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과 사환 월급이 같은 학교, '빨갱이'로 몰려 죽은 설립자
김해 진영의 '나눔의 철학' 교육가 강성갑.. 추모 동상만 덩그러니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1930년대 중반 강성갑-오중은 부부(출처: 홍성표) |
ⓒ 박만순 |
"조카, 느그 아버지 시신이 발견됐데이."
"정말입니꺼?"
큰아버지 강갑이의 연락을 받은 강성갑의 아들 강흥철은 부리나케 시신이 발견된 현장으로 내달렸다. 시신은 학살 현장인 낙동강변 수산다리에서 2km 떨어진 대산면(현재 경남 창원시 대산면) 모산리 낙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어머니 오중은과 현장에 도착한 강홍철은 기겁을 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퉁퉁 부었고 배는 남산만큼 나와 터지기 직전이었다. 오중은은 남편의 모습을 보자마자 실신했다.
이미 모산리 낙동강변에는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강성갑의 시신이 나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강흥철은 큰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관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반닫이에 시신을 앉히듯 모시고 흰 천을 싸서 묶었다.
반닫이는 나무를 짜서 물건을 넣어두는 장방형의 단층 궤로 앞널의 위쪽 절반을 상하로 여닫는다. 그래서 시신을 관에 모시듯이 눕힐 수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한여름에 총살을 당해 총 독이 올랐는데 이후 낙동강 하류로 떠내려 오면서 강성갑의 시신이 퉁퉁 부었기에 관에도 모실 수가 없었다.
모산리 낙동강변에서 운구가 출발할 때는 이미 수천여 명이 따라나섰다. 저명한 목사이자 교육자인 강성갑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김해시 진영읍 전체에 퍼졌다. 주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흰 옷을 입고 모여들었다. 운구는 강성갑이 세운 한얼중학교 상급생들이 멨다.
"에헤~ 에헤~ 어허 넘차 어허~/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임을 두고서 나는 간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 주오/ 북망산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가 북망이라."
선두에 선 요령잡이의 상여소리에 반닫이를 멘 상두꾼들이 후렴구를 붙였다. 운구를 멘 한얼중학교 학생들과 뒤따르는 주민들의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운구는 강성갑의 집을 거쳐 그가 학살 당한 수산다리 밑에 들렀다가 한얼중학교로 갔다. 강성갑의 장례식은 그곳에서 치러졌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여기 묻어 달라'던 유언에 따라 강성갑은 한얼중학교 교정에 안장됐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9일경이다.
'빨갱이'로 모함을 받아 죽었으면서도 한국전쟁기 한복판에 거창하게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강성갑은 어떤 인물일까?
농촌개혁의 꿈을 꾼 강성갑
191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강성갑은 13세에 의령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학을 공부했다. 이후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접하고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김해군 장유금융조합에 취직했다. 조선인을 위한 직장이 변변치 않았던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은 선망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금융조합은 일제의 농민수탈 첨병 역할을 했다.
강성갑은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조선 농촌과 농민의 참상을 목격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1930년대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농사개량', '부업장려', '협동조합 설립', '관련서적 출판' 등 체제내적인 개량주의 운동이었지만, 문맹퇴치와 농민계몽, 사회개혁에 관심을 증대시킨 것만은 분명하다.(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2020, 선인)
장유금융조합을 사직한 강성갑은 1937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41년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에 진학했다. 개인의 영달이 아닌 농촌 사회 개혁으로 나라와 농민을 구제하는 기독교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강성갑은 연희전문과 일본 유학 시절에 1년 후배인 시인 윤동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연희전문 시절 학업성적도 우수했다. 훗날 강성갑이 학살되자 그의 스승 원한경은 "연희가 낳은 가장 훌륭한 졸업생이 죽었다"고 탄식했다.
1943년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강성갑은 귀국해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주장하며 조선인의 혼을 말살하려 애쓰던 일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해방 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강성갑에게 김해 진영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목사님, 진영으로 오셔서 저희 교회 시무목사로 부임하여 주십시오"라는 간청이었다. 1946년 초의 일이다.
이에 강성갑은 조건을 내걸었다. "제가 진영교회에서 농촌운동을 해도 좋습니까?" 손님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단순히 목회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진영으로 간 것이다. 강성갑의 머릿속은 농민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로 꽉 차 있었다.
강성갑은 진영으로 가기 전 1947년 8월에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당시 그는 진영교회 담임목사와 부산대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교수직을 유지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대학 교육을 할 사람은 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지만 농촌 사회 개혁사업을 할 사람은 많지 않으니 진영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강성갑은 답했다.
