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증언록’이 밝혀낸 현대사 새로운 진실
김종필 증언록 笑而不答(소이부답)’은 현대사 기록이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역사 비록(秘錄)의 창고에 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JP는 그것에 햇빛을 쬐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잘못 알려진 현대사의 진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JP의 증언은 역사 기록의 무대에 긴장감을 준다.
근거 없는 현대사 논쟁, 왜곡된 신화, 굴절된 사건 기록들은 이제 수정과 재구성의 상황을 맞게 됐다. 중앙일보 ‘증언록 팀’은 JP의 증언을 검증하고 확인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에 2015년 3월부터 12월 초까지 매주 3회, 114회 연재됐다. 그의 회고 중 ‘새로운 진실’ 10가지를 뽑아 소개한다.
박정희 사상 의혹 씻어낸 ‘반공 국시’
‘혁명공약’의 마지막은 원대복귀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라는 제6항은 박정희 소장이 추가한 것이다. JP는 “나는 ‘어차피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2015년 3월 3일자 4면>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JP, 장도영 거세
JP는 “장도영은 자기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어. 그것이 5·16 주체 세력의 내분을 일으킬 것으로 판단해 제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장도영 제거는 박정희의 군 복귀 퇴로를 막았다. “박 대통령의 약한 권력 의지를 굳건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가 권력에 자신감을 가진 시점은 60년대 후반부터다. <4월 6일자 6면>
황태성, 밀사 아닌 김일성이 보낸 간첩
JP는 “황은 밀사가 아니라 큰 간첩이었다. 김일성은 나와 박 의장을 만나 북한에 합류하도록 설득 공작을 해보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했다. 미국 측의 요구로 황태성의 신병을 미 CIA(중앙정보국)에 넘겼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JP는 “미국은 황과 박 의장의 관계를 의심하고 조사를 질질 끌었다. 대선에서 졌다면 이를 문제 삼아 결딴내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황태성의 신병을 돌려줬고 63년 12월 14일 사형이 집행됐다. <4월 22일자 6면>
김·오히라 메모 진본은 손바닥 크기
‘Top Secret’이란 영어 제목과 함께 ‘오히라 외상이 (JP에게) 각 문제 토의 때 설명한 별첨 메모’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서류는 ‘김-오히라 메모의 원본’이라고 보도됐다. 이 서류는 김종필-오히라 회담 때 작성된 메모로 간주됐다. 하지만 JP는 “이 문서는 내가 작성한 게 아니다. 김-오히라 메모지는 손바닥만 하다. 한글과 한자만 있다”고 증언했다. 메모의 진본은 관리 소홀로 사라졌나, 아니면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묻혀 있을까. <5월 4일자 6면>
독도 폭파론·밀약설은 실체없는 주장
일부에서 제기하는 ‘독도밀약설’도 JP는 부정했다. 독도밀약설은 65년 정일권 총리가 ‘독도를 미해결 상태로 놔두자’는 밀약문을 일본 정부와 비밀리에 작성해 박정희의 승인을 받았고 이 문서를 JP의 셋째 형 김종락씨가 지니고 있었다는 의혹이다. JP는 “밀약, 밀약문은 없었다. 정일권 총리가 일본 측 생각을 전한 것이 밀약설로 부풀려진 것이다. 종락 형님도 그런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5월 4일자 6면>
박정희는 이승만의 환국을 추진했다
JP는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이 전 대통령 부부를 만났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박 의장이 내어준 2만 달러를 전해 드렸는데, 파란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어. 이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나빠 환국이 불발됐지.” JP는 “그런데 박 대통령이 환국을 막았다고, 거짓이야”라고 했다.
당시 외무부 기획조정관이던 김영주씨는 “62년 3월 박 의장의 전화를 내가 직접 받았어요. 귀국 시기는 정부와 협의하라고 했을 뿐 이 박사 귀국은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박 의장의 전화 지시는 이행 과정에서 “이 박사의 귀국은 안 된다”는 것으로 변질, 과장된다. <7월 17일자 12면>
김재규 ‘민주투사’는 각색·조작
JP는 김재규를 ‘발작증 환자’로 규정하고 그 사례를 들었다.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패했고 발작증이 도져 총을 쏜 것”이라고 했다. 79년 10·26 그날 밤 현장에 동석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말을 들었다. “김계원씨는 김재규의 발작 과정을 소상히 이야기해 줬어. 그 후에 그는 내게 한 이야기를 번복하지 않았어.”
