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받아 사창리일대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전투.
내용
중공군은 1951년 4월 공세의 조공부대인 중공군 제9병단으로 하여금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한국군 제6사단은 22일 사단 전방에 대규모의 중공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전방연대에 공격을 즉시 중지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중공군 제9병단은 1951년 4월 22일 17:00경 4월 공세 계획에 의거 국군 제6사단 방어진지 정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의 전방연대들은 사단장의 진지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에다, 후방지역에서 중공군의 출현이 확인되자 지난 해 북한지역 온정리 전투에서 경험한 “중공군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때 사단은 이미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음은 물론 통신마저 두절되어 혼란이 가중되고 부대의 통제도 불가능하였다.
좌측의 제19연대는 적중에 고립되었고 우측의 제2연대와 예비부대인 제7연대는 차량과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분산 철수하였다. 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은 제7연대 후방의 포병부대들을 공격하였고, 이들은 유일한 철수로인 사창리∼춘천 도로를 따라 철수하였다.
국군 제6사단이 주저항선에서 철수하자 이 일대에서 사단을 화력 지원하던 미 포병부대들도 동쪽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서둘고 있었으나, 사창리에서 철수한 부대와 합류되면서 보병과 포병부대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자 미 포병부대들도 다수의 화기를 유기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국군 제6사단은 철수 중 통신장비를 유기하였기 때문에 중공군의 추격이 중지된 자정 무렵에도 지휘통제가 곤란함은 물론 전방연대의 상황 파악이 불가능하였고, 다음날(23일) 새벽에 겨우 2,500여 명 정도가 이틀 전 공격을 준비하였던 석룡산∼화악산 후방에 집결할 수 있었다.
날이 밝아 중공군의 공격이 둔화되자, 미 제9군단장은 한국군 제6사단에 신속히 부대를 재편성하여 석룡산∼화악산의 캔사스선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했다. 사단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배치하였으나 어둠이 깔리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방어진지를 고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사기가 저하된 사단 장병들이 적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득이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로케트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6·25전쟁사』제9권(군사편찬연구소, 2012)
-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6)
- 『현리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8)
- 『청성부대사』(국군제6사단, 1981)
[출처:정보- / 수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창리 패전]
젊었던 국군 지휘관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국군 지휘관 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전선 지휘관은 대개 30대 초반 또는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항일 독립 전선에 섰지만 체계적인 군사교육이나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광복군 출신,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나 만주군 장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역시 대규모 전투를 이끌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장병들 또한 차분하게 군사교육을 이수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짧은 시간에 속성(速成)으로 소총 다루기 등을 배운 뒤 전선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전선의 상황은 지휘관에 의해 좋고 나쁨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전투에 나서서 자신의 장병들을 잘 보호하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일은 지휘관의 자질과 판단에 거의 전부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전쟁에 나선 한국군 젊은 지휘관들은 싸우면서 바로 배우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 그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다. 적을 맞아 싸우면서 미군이나 유엔군 등 우리보다 훨씬 나은 군대 지휘관으로부터 싸움의 요령을 반드시 체득해야 했다. 그래야 지휘관도 살고 부대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이 걸린 절실한 과제라고 해도 좋았다. 6사단장은 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지휘 상의 커다란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일성 군대의 기습 남침 뒤 늘 반복적으로 벌이던 국군의 패배를 다시 그대로 재연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역시 중공군이었고, 한 번 그들에게 등을 보인 뒤 무기력하게 물러서면서 아군의 전체 전선에 커다란 공백을 내고 말았다.
6사단은 김화 지역을 향해 진군하던 4월 22일 오후 중공군이 전면 어딘가에 대규모로 모여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군의 항공 관측에 의한 정보였다. 이때부터 사단은 고도의 경계상태에 들어갔다. 진군을 멈추고 현재 도착한 지역에서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6사단의 오른쪽에는 미 1해병사단, 왼쪽에는 미 24사단이 있었다. 사단장은 우선 이들 아군 부대와의 연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중공군 공격에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전투지경선의 방어를 보강하려는 의도였다. 사단장이 지시를 내린 시점은 오후 4시 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바로 1시간 뒤 공격을 벌여왔다.