"나에게는 빨갱이고, 노랭이고가 없다"
▲ 한얼중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 앞줄 좌측에서 5번째가 강성갑(사진 제공: 홍성표) |
강성갑이 진영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복음중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야간학교를 연 것이다. 그는 개교 후 가가호호 방문해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더 배우고 싶은 사람은 연령의 적고 많음을 떠나 노트와 연필만 가져오면 무료로 가르쳐 줄 터이니 나오시오"라며 입학을 권유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진영에서 강성갑의 존재는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흙벽돌 교사를 짓는 데에도 교사와 학생이 따로 없었다.
강성갑은 정식 중학교 인가를 시도해 '한얼중학교'를 설립한다. 당시 한얼중학교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교실이라고는 곡물창고 두 채를 개조한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는 배움을 원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가르쳐야 한다는 '나눔의 철학'이 있었다.
그는 학생과 교사 들을 모두 '동지'로 여겼다. 강성갑은 학교 이름, 교육 목적, 건축 등을 일일이 학생들과 의논했다. "여러분과 나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아니고 뜻과 함을 합쳐 이 나라를 바로 세워나갈 동지입니다"라는 말이 그의 교육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얼중학교'의 '한얼'은 순 우리말로 '민족정신 같이 하나로 뭉친 정신'이라는 뜻이다. 교사 채용할 때도 전력을 따지지 않았다.
"진영읍 기관장회의에 다녀오신 후에 우리 3학년 학생들에게 하신 말씀이 "유지회의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왜 교장 선생님은 좌익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을 학교 선생으로 채용하느냐 라고 하기에, '나에게는 빨갱이고, 노랭이고가 없다. 마음 고치고 예수 믿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 나와 손잡고 일하면 누구든지 나의 동지로 생각한다'고 했다고 전하셨습니다(심사수 증언)".
강성갑기념사업회 심용주(75) 회장은 "강성갑 선생은 교장과 교사 심지어 학교 소사(사환) 월급을 똑같이 책정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이는 후일 강성갑이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몰리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강성갑은 배움을 원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무료로 가르쳤고, 교사와 교직원, 학생이 동등한 자격으로 교육과 학교운영에 참여하고, '나눔과 공동체의 교육철학'에 동의하는 교사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채용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눔과 공동체의 철학'이었다.
부통령이 참여한 추모동상 제막식
▲ 진영여중에 세워져 있는 강성갑 동상 |
ⓒ 박만순 |
"하나 둘 셋"하는 소리와 함께 동상에 씌워진 헝겊 천이 벗겨졌다. 강성갑 추모 동상 제막식에는 함태영 부통령과 이상룡 경남도지사가 참석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한 피해자의 동상 제막식에 현직 부통령과 도지사가 참여한 것이다.
1954년 5월 27일 한얼중학교에서 열린 제막식은 성대했다. 추모 동상은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했으며, 동상의 탑신 아래에는 강성갑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빨갱이'로 몰려 불법 학살을 당한 강성갑은 가해자 중 한 명인 김병희 진영지서장이 사형되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또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해자의 추모동상이 세워지는 유일무이한 사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후 강성갑은 진영 지역 사회와 후세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를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 사이에서도 '건널 수 없는 강'만큼 상반된 평가가 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 '빨갱이'라는 것과 '나눔과 공동체의 철학을 실천한 교육가'라는 그것이다. 반 백 년 넘게 후자보다는 전자의 평가가 우세했다. 살아남은 가해자들이 진영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주류 행세를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성갑이 다시 조명돼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학력제일주의', '개인주의', '배금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강성갑이 실현하려 했던 '공동체의 철학'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연세대 연구교수 홍성표는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민족이 남과 북, 좌·우로 갈라져 갈등과 반목의 사회를 살고 있다. 강성갑 선생의 교육정신을 올바로 되새겨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했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1954년 강성갑 추모 동상이 세워진 한얼중학교는 진영 읍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 그곳에는 진영여중이 있다. 아직도 그곳엔 강성갑 추모동상이 있지만, 진영여중 학생들과 진영 시민들은 그 존재조차 모른다.
▲ 강성갑기념사업회 심용주 회장(오른쪽)과 이종원 사무국장. |
ⓒ 박만순 |
강성갑기념사업회는 진영여중 바로 옆 진영역사공원으로 강성갑 추모동상을 이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강성갑기념사업회 심용주 회장은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사공원으로 동상을 옮기려고 지역 교육청과 지자체와 논의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또 이전 계획 중인 진영도서관 자리에 강성갑기념관을 만드는 것도 기념회 목표다.
강성갑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6.25 때 억울하게 학살 당한 사람 중 한 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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