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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했던 국군 6사단이 설욕한 전투]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

Bawoo 2017. 6. 14. 21:56


    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는 한국전쟁1951년 5월 17일 ~5월 21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용문산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
장소용문산과 그 일대
결과

대한민국 국군의 대승

  • 현재 동부 휴전선 일대까지 진격
  • 중공군 춘계공세 실패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장도영불명
병력
대한민국 6보병사단 2연대, 7연대, 19연대중화인민지원군 63군 예하 3개 187사단, 188사단, 189예비사단 약2~3만여명
피해 규모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나 한국의 전쟁 기념관에 의하면 5천 명 가량 사살 추측.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2만 명 가량 사살 및 포로에서 대다수 확인 사살

.


전투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있었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점령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5월 18일에는 중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당시 장도영 휘하 6사단 중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에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 후 2연대(1, 2, 3대대 합류)는 전투에 임하며 후퇴하는게 맞지만 후퇴하지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해 했다. 이 때 중공군은 착각을 했는 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가 주력부대로 알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그대로 착각하여 중국 제 63군은 187,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인 189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하기까지 이른다. 즉,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 1개연대에게 총 공격을 감행한것이다. 하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고립된 2연대는 미군의 항공폭격에 의지하여 힘겹게 방어하고있었다.

변수

변수가 한가지 있었다.바로 중공군이 2연대를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6사단의 7, 19연대가 후방을 기습한것이다. 즉,포위하여 2연대를 섬멸할 계획이였던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 주력군을 몰아넣고 승리하리라 장담했던 중국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수가없었다.

이 전투의 변수는 중국군 자신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7, 19연대는 중공군이 2연대를 총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기습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었다.그리고 UN군과 국군의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국군은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추격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서둘러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공이 국군에게 있었으로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6사단은(2,7,19연대)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군은 화천호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그 결과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6사단에의해 격멸당했다.

전투 후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중국군은 3개사단 2만명의 병력이 궤멸 하였으며(간혹 용문산대첩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UN군 및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실행한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전투현리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2차 춘계 대공세로 인해 벌어진 이 전투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중국인민지원군을 궤멸시키는 대한민국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이승만(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1]

각주

  1. 이동 “호국 영령 희생정신 기려 조국 수호”《강원도민일보》2009년 05월 30일 (토)

용문산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은 중공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어 휴전 협정을 제의 한게 된다.

바깥 고리


  • 파일:attachment/d0087759_4e7ebfa5b4561.jpg
    ↑ 용문산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한 파로호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 포로들이 후송을 기다리는 모습.

  • 1. 개요

    6.25 전쟁 당시 1951년 용문산과 화천 저수지 일대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중국 인민해방군 육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2. 전투 이전 상황

    1951년 5월(당시 UN군은 '썬더볼트 작전' 개시하던 시기), 동부전선의 국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공세를 펼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으로의 증원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이렇게 중부전선에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를 직면하게 된 부대는 장도영 장군의 육군 6사단으로,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육군을 저지하면서 유명세를 떨친 사단이었으나, 불과 한 달 전 펼쳐진 중공군의 4월 공세 당시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서 사단 전체가 줄행랑을 치면서 패전했고, 이 때문에 미군 수뇌부부터 일개 병사들에게까지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 상태였다. 당시 미 육군 장병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이 지나가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며 침을 뱉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

    하지만 화천군 사창리에서 중공군의 진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망친 덕에(…) 장비는 왕창 잃었지만 병력 소모가 적어 빠른 재편성이 가능했다. 그렇게 재편성된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서 사창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중공군의 공격을 직면하게 되었다.

    3. 전투경과

    전투 직전 6사단의 주 방어선은 용문산이었으나, 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북한강을 넘어 오는 중공군의 공격을 염려해서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앞에 있는 북한강 아래쪽으로 제2보병연대를 올려보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전초병력이라기엔 너무 많은 전체 사단 병력의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을 주 방어선보다 훨씬 위로 올려보낸 장도영 장군의 병력 배치는 방어의 정석과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나, 하여간 장도영 장군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8일.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주방어선과는 외따로 올라와 있던 2연대는 도강하는 중공군에게 공격을 퍼붓고 427고지로 후퇴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방에서 경계임무를 완수한 후 주 저항선 뒤로 빠져야 할 2연대의 1, 2대대가 오히려 주 저항선 전방의 427고지와 나산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미합중국 공군의 항공 지원과 인근의 7개 육군 포병대대(한국 육군 2개, 미 육군 5개 대대)의 무지막지한 지원 포격이 중공군을 두드렸고, "이렇게 방어가 단단한 거 보니 한국군의 주 방어선이 여기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중공군은 예비 사단까지 꺼내들어 총 3개 사단으로 올인러쉬에 나섰다.

    그러나 2연대는 믿을 수 없는 저력으로 그 무지막지한 공세를 버텨냈다. 더욱 강화된 방어진지(427고지, 이곳이 용문산 전투 전역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전장이었다고 한다.)로 질서있게 물러서며 새로 적을 맞이하는 2연대의 효과적인 방어와, 전투 시작부터 쉬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쏟아진 포병과 항공 지원의 타격으로 결국 중공군의 공세는 둔화되고 말았다.

    그 타이밍에 용문산의 주 방어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6사단의 나머지 2개 연대인 제7보병연대와 제19보병연대가 총 반격을 개시하였다. 며칠 동안 2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공군은 갑자기 뒷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자 이것을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병력의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오판하고 말았다. 급기야 중공군은 전열이 완전히 와해되며 3개 사단 병력이 2개 연대 병력에게 패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대가 한 번 전의를 상실하거나 지휘체계가 붕괴되면 3개 사단이 아니라 30개 사단이라도 그냥 인간세트(…)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수대전,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현리전투이다.