사단 좌전방에는 19연대, 우전방에는 2연대가 있었다. 사단장은 중공군이 많이 출현하던 2연대 뒤에 사단의 예비였던 7연대를 배치했다. 사단에 배속한 국군 제27 포병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는 사창리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 배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단지 중공군의 파상적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병력 수가 우선 부족했다. 아울러 중요 거점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를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부대 사이의 공백이 커질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울러 사단의 예비로 있던 7연대를 전방의 2연대 후방으로 배치하는 바람에 사단의 전투 종심(縱深)이 약해질 수 있었다.
-
- 중공군의 출정식 장면이다.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은 신규 병력을 만주에 대기시킨 뒤 필요에 따라 대규모 장병을 동원했다.
중공군이 노린 먹잇감
그러나 나아갈 때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이 물러설 때다. 부대가 만약의 상황에 빠져 후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6사단의 퇴로는 문제로 떠오를 수 있었다. 산이 중첩해 계곡이 많은 지형이었다. 춘천에서 사창리에 이르는 도로는 더구나 하나에 불과했다. 조금 여유가 있는 길이기도 했으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일부 구간은 매우 좁아지면서 굴곡이 심했다. 따라서 그런 후퇴로를 두고 그나마 질서정연한 철수작전을 수행한다면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적의 공세 앞에서 체계적으로 후퇴를 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그런 여러 요소를 모두 따질 수는 없었던 듯하다. 6사단은 결국 미 8군의 전체 작전 명령에 따라 부지런히 북상했다가 “대규모의 중공군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방어태세를 취했던 것이다. 나중의 기록에 의해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정확하게 한국군 6사단을 먼저 노리고 다가선 상태였다. 중공군의 의도는 분명했다. 가장 허약한 곳을 노려 구멍을 낸 뒤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주공(主攻)을 담당했던 부대는 19병단이었다. 조공(助攻)을 맡은 부대는 9병단이었다. 19병단이 서부전선의 공세를 이끄는 사이 9병단은 화천과 가평을 잇는 곳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이곳에서 돌파구를 마련해 아군의 전선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9병단의 공격은 여러 곳을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 1해병사단과 미 24사단이 버티고 있던 곳은 아무래도 힘에 겨웠다. 우선 미 1해병사단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북한강을 도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아울러 미군이 지닌 화력과 전투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있던 한국군 6사단이 가장 뚫기 쉽다고 봤던 것이다. 참전 이래 줄곧 국군을 먼저 노리고 덤벼들던 중공군의 공격 방식 그대로였다. 이 무렵의 중공군은 나름대로 포병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22일 오후 5시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강력한 포격을 먼저 실시했다. 9병단 예하 제20군 소속 3개 사단이 국군 6사단에 몰려들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을 막아내기에는 6사단의 힘이 크게 달렸다.
중공군은 6사단의 틈을 찾아 뚫는 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사단의 퇴로가 막혔다. 횡성의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이 당한 경우와 같았다. 바로 통신선이 먼저 끊기고 말았다. 사단의 각급 부대에 대한 통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대 사이의 소통이 멈추고, 사단본부의 일관된 지휘마저 불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일찌감치 중공군의 포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과 뒤에 모두 중공군만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우전방의 2연대와 그 뒤를 받치기 위해 진출해 있던 예비 7연대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적중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차량과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후퇴에 나섰다.
-
- 6.25전쟁에 참전 중인 중공군이 수심 깊지 않은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서고 있다.
