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77

한국전쟁 전후 전남지역민간인 학살 사건[출처: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 범국민 위원회]

날짜조회 수12[장흥] 부역혐의 사건 관리자2011-10-13353911[진도] 부역혐의 사건 관리자011-10-13433410[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 관리자2011-10-1051879[강진] 강진경찰서 부역혐의 사건 관리자2011-10-0680558[장흥] 경찰토벌사건 관리자2011-10-0553467[영광] 11사단 사건 관리자2011-09-2937766[화순] 11사단 사건 ..

[보도연맹 사건 관련]해남, 완도 나주경찰부대 사건

해남에서는 1950년 7월 16일(갈매기섬 사건)과 7월 22일(화산면 해창리)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하며, 완도에서는 1950년 7월 17일(목포 인근 바다)과 1950년 7월 23일(완도 바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해남경찰은 1950년 7월 23일 부산방면으로 후퇴했으며 완도경찰은 7월 24일 금일읍 소랑도로 후퇴했다. 다음 날인 1950년 7월 25일 해남과 완도경찰이 후퇴한 사실과(이를 몰랐다면 인민군으로 위장한 나주부대 경찰과 해남 완도경찰 간의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므로) 수백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희생사실을 알고 있었을 나주경찰부대가 경찰신분을 숨긴 채 해남에 들어와 인민군 행세를 하며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전날까지 후퇴하던 경찰에게 가족들을 학살당한 유족들과 주민들..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 춘생문 사건(春生門 事件

춘생문 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에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한국전쟁 전, 중]민간인 학살 사건 목록[List of massacres]

Name Date Location Deaths Notes Asan massacre 1950 Asan 200+ Commited by SK police, Korean Youth League and Taeguki Alliance.[1] Autumn Uprising of 1946 1946, September-October South Korea 38 policemen, 163 civil workers, and 73 civilians Bodo League massacre 1950, Summer South Korea 100,000–200,000 [2][3] Bloody Gulch massacre 1950, August 12 Masan 75 Chaplain-Medic Massacr..

[한국전쟁 - 민간인 학살 사건 증 하나]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 한국전쟁 당시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인 작전명 제5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민간인을 통비 분자로 간주해 골짜기에서 내려오면서 차례차례로 3개면 4개 마을 705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말..

[중국공산당이 내부의 민생단 조직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조선인 집단 살해 사건]민생단사건 (民生團事件)

민생단사건 (民生團事件) 1. 개요 간도 조선족의 흑역사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중국의 동만주, 즉 간도 일부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친일 단체인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 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 살해한 사건이다. 중국 측이나 조선족 측에서는 '반(反) 민생단 투쟁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의 조선인 마녀사냥으로, 간도참변에 이어서 조선족 사회를 처참하게 만들었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조사에서 밝혀진 희생자만 367명이며, 실제 피해자의 규모는 이보다 많은 1천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공식적인 증언[1] 등에 따르면 약 2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2. 사건..

이필제의 난 (李弼濟─亂)

이필제의 난 (李弼濟─亂) 1871년(고종 8) 3월 10일(음) 동학교도인 이필제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 역사적 배경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는 자신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1871년 말까지 9년 동안 진천·진주·영해·문경 등지에서 4번에 걸쳐 봉기를 주도하였다. 특히 1871년 3월 10일(음) 전개된 영해봉기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1870년 7월 진주작변(晋州作變)에 실패한 이필제는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5차례에 걸쳐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최시형은 수일간 이필제와 머물면서 영해봉기를 계획하였다. 경과 및 결과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스크랩] 亡國 재촉한 중화숭배… “우리는 明의 유민이다” /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明의 은덕 저버린’ 광해와 조선의 ‘꺼삐딴 리’들 亡國 재촉한 중화숭배… “우리는 明의 유민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신적·문화적 식민지를 자처했다. 명·청 교체기 명(明)과의 의리 고수는 조선의 국익과 배치하는데도 어떻..

[임진왜란 관련]임진왜란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실제 있었다"

안대회 교수, 참전 인사들이 남긴 明의 특수부대 기록 발견 [동아일보]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오는 ‘세전서화첩’ 가운데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본국 귀환 장면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위). 이 그림의 왼쪽 하단(흰 네모)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