    승세를 탄 6사단은 패주하는 중공군에 대해 맹렬한 추격을 개시했다. 다시 북쪽으로 도하(북한강)할 여유도 없었던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은 북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장장 70~80여 km를 쫓기며 엄청난 손실을 입다가 결국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에 이르러 궤멸되고 만다. 미처 도강을 하지 못한 수많은 병력이 우왕좌왕하다 사살되거나 익사한 것. 그 넓은 호수가 중공군의 시신으로 뒤덮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4. 결과

    이 전투에서 6사단은 사살 확인만 17,000명 이상, 포로 2,000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단일 전투로서 이만한 전과는 한국전쟁 통틀어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대승이다.[1]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한국 육군의 대참사인 현리 전투로 인해 땅에 떨어진 육군의 명예를 어느 정도 만회한 전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에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곳)라는 명칭을 부여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을 정도이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지휘관의 냉철한 판단력, 부대의 기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비대의 중요성을 정말 잘 보여 주는 전투이다. 중공군으로서는 남아있는 예비대를 너무 일찍 투입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반드시 확보해두어야 하는 것이 예비대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예비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대사건의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괜히 남긴 게 아니다.

    5. 이야기거리

    • 2연대를 주 방어선 훨씬 앞쪽에 배치한 장도영 장군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의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쟁사가들의 의견이 다소 갈린다. 그러나 최전선보다 약간 후방인 427고지에 강화진지를 미리 구축해 둔 점, 포위기동이 특기인 중공군을 상대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후퇴 후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미 육군 고문관의 2연대 완전철수 권고를 무시하고 04시까지 427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등으로 미루어보면 처음부터 방어 후 반격을 할 계획을 짜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덕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1개 군단의 총공세를 1개 연대로 방어해내고, 직후 반격에 성공하여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을 와해시킨 장도영 장군은 전쟁사상 희대의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해낸 장군이 되었다.

    • 2연대의 방어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무용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중대장이 사라져서 중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정훈병까지 나서서 장병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버텨 낸 에피소드도 있다.

    • 당시 쫓겨가던 중공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노무자에게 항복하거나 마을 노인에게 잡혀오는 중공군 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등에 의하면 전투 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기게 싸우는 최정예 전투원이면서도, 일단 총을 놓고 나면 누구보다도 온순해지는 것이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 인근 주민들은 파로호의 물고기 사람 시체를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이유로 종전 후 10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하도 시체가 많아서 식수원이 오염되어 외부에서 급수를 해야 했다고 한다.

    • 이 전투 후에는 이전의 추태로 부대 외부 사람들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놀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비웃음을 받아도 흑역사를 가지고 놀려먹는 수준이였다고 한다. 그야 주방어선보다 위로 올라가더니 3개 사단을 떡실신시키고 추격해 갈아버린 용자들인지라(...).


    6. 참고 자료

    전쟁기념관-전투자료 동영상, <용문산 전투> : 단순한 홍보 영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자료화면과 함께 전투의 경과를 깔끔하게 브리핑하고 있는 영상이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보도록 하자.


    [1] 그런데 청산리 대첩처럼 중구난방이 심해서 과연 진실인지는 알기 힘들며(죽인 숫자도 마찬가지지만 포로 숫자도 3만 8000명에서 8,000명 혹은 2,000명까지 다양해서 신뢰성이 좀 떨어진다.) 적들이 도망치다가 대부분 알아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료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살 확인을 한 적은 없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http://news.joins.com/article/417924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01515,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5/2015100502997.html 외국에서도 불확실성 때문에 국내에 알려진 전과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냥 디펜스의 모범적인 사례로 생각한다.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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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 제6사단이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용문산일대에서 방어하여 큰 타격을 입힌 전투.
    용문산 전투전적비

    내용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공세 시 사창리에서 시련을 겪은 후 용문산(1157고지) 일대에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5월 공세를 개시하여 혈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제19병단 제63군 3개 사단(제187, 제188, 제189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인 국군 제6사단 지역을 공격해 왔다.


  • 국군 제6사단은 당시 북한강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기도가 감지되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가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두능산에서 주저항선으로 각각 철수함으로써 제2연대만이 청평호 남쪽에 남게 되었다.

    연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창리 전투의 결과로 연대장과 일부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연대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하였다. 연대의 정찰대는 17일 적의 예상도하 지점을 탐색하던 중 이미 도강하여 방하리 계곡에 집결중인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하였으나, 일몰이 되어 대규모의 적이 북한강의 도처에서 도하를 기도함으로써 자대로 복귀하였다.

    1951년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인 제2연대를 향해 몇 차례 도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제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지원받아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하였다. 중공군은 이곳 전초진지를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부터 제187, 제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하여 돌파를 기도하였다.


  • 중공군은 우전방 공격에 이어 이번에는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하여 좌전방 제2대대의 울업산을 집중 공격하였다. 제2연대는 나산 일대 전초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틀간의 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또 식량과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2연대의 전황을 간파한 중공군은 19일 야간에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백병전으로 점철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연대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강력한 정신력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 제6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던 제2연대와 연결한 후 즉시 반격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20일 07:00부터 18:00까지의 전과만도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과 소화기 312정에 이르렀다. 반면 이날 국군 제6사단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단은 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다. 이로써 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불명예를 씻고 설욕할 수 있었으며, 용문산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참고문헌

    • 『6·25전쟁사』제9권(군사편찬연구소, 2012)
    •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6)
    • 『현리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8)
    • 『용문산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3)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보-책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