단으로 하여금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한국군 제6사단은 22일 사단 전방..

[한국전쟁- 국군 8사단이 중공군에게 궤멸당한 전투]횡성전투[橫城戰鬪]

1. 개요 한국전쟁 시기, 1951년 2월 펼쳐진 중공군 3차 공세에서 한국군 제8보병사단이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에 궤멸당한 전투. 2. 전투 전 상황 1951년 1월, 유엔군은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명령에 의거해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 중공군이 물러난 지역을 접수하며 순조롭게 전진 중이었다. ..

[한국전쟁] [국방TV 6·25전쟁 65주년 특별기획①] 1950년 혹한의 겨울!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국방TV 6·25전쟁 65주년 특별기획①] 1950년 혹한의 겨울!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관련 읽을거리] 한국전쟁/왕수쩡/글항아리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중국 작가 모옌이 “중국 역사 논픽션의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만들어냈다”고 추켜세운 루쉰문학원 동기생 왕수쩡(王樹增·61)의 ‘한..

[한국전쟁]중국군 60군 180사단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전투[1951년 5월]

[한국전쟁 5차전역 이동단계의 전투 1951년 5월] 한국전쟁 5차전투에서 진공섬멸단계를 완성한 후, 지원군의 각 병단은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적을 너무 경시하다가 엄호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미군의 신속한 반격을 받았고, 순식간에 미군과 한국군의 포위에 빠졌다. 주력부대는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3병단 60군의 180사단은 절반의 병사를 잃어서 거의 전멸이었다. 전체 전투에서 중국과 조선군은 8만5천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 지원군의 사망인원이 7만5천명이었다. 이 때 실종자가 2만여명에 달하였는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중 17,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이외에는 아마도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cafe.daum.net/cjwhc/1nxV/7375 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인민해방군..

[한국전쟁 -유엔군이 중공군 4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승리한 전투]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砥平里戰鬪 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지평리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지평리 전투 개요 날짜 1951년 2월 13일 ~ 2월 16일 장소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현 지평면) 지평리 결과 UN군 승리 교전국 미국 프랑스 중국 지휘관 폴 L. 프리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