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리 전투(縣里戰鬪)는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공군이 춘계 공세를 벌였을 때 벌어진 전투로 인제군에 있던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현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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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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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 ||||||
지휘관 | |||||||
3군단장 유재흥 7사단장 김형일 9사단장 최석 3사단장 김종오 | 펑더화이 | ||||||
병력 | |||||||
국군 제3군단 | 제2, 3, 5군단 | ||||||
피해 규모 | |||||||
불명 |
경과
중공군 12군단, 27군단과 조선인민군 5군단은 3군단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3군단이 포위당하자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했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쪽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 도주 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 9사단 병력 1만 9천여명이 희생됐고, 병력의 40% 가량만 복귀했으며, 무기는 거의 다 뺏겼다.
증언
정병석 인제 문화원장은 15세때 3군단 3사단 18연대에 학도병으로 배치됐다. 그는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 중턱을 탈출로 삼아 밤낮 없이 걸었으며, 곳곳에는 탈진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1]
영향
- 당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으며,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평가
임진왜란 당시의 칠천량 해전, 병자호란 당시의 쌍령 전투와 함께 역사상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힌다.
함께 보기
참조
- 온창일 외, <<6.25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각주
- 이동 ↑ 임보연; 박종성VJ (2010년 4월 5일). “<6.25 참패 '현리전투' 참가자 정병석씨>”. 연합뉴스. 2011년 12월 11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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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로 한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장비를 거의 다 파괴 또는 유기하게 된 반면,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으로 남하하여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 소재.
역사적 배경
1951년 3월 말 유엔군이 캔사스선(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구∼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자 공산군은 전선 분할과 양익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951년 4월 22일부터 29일까지 약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부와 중서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했다.
4월 공세 이후 공산군은 계속해서 중동부전선의 돌출된 국군을 섬멸한다는 작전계획 하에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 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 때 공산군은 미 제10군단 우측의 국군 제5·7사단,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3·9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11사단을 공격목표로 하였다. 특히 강원도 인제지역의 국군 제3군단이 주요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공산군은 이 지역으로 중공군 2개 군단(제20·27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제5군단)을 투입하였다.
경과
중공군의 대공세는 5월 16일 16시경부터 강력한 공격준비포격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1시간여의 포격에 뒤이어 보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국군 제7사단정면에 집중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이 지역은 중공군의 종심기동 부대가 빠른 시간 내에 국군의 후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기동로로 계획한 곳이었다. 국군 제7사단 지역에는 중공군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제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오마치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단 예하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가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신속하게 국군 후방으로 진출해 갔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일 04시에, 대대가 07시에 국군 제3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고개 일대를 점령하였다.
오마치고개의 피탈로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17일 13시 경부터 현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현리에는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 군단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대 등 많은 병력이 혼재된 상황이 되었고, 유일한 철수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상황이 전파되면서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국군 제3군단은 17일 17시 30분경부터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는 이미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고개와 침교 일대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과 후방의 위협에 압도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부대가 분산됨으로써 산악지대를 따라 60㎞를 후퇴한 뒤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5월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제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제3군단장에게 하진부리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지만, 제3군단은 5월 21일 다시 제3사단이 송계리로, 제9사단이 대화로, 군단사령부가 영월로 각각 퇴각하였다.
결과
철수과정에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반면에 국군을 추격한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으로 남하하여 유엔군 전선에 큰 돌파구를 만들었다. 미 제8군에서는 예비대인 미 제3사단을 투입하여 전선을 수습하고 다시 전세를 만회했다
국군 제3군단은 방어작전에 실패함은 물론, 인접 부대와의 협조나 부대의 통제 및 후방 방호대책 등에 큰 실책을 범하여 6·25전쟁사상 가장 큰 패전의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라 1951년 5월 21일 18시부로 담당 지역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인계하고 1951년 5월 26일 국군 제3군단은 해체의 비운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 『우리가 겪은 6·25전쟁』(대한민국육군협회, 2013)
- 『현리-한계전투』(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09)
- 『현리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8)
- 『한국전쟁요약』(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자료 더 보기:현리 전투 - 나무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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