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砥平里戰鬪 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지평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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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일부 | |||||||
지평리 전투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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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미국 프랑스 |
중국 | ||||||
지휘관 | |||||||
폴 L. 프리먼 주니어 | 펑더화이 | ||||||
병력 | |||||||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 미국 37포병대대 82 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 5,600여명 |
중국인민해방군 39군 50,000여 명 | ||||||
피해 규모 | |||||||
사망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 |
5천여명 사상, 79명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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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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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볼트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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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목차
배경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1]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은 2월 11일에 2월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국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한국군 및 미국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고, 2월 초 미국 9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국 23 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진지(肩部陣地)[2]로 남게 되었다. 지평리에 남게 된 23연대 전투단(23RCT)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으로, 중국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그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3]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국 37포병대대, 미국 82방공포대대 B포대, 미국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국 10군단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23연대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 서쪽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전투 경과
지평리
2월 13일 저녁, 중국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 날 전투 중에 폴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4]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국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군력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했다. 이날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직접 헬기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월 14일 저녁 7시,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연대장 마셜 G. 크롬베즈 대령, Marcel G. Crombez)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크롬베즈 구조대
2월 14일,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병연대는 기본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로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전차대는 6전차대대 D중대와 70 전차대대 A중대로 편성되었는데, 6전차대대 D중대는 본래 1기병사단 소속이 아니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중대여서 5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6대대는 M-46 패튼을 장비했으며, 70전차대대는 M4A3를 장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 5기병연대는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 복구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진형을 갖추었다.[5]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두 대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두 대대의 임무는 도로 양측면의 산악지대를 장악하여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반격은 매우 거셌고, 2개 포병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5]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기갑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하여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5] 이 무렵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어 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3]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로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불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함께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진격하기로 했다. 구급차 및 보급품 트럭은 도로 사정이 괜찮아지면 그때 불러들이기로 했다. 공격제대는 M-46을 갖춘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 M4A3를 장비한 70전차대대 A중대가 뒤따랐다.[5]
2월 15일 15시, 공격대는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라탔으며, 160명의 L중대원이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15시 45분, 부대는 공격에 나섰다. 전차 간 간격은 13m(15야드)를 유지했다.
결과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 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국군의 주요 패배 원인은 다음과 같다.[6]
- 화력의 열세
-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한 지휘 체계 부재
- 또한 각 연대는 연대 자체 계획에 따라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함
의의
울프하운드 작전의 경우처럼,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고무되었으며, 중국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가 되었다. 이후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현재
본 전투를 기념한 전적비가 지평역 옆과 지평양조장 곳에 각각 세워져 있다.
각주
- 이동 ↑ 중국군은 "손가락 10개를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하나를 잘라버리는" 포위 섬멸전을 즐겨 사용했다. 한반도의 산악 지형은 이런 중국군의 전술에 적합했다.
- 이동 ↑ 견부진지란, 전후좌우 모두를 통제할 수 있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 또는 차기 작전을 유리하게 하도록 하는 진지를 의미한다.
- ↑ 이동: 가 나 지평리 전투 이야기
- 이동 ↑ 결전부대 지평리 전투 소개도
- ↑ 이동: 가 나 다 라 미국 육군 전사자료집 중 크롬베즈 대령 관련 문서
- 이동 ↑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중공군 4차 공세와 지평리 전투”. 《국방저널》 (2003년 2월 호).
같이 보기
바깥 고리
- 1951년 2월 13일 ~ 2월 14일까지 지평리 지도 - 중앙부의 'FR Bn'이라고 표시된 곳이 지평역이다.
-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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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프랑스 대대가 지평리 일대에서 1951년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방어전투.
내용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1951년 2월초 한강진출 작전을 진행 중인 미 제9군단과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쌍터널을 정찰한 후 지평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2월 11일 밤에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전선이 원주까지 내려오자, 미 제10군단의 최북단 돌출부가 되었고, 이어 중공군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이 양평부근의 한강계곡으로 침투하여 유엔군 주력을 포위할 기도라고 판단하여 지평리 고수를 명령하였다. 동시에 미 제9군단장에게 한강 이남의 교두보에서 적과 교전이 없는 국군 제6사단과 영 제27여단을 여주지역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의 통제하에 공간지역을 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횡성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공산군은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이 남쪽으로 철수할 것이며 또한 원주에 집결한 유엔군도 계속 철수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전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중공군 제39, 40, 42군의 총 8개 연대로써 지평리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
지평리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으로서는 이 지역을 장악하면 유엔군 방어부대들을 양분할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의 후방을 위협할 수 있었고, 유엔군으로서는 사통팔달인 지평리지역을 확보하여 좌우전선과의 연계를 용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중공군 2월 공세의 작전기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지평리 일대에 배치된 미 23연대전투단은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연대는 1950년 2월 13일 낮 동안 포병사격과 항공폭격으로 진지로 접근하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22:00부터 중공군이 자동화기와 박격포, 포병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경적, 호각, 나팔 등을 불면서 포위망을 압축해 오자 상당히 고전하였다. 진지 전면에서는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수류탄전과 육박전이 전개되었으나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병의 조명지원에 힘입어 적을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전선 중 돌출된 지평리와 횡성을 공격목표로 선정하고 먼저 4배 이상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지평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근접항공지원의 엄호 하에 펼친 축차적인 지연작전과 지평리 고립방어 전투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게 되었다.
밤이 되자 백병전은 더욱 치열해져서 곳에 따라서는 수백 명에 이르는 중공군의 시체가 겹겹이 쌓였고 23연대장은 중상을 입고도 후송을 마다하고 병사들 곁에 머물러 싸움을 독려했다. 이 날 밤 중공군은 마침내 유엔군 진지의 한 모퉁이를 점령했으나 15일 새벽 날이 새자 유엔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사격을 견디지 못해 물러났다. 이날 지평리 남쪽의 후방에 있던 미 제1기병사단에서 나온 크롬베즈(Crombez) 특공대는 지평리로 들어가는 주보급로를 다시 열고 저녁 무렵엔 23연대의 원진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풀었다. 중공군은 공격개시 1주일 만에 공세작전을 종료하고 북으로 철수하였다.
지평리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써 이제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 확신함으로써 강력한 공격작전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 『중공군의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군사편찬연구소, 2011)
-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6)
- 『임진강전투』(전사편찬연구소, 1991)
- 『한국전사』(합동참모본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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