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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국군 8사단이 중공군에게 궤멸당한 전투]횡성전투[橫城戰鬪]

Bawoo 2017. 6. 12. 10:51


1. 개요

한국전쟁 시기, 1951년 2월 펼쳐진 중공군 3차 공세에서 한국군 제8보병사단이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에 궤멸당한 전투.

2. 전투 전 상황

1951년 1월, 유엔군은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명령에 의거해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 중공군이 물러난 지역을 접수하며 순조롭게 전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2월에 들어와 횡성과 지평리 일대에서 전선을 정리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라운드업 작전이 개시,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한데 점차 적의 저항이 강해지며 진격이 무뎌지기 시작하면서 횡성과 지평리 두 곳에 돌출된 전선을 형성했고, 이렇게 진격이 무뎌진 미군과 한국군을 노리고 중공군의 대공세, 이른바 중공군 3차 공세가 펼쳐지게 된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공세를 격파하기 위해 골몰하던 중,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진격한 유엔군 병력이 톡 튀어나온 걸 보자 이들을 잡아먹기 좋은 절호의 먹이로 판단했다. 당시 펑더화이는 라운드업 작전으로 돌출된 지평리 일대의 미군과 횡성 일대의 한국군을 놓고 어느 쪽이 격파하기 더 좋은 먹잇감인지 골몰했고, 횡성과 지평리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에 대해 중공군 수뇌부 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머릿수는 더 많아도 약체란 점 때문에 횡성이 우선 목표가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일대에서 돌출된 한국군 8사단을 격파해 커다란 구멍을 만든 후 유엔군의 측후방을 유린하는 공격작전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중공군 공세의 가장 첫 목표는 한국군 8사단이 되었다.

당시 횡성 일대에 있던 한국군은 공격작전 중이라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마련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공세를 우선하다 보니 부대간에 촘촘한 방어선조차 꾸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한국군 8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 사이에 빈틈이 많이 생겨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단과도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왼쪽, 오른쪽, 옆구리까지 비워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작전계획 상 제대로 된 예비대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캄캄한 밤이나 새벽을 틈타 홍천 방면에서 연결되는 산악 능선을 타고 이미 다수의 중공군 병력이 횡성 일대에 잠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중공군의 공세가 몰아쳤다.

3. 전투

1951년 2월 11일 밤, 중공군 40군 42군 66군은 8사단을 향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다. 8사단이 만들어둔 부대 간격 간격마다 중공군이 파고들어갔고, 빈틈을 따라 깊숙이 내달린 중공군은 곳곳에서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며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대대도, 연대도, 사단도 전혀 지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된지 몇 시간만에 8사단은 완벽하게 마비상태에 빠졌다.

조직으로서 움직이지 못한 채 고립된 8사단 병력들은 무질서하게 후퇴를 시작했으나 곳곳에서 퇴로를 차단한 중공군에 의해 후퇴 도중에 격파되고 말았다. 8사단의 전방 부대가 궤멸되면서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미군 지원병력과 한국군 포병대도 그대로 포위망에 갇혔고,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중화기와 중장비를 전부 버린 끝에 겨우 몸만 건질 수 있었다.

2월 13일, 중공군의 공세 시작 후 대략 하루만에 8사단은 궤멸되었다. 살아 돌아온 뒤 차후 다시 전투 투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 8사단 병력은 3000여명 정도. 그 중에서도 태반은 애초 후방인 사단본부에 있던 병력으로, 사단 전방에 있던 8사단 예하 3개 연대는 대부분이 전사, 포로 혹은 부상으로 전투서열에서 빠짐에 따라 소멸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4. 결과

8사단을 격파하면서 만들어낸 돌파구를 통해 중공군은 공세를 계속 했고, 한국군 3사단5사단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중공군은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갔으나 미 제 2사단에 의하여 지평리에서 저지, 그 동력을 잃고 공세를 중단해야만 했다.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와중에도 네덜란드 대대가 퇴각을 엄호하였고, 그 덕에 그나마 한국군이 병력을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8사단 병력은 사단 작전명령에 따라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편성 과정에 들어갔다. 또한 원주 - 문막 도로와 원주 - 제천 도로 상에 낙오병 수집소를 설치하여 후퇴 과정에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였다.

5. 기타

리지웨이는 이후 자서전에서 횡성 전투를 두고 ‘한국인의 유전자에 중국인에 대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라고 했는데, 이는 그 때까지 한국군의 무능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그리 써놨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로서의 무능함만 탓하면 될 걸 유전자 운운한 건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봐도 될 정도.)

횡성 전투를 두고 미군이 일부러 한국군을 돌출시켜서 미끼로 쓴 건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8사단 측에서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그냥 진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건의하였지만 미 10군단장인 알몬드는 이를  묵살하고 계속 진격하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고, 횡성에서 한국군이 궤멸되었지만 그렇게 생긴 빈틈으로 파고든 중공군을 결국 지평리에서 저지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중공군 3차 공세를 저지시켰기 때문.