두려움 속 급격한 패퇴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였다. 6사단이 급격히 무너졌던 배경에 관한 얘기다. 아무래도 6사단은 1950년 10월 말 북진 당시 압록강 앞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맛봤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6사단으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서전(緖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초산 일대에서 벌인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아주 커다란 패배를 당한 6사단으로서는 좀체 당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창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렀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졸지에 중공군의 대병력을 만나 앞과 뒤로 포위를 당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중공군이라는 바다에 갇힌 섬이었다. 고립은 점점 더 깊어졌다.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이 뚫린 구멍을 타고 계속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두려움에 젖어 모든 장비와 화력을 버린 채 방향을 잡지도 못하고서 마구 도망쳤다. 두 연대의 장병은 무질서하게 살길을 찾아 나섰다. 좌우로 인접한 아군 부대로 도망치거나 일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방으로 달아났다. 6사단의 종심이 깊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 중공군은 옆으로 길게 거점을 형성한 뒤 늘어섰던 국군의 저지선을 뚫고 금세 후방으로 내달렸다. 이들은 곧장 7연대의 후방에 있던 국군 제27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를 공격했다. 먼 곳으로 쏘는 화포(火砲)를 지닌 포병부대는 적의 보병 공격에는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성난 물길에 밀린 모래처럼 마구 무너졌다.
문제는 역시 퇴로(退路)였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6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할 때 갈 수 있던 길은 하나였다. 사창리로부터 춘천을 잇는 국도였다. 포병 병력과 후방의 인원들은 곧장 이 도로로 몰려들었다. 길을 따라 먼저 신포리로 철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방어선 자체가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사단 전체가 무너지는 낌새를 보이자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던 미군 포병 병력도 동쪽의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갈팡질팡 하면서 이리저리 깨지고 뜯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이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당시의 상황이 꼭 그랬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도로는 곧 철수하는 병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장비를 지니고 갈 수 없던 포병대대가 일부 장비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겼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젊었던 국군 지휘관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국군 지휘관 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전선 지휘관은 대개 30대 초반 또는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항일 독립 전선에 섰지만 체계적인 군사교육이나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광복군 출신,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나 만주군 장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역시 대규모 전투를 이끌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장병들 또한 차분하게 군사교육을 이수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짧은 시간에 속성(速成)으로 소총 다루기 등을 배운 뒤 전선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전선의 상황은 지휘관에 의해 좋고 나쁨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전투에 나서서 자신의 장병들을 잘 보호하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일은 지휘관의 자질과 판단에 거의 전부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전쟁에 나선 한국군 젊은 지휘관들은 싸우면서 바로 배우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 그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다. 적을 맞아 싸우면서 미군이나 유엔군 등 우리보다 훨씬 나은 군대 지휘관으로부터 싸움의 요령을 반드시 체득해야 했다. 그래야 지휘관도 살고 부대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이 걸린 절실한 과제라고 해도 좋았다. 6사단장은 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지휘 상의 커다란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김일성 군대의 기습 남침 뒤 늘 반복적으로 벌이던 국군의 패배를 다시 그대로 재연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역시 중공군이었고, 한 번 그들에게 등을 보인 뒤 무기력하게 물러서면서 아군의 전체 전선에 커다란 공백을 내고 말았다.
6사단은 김화 지역을 향해 진군하던 4월 22일 오후 중공군이 전면 어딘가에 대규모로 모여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군의 항공 관측에 의한 정보였다. 이때부터 사단은 고도의 경계상태에 들어갔다. 진군을 멈추고 현재 도착한 지역에서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6사단의 오른쪽에는 미 1해병사단, 왼쪽에는 미 24사단이 있었다. 사단장은 우선 이들 아군 부대와의 연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중공군 공격에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전투지경선의 방어를 보강하려는 의도였다. 사단장이 지시를 내린 시점은 오후 4시 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바로 1시간 뒤 공격을 벌여왔다.
사단 좌전방에는 19연대, 우전방에는 2연대가 있었다. 사단장은 중공군이 많이 출현하던 2연대 뒤에 사단의 예비였던 7연대를 배치했다. 사단에 배속한 국군 제27 포병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는 사창리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 배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단지 중공군의 파상적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병력 수가 우선 부족했다. 아울러 중요 거점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를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부대 사이의 공백이 커질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울러 사단의 예비로 있던 7연대를 전방의 2연대 후방으로 배치하는 바람에 사단의 전투 종심(縱深)이 약해질 수 있었다.