78년 2월 김재규는 JP에게 “중앙정보부는 앞으로 박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임무에 기능과 자원을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JP는 “종신 대통령을 거론한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운운했는데 말이 되느냐. 더구나 그는 권총에 총알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도 몰랐어”라고 했다. <8월 5일자 12면>
DJ 납치는 이후락의 권력 처세술
김종필은 이를 “이후락의 죽을 꾀”라고 했다. “이후락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을 일을 꾸며서 권력의 존재감을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이후락은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73년 1월에 터진 윤필용 사건에 이후락은 연루된다. 이 사건으로 이후락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
JP는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이후락이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꾸며 재간을 부린 것이 DJ 납치사건”이라고 했다. JP는 당시 국무총리였다. JP는 박 대통령이 “이후락 그 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 놓은 뒤에야, 나한테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7월13일자 12면>
차지철 경호실장, 육영수의 유작인 셈
JP는 “생전에 육 여사가 입버릇처럼 차 의원을 써보라고 박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술·담배를 안 하고 고지식하고 독실한 신자라는 게 육 여사의 차지철에 대한 평가였어. 혼자 잠자리에 든 박 대통령은 육 여사의 그 말이 생각나 차지철을 쓴 게지.” 그는 “박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을 스캔들 없이 스스로 단속하기 위해 차지철을 기용했는데, 결과는 반대였어”라고 했다. 차지철 인사는 육 여사의 유작(遺作)인 셈이었다. <7월 22일자 12면>
박정희 기념관은 DJP 해원의 산물
JP는 그것을 역사의 해원(解寃)으로 설명하면서 “나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라고 했다. JP는 내각제 개헌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요청했다. DJ는 집권 후 기념관 약속을 실천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DJ 시절 200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았으나 노무현 정권 때 건립이 연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완공된 기념관은 DJP 통합 정신의 산물이다. <10월 23일자 12면>
[S BOX] 14개월간 매주 JP와 토요 인터뷰 …
녹취록 1200쪽 동영상 80시간 기록
2014년 10월부터 지난 11월 말까지 꼬박 14개월이 걸린 긴 여정이었다. 매주 토요일 서울 신당동 김종필(JP) 전 총리 자택 거실에선 김종필 증언록을 위한 인터뷰가 진행됐다. 50년 가까이 벽에 걸린 ‘笑而不答’(소이부답) 편액이 내려다보는 거실에서 JP와 4명의 취재기자, JP 곁을 오래 지켜온 보좌관 2명이 매주 만났다.
토요 인터뷰는 총 51회에 걸쳐 진행됐다. 하지만 정례 인터뷰만으로는 JP의 90 인생을 정리하기에 빠듯했다. 보충 질의를 위한 평일 인터뷰가 수시로 이어졌다. JP는 “언제든 무시로 와도 돼”라며 기자를 반겼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인터뷰에 JP는 지친 기색 없이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동안 진실로 여겨졌던 내용을 통째로 뒤집어버리는 증언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JP는 “어때 놀랐지? 내가 이거(증언록) 남기기를 잘했네”라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이 구술받아 정리한 증언록은 매회 JP 본인이 꼼꼼히 검토했다. 때로는 수식어 하나까지 손봤다. JP는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장은 감동이 있어야 해. 감동이 없으면 죽은 문장이야.” JP와 인터뷰는 증언록 연재 기사뿐 아니라 A4 용지 1200쪽 분량의 녹취록과 80시간 분량(40회)의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각계 인사들이 본 ‘김종필 증언록’
박찬종 전 의원 5·16으로 성공적 국가 개조, 역사에 기록될 것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 “민주주의, 빵 먹고 자란다” 정치인 사명감 일깨워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정치는 허업”이라는 말 왜 했는지 알게 돼
이영애 배우 문화·예술 인프라 마련해준 ‘다빈치적 인간’
황은연 포스코 경영지원본부장 묻혀버릴 뻔한 진실 생동감 있게 살아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현대사 연구자로서 더 세밀한 구술 받고 싶어
에릭 월시 주한 캐나다 대사 한국 근대화·민주화 과정 이해할 수 있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전승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사라진 김·오히라 메모, 5·16 반공 국시, 차지철 임명…JP가 끄집어낸 비록들, 역사에 새로운 생명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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