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사건, 제도 77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임진왜란 이야기 모음[한겨레 신문 연재 글]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연재리스트 이순신은 왜 무능한 왕조를 전복하지 않았나 명청교체 소용돌이, 또다른 전쟁이 싹트고… 선조의 의주 파천이 나라를 구했다고? “조선인 코를 베어오면 땅을 주리라” 명에 겁박당하고 일본에 손발을 묶이다 “일본 상인, 조선인 원숭이처럼 목줄로 묶어…” 조선 고위신료들, 명군에게 곤장을 맞다 개 한마리 남기지 말고 죽여 없애라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 후궁으로 보내라” 류성룡, 이여송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으나… “평양성 탈환, 명군이 죽인 자의 절반은 조선인” 이순신, 멸망위기의 조선을 구하다 왕자 잡혀가자…“일본군의 심장을 구워먹었다” 충격적 평양성 참패…압록강을 사수하라 경복궁에 불붙인 건 일본군이 아니었다 연재리스트 200년 만의 전쟁,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나는 ..

[스크랩] 지붕. <집을 읽다> 뒷산을 닮은 선, 우리 집이 가진 심성을 보여주는 지붕.

. 01. 김정희선생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주로 하여, 지형의 고저 차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여, 지형에 따라 층을 지게 적절히 처리했다. ⓒ이미지 투데이 &lt;집을 읽다.&gt; 뒷산을 닮은 선, 우리 집이 가진 심성을 보여주는 지붕 뒷산을 닮은..

최천익(崔天翼·1712∼1779) 선생의 ‘농수집(農수集)’에 실린 ‘삼강비명(三綱碑銘)

이희룡(李希龍)은 말 타기와 활쏘기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義州)에 가 있다가 영남의 적병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들은 영호남에 걸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은 적병을 피해 몰래 경주, 울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의 허실과 형세를 알아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 한명기 명지대 교수[서울신문]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 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서울신문] 2008.12.31 (수)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청군은 병력의..

[스크랩] 1968년도 칼라사진으로 본 서울과 위성도시 풍경

▒ 1968년도 칼라사진으로 본 서울과 위성도시 풍경 ↑ 청계천에서 시립청소년수련원으로 들어 가는 골목입구 ↑ 장충동 사거리(장출체육관 맞은편) ↑ 한강인도교에서 용산 삼각지 방향 ↑ 한강대교 용산방향에서 노량진방향 ↑ 청계천 삼일로 부근 ↑ 시청앞 프라쟈 호텔 뒤편의 소공..

‘김종필 증언록’이 밝혀낸 현대사 새로운 진실

‘김종필 증언록’이 밝혀낸 현대사 새로운 진실 ‘ 김종필 증언록 笑而不答(소이부답)’은 현대사 기록이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역사 비록(秘錄)의 창고에 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JP는 그것에 햇빛을 쬐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

[스크랩] 다락, 아쉽고 그리운 보물창고 / 집을 읽다.

. 01. 상주 양진당(보물 제1568호). 건물의 우측 날개 채 상부의 다락은 어 린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생활하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락, 아쉽고 그리운 보물창고 우리나라의 근현대 시기에는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는 등 새로운 ..

[스크랩] 한국의 美_온돌 / 따뜻한 온돌, 찬 겨울을 녹이다 , 아랫목에 깃든 따스한 정

. 한국의 美_온돌 따뜻한 온돌, 찬 겨울을 녹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돌을 달구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겨울 난방방식인 온돌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조화를 중요시 여긴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절절 끓는 아랫목에 ..

[식민사학의 뿌리]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가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으로,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한국인의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1]. 조선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주로 하였으며,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사를 왜곡하여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는 활동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