- 중공군의 출정식 장면이다.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은 신규 병력을 만주에 대기시킨 뒤 필요에 따라 대규모 장병을 동원했다.
그러나 나아갈 때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이 물러설 때다. 부대가 만약의 상황에 빠져 후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6사단의 퇴로는 문제로 떠오를 수 있었다. 산이 중첩해 계곡이 많은 지형이었다. 춘천에서 사창리에 이르는 도로는 더구나 하나에 불과했다. 조금 여유가 있는 길이기도 했으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일부 구간은 매우 좁아지면서 굴곡이 심했다. 따라서 그런 후퇴로를 두고 그나마 질서정연한 철수작전을 수행한다면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적의 공세 앞에서 체계적으로 후퇴를 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그런 여러 요소를 모두 따질 수는 없었던 듯하다. 6사단은 결국 미 8군의 전체 작전 명령에 따라 부지런히 북상했다가 “대규모의 중공군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방어태세를 취했던 것이다. 나중의 기록에 의해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정확하게 한국군 6사단을 먼저 노리고 다가선 상태였다. 중공군의 의도는 분명했다. 가장 허약한 곳을 노려 구멍을 낸 뒤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주공(主攻)을 담당했던 부대는 19병단이었다. 조공(助攻)을 맡은 부대는 9병단이었다. 19병단이 서부전선의 공세를 이끄는 사이 9병단은 화천과 가평을 잇는 곳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이곳에서 돌파구를 마련해 아군의 전선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중공군은 6사단의 틈을 찾아 뚫는 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사단의 퇴로가 막혔다. 횡성의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이 당한 경우와 같았다. 바로 통신선이 먼저 끊기고 말았다. 사단의 각급 부대에 대한 통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대 사이의 소통이 멈추고, 사단본부의 일관된 지휘마저 불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일찌감치 중공군의 포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과 뒤에 모두 중공군만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우전방의 2연대와 그 뒤를 받치기 위해 진출해 있던 예비 7연대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적중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차량과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후퇴에 나섰다.
- 6.25전쟁에 참전 중인 중공군이 수심 깊지 않은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서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였다. 6사단이 급격히 무너졌던 배경에 관한 얘기다. 아무래도 6사단은 1950년 10월 말 북진 당시 압록강 앞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맛봤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6사단으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서전(緖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초산 일대에서 벌인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아주 커다란 패배를 당한 6사단으로서는 좀체 당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창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렀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졸지에 중공군의 대병력을 만나 앞과 뒤로 포위를 당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중공군이라는 바다에 갇힌 섬이었다. 고립은 점점 더 깊어졌다.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이 뚫린 구멍을 타고 계속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두려움에 젖어 모든 장비와 화력을 버린 채 방향을 잡지도 못하고서 마구 도망쳤다. 두 연대의 장병은 무질서하게 살길을 찾아 나섰다. 좌우로 인접한 아군 부대로 도망치거나 일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방으로 달아났다. 6사단의 종심이 깊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 중공군은 옆으로 길게 거점을 형성한 뒤 늘어섰던 국군의 저지선을 뚫고 금세 후방으로 내달렸다. 이들은 곧장 7연대의 후방에 있던 국군 제27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를 공격했다. 먼 곳으로 쏘는 화포(火砲)를 지닌 포병부대는 적의 보병 공격에는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성난 물길에 밀린 모래처럼 마구 무너졌다.
문제는 역시 퇴로(退路)였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6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할 때 갈 수 있던 길은 하나였다. 사창리로부터 춘천을 잇는 국도였다. 포병 병력과 후방의 인원들은 곧장 이 도로로 몰려들었다. 길을 따라 먼저 신포리로 철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방어선 자체가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사단 전체가 무너지는 낌새를 보이자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던 미군 포병 병력도 동쪽의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갈팡질팡 하면서 이리저리 깨지고 뜯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이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당시의 상황이 꼭 그랬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도로는 곧 철수하는 병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장비를 지니고 갈 수 없던 포병대대가 일부 장비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겼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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