한데 중공군의 반격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치고는 횡성에서 8사단의 준비 태세 자체가 꽤나 졸렬했다. 거기다 당시 상황에서 전방으로 돌출된 부대는 횡성 일대의 한국군만이 아니라 지평리 일대의 미군도 마찬가지였으며, 중공군 수뇌부도 지평리를 노릴지 횡성을 노릴지 고심하다 횡성을 선택했다. 즉 한국군만 돌출시켜 미끼로 썼다고 보기엔 지평리에 돌출된 미군 때문에 무리가 있는 것.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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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로 평택∼원주∼단양∼정선∼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부터 평택에서 수원까지 적의 배치와 규모를 탐색할 목적으로 서부전선에서 울프하운드 작전(Operation Wolfhound)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은 수원∼여주 이남지역에는 중공군의 소규모 부대만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토대로 유엔군은 수색정찰에서 지역확보로 작전개념을 전환하고 1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으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월 초까지 공산군의 남한산 교두보를 제외하고 한강 남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 Up)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서부전선의 썬더볼트 작전과 보조를 맞추어 한강 남안에서 홍천으로 연결되는 선을 확보하여 서울 탈환의 여건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작전과정에서 국군이 선봉을, 미군이 후속부대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한 것은 서부전선의 작전과는 정반대되는 병력운용 방법이었다.


경과

라운드업 작전은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이 공격부대가 되어 2월 5일에 개시되었으며, 작전개시 후 약 3일 동안에는 예정대로 계획된 제한목표들과 통제선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그 후 공산군의 주저항선에 부딪치면서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려웠다.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3사단까지 추가로 투입하고서도 2월 11일에 제1단계 목표인 오음산∼포동리선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새로운 공세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조중연합사령관 펑더화이는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계획하였다. 즉 서부전선에서는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전진을 저지시키고, 대신에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전선 돌출부에 대해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한 국군 제8사단이 배치된 횡성지역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17시를 기해 횡성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선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이 횡성 서북방에서 진격로를 개척하고, 이어 19시에 중공군 제66군단 주력이 국군 제8사단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예비대 없이 예하의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투입해 진격하라는 미 제10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횡성 북방 삼마치고개로 진출한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사력을 다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제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인 2월 12일 01시경부터 지휘통신의 두절과 함께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제8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거나 혹은 개별적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의 조기붕괴는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군 지원부대들은 전방사단의 붕괴사실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함으로써 이들마저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군 지원부대들은 화포와 차량 등 많은 중장비를 버리고 산악능선을 따라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철수과정에서 미 제7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대대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네덜란드대대는 전방부대가 횡성으로 철수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횡성교를 대대장의 전사와 적중 고립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12일 야간까지 확보해 줌으로써 분산되었던 부대들의 철수가 그나마 가능하였다.


결과

횡성전투 결과, 국군 제8사단은 잔여병력이 장교 263명과 사병 3,000명에 불과했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사단 근무요원이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여기에는 제10연대의 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의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과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사단이 보유한 대부분의 장비가 손실되었다.

횡성전투 이후 국군 제8사단은 원주 남쪽의 주천리로 물러나 일단 부대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을 실시한 후 후방의 공비토벌작전에 임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남쪽의 원주와 지평리로 진출하여 2월 공세를 계속하였으나 지평리에서 이들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참고문헌

  • 『6·25전쟁의 실패사례와 교훈(개정판)』(육군군사연구소, 2013)
  • 『6·25전쟁사: 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8(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 『6·25전쟁 60대전투』(온창일 외, 2010)
  •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5)
  • 『횡성전투』(국방군사연구소, 1995)

[출처: 정보-/ 자료 수집-/나무 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글 더보기]횡성전투에서 맹활약하던 네덜란드군은 중국군 개입으로 남하했던 전선이 다시 북상하면서 횡성읍 북천리 공설묘지 인근(현재 보건소와 중앙아파트 부근) 야산에 진을 치고 북진을 준비하던 1951년12월12일 대규모의 북한 및 중공군과 맞붙어 공방전을 벌인다.

이틀간의 처절하고 치열한 전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대대병력을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횡성감리교회로 퇴각하였다.

이들의 생각은 아무리 공산주의자들이라도 성스러운 교회에 총격을 가하지 않으리라는 지극히 인도주의적인 발상이었다.

북한군은 아군복장으로 위장하고 지원군으로 가장하여 교회에 접근하였으며, 네덜란드 군이 한국군으로

오인하고 방심하는 틈을 타 무차별 공격을 하니 궤멸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오우덴중령을 비롯해 대부분이 전사하고 급한 나머지 아궁이, 굴뚝에 은신한 소수만 심한 중상을 입고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정전 후에도 곧바로 철수하지 않고 육군은 1954년 10월 18일까지, 해군은 1955년 1월 24일까지 남아 전쟁억제와 전후복구를 위해 헌신하다 개선하였으니, 전사자 117명을 비롯해 768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횡성전투에서 산화한 오우덴중령(대령 추서)과 병사들을 기리는 충혼비(횡성읍 삼일공원)와, 정부가 세운 네덜란드군 참전기념비(우천면 참전공원)가 있어 해마다 뜻 깊은 추모행사를 하고 있으며, 한때 우리군과 오우덴중령의 고향인 가스텔시와 결연을 맺기도 했다.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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