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고대 ~ 근대 편[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저자빌 포셋 | 역자김정혜
[소감]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 성 서양사.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데 가정을 전제로 한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대로 얻은 소득은 있었다. 들인 시간 대비는? 아마 적은 편일 거다. 책 분량도 글쓴이가 여러 명인데 현대사를 따로 낸 걸 고려해도 적은 편(376쪽).
책소개:인터넷 교보문고
젊은 히틀러가 그림을 팔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세계가 바뀌었을까? 만약 타이타닉 호에 쌍안경 열쇠가 있었더라면? 나폴레옹을 퇴위시켜버린 미셸 네의 착각은? 레닌이 오래 살았더라면 스탈린을 막을 수 있었을까? 200억 명의 신앙을 바꾼 헨리 8세의 이혼 이야기는? 콜럼버스가 1마일을 헷갈린 실수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선택은 어떻게 역사를 바꿨을까? 마라톤전투를 촉발한 사소한 오해는 무엇이었을까? 굴욕의 역사를 유머스러운 필치로 집대성한 흑역사의 바이블. 인간의 부끄러운 반쪽으로 보는 역사 이야기!
저자: 빌 포셋(Bill Fawcett) 외
목차
흑역사 여행을 시작하며
흑역사 1: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오해가 불러온 참극
흑역사 2~3: 조국에 등을 돌린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의 우유부단함
흑역사 4: 왜 다리우스 황제는 25만의 군사를 두고 도망쳤을까?
흑역사 5: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알렉산드로스의 선택
흑역사 6: 원로원은 왜 독재관 카이사르를 한 달 만에 암살했을까?
흑역사 7: 로마제국 최대의 패배를 이끌어 낸 게르만 인 아르미니우스
흑역사 8: 작은 전투에 뛰어들어 죽음을 자초한 황제 율리아누스
흑역사 9: 고트 족을 적으로 만든 로마의 탐관오리들
흑역사 10: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린 해럴드 왕의 조급증
흑역사 11: 비잔틴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하룻밤의 전투
흑역사 12: 리처드 왕이 적지에 요란을 떨면서 잠입한 대가
흑역사 13: 만약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복했다면?
흑역사 14; 콜럼버스가 1마일을 헷갈린 결과
흑역사 15: 스페인과의 전쟁 호기를 날려 버린 아즈텍의 황제
흑역사 16: 200억 명의 신앙을 바꾼 헨리 8세의 이혼
흑역사 17: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린 히데요시의 패착
흑역사 18: 발트 해 정복에 실패한 광기왕 칼 12세
흑역사 19: 식민지 국민들의 감정에 불을 질러 버린 조지 3세
흑역사 20: 외교 사절단을 군대로 착각하고 궤멸한 조지 워싱턴
흑역사 21~22: 영국 해군의 무패 신화를 망쳐 버린 제독들
흑역사 23: 탈출의 순간에도 화려한 마차를 고집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흑역사 24: 의사들이 ‘과잉’ 치료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조지 워싱턴
흑역사 25: 러시아의 추운 바람에 스러진 유럽 통일의 야망
흑역사 26: 콰트레브라에서 전투에서 미셀 녜 장군이 저지른 두 가지 실수
흑역사 27: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버린 미셀 녜의 착각
흑역사 28: 남부 연합의 연방 탈퇴가 10년만 빨랐더라면…
흑역사 29: 쇠기름 때문에 인도를 잃다
흑역사 30: 세계 경제를 움직이지 못한 남부 연합의 목화 제한 정책
흑역사 31: 북군의 매클렐런, 위기에 처한 남군의 보비 리를 살려 보내다
흑역사 32: 느림보 미드 장군, 남부의 북버지니아군을 놓치다
흑역사 33: 끝내 흑인 병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남부 연합
흑역사 34: 남부를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존 부스의 링컨 암살
흑역사 35: 러시아, 황금의 땅 알래스카를 헐값에 팔아넘기다
흑역사 36: 유진 시펠린이 들여온 영국산 찌르레기가 북미 생태계를 망치다
흑역사 37: 베네딕투스의 실수가 안전유리를 만들어 내다
흑역사 37: 미국 대선의 훼방꾼들, 제3당 후보들의 역사
흑역사 39~40: 만약 타이타닉 호에 쌍안경 열쇠가 있었더라면
흑역사 41: 오지 않는 유령 군대를 기다린 독일군
흑역사 42: 61만 명의 사상자를 낸 솜 전투의 슬픈 영광
흑역사 43: 아일랜드인들을 순교자로 만든 존 맥스웰 장군의 대응
흑역사 44: 스탈린에게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레닌
흑역사 45: 아무것도 얻지 못한 미국의 러시아 침공
흑역사 46: 마피아의 전성시대를 만든 금주법
흑역사 47: 레닌이 살아 있었다면 스탈린을 막을 수 있었을까?
흑역사 48: 젊은 히틀러가 그림을 팔지 못한 대가
흑역사 49: 스탈린, 군국주의 독일의 부활을 돕다
흑역사 50: 대통령을 위협하는 권력자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책 속으로
암살 동기가 무엇이든 원로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함으로써 저들의 용기를 증명했다. 만약 그 용기를 계속 지녔더라면, 그래서 원로원의 힘을 되찾았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미래의 카이사르들을 견제할 대항 세력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군중과 강력한 장군의 힘에 압도돼 굴복할 수 있음을 몸소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힘을 파괴하며 자멸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양자로 입적되어 후계자가 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암살자들에게 복수한 후에 공화정으로 복귀하는 대신에 ‘수석 집정관’ 직책에 올랐다. 말이 수석 집정관이지 사실은 양아버지가 선출되었던 독재관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아래 수십 년간 로마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로원이 무능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행정관들을 해임할 권한이 없어지자 황제에 대한 견제 세력이 없어졌다. 또한 황제가(또는 훗날 황제 근위병들이) 지위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막아 줄 제도적 장치도 영원히 사라졌다. 그리하여 가끔은 너무나도 끔찍한 천하의 미치광이들이 황제가 되어 악행을 저질렀다. 로마는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힘도 잃었고, 제국은 동서로 쪼개졌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선포된 사람은 심지어 로마인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야만인 부족의 족장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유익한 교훈일 수 있다. 당장의 걱정거리와 문제 때문에 대중이 독재자와 선동가들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지 마라. 그런 인물들은 대중의 자유나 삶의 방식을 파괴할 것이다.
_흑역사 6. 〈원로원은 왜 독재관 카이사르를 한 달 만에 암살했을까?(기원전 44년)〉 중에서
그 전투는 진짜로 문제가 있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투였던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의 목적은 그 지역을 침략하거나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발점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미국 중서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곳에서 철수하라는 공문을 프랑스에 보냈다. 워싱턴이 매복 공격했던 프랑스 군대는 그 공문에 대한 회신과 반박 주장을 담은 서한을 전달하려고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었다. 만약 워싱턴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버지니아를 향해 공개적으로 진군했을 것이다. 당시의 법과 관례에 따르면 외교 사절단은 공격받지 않을 특권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조지 워싱턴은 그 공격을 주도함으로써 버지니아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높였다. 그러나 퀘벡과 유럽에서의 반응은 아주 달랐다. 프랑스는 외교 규칙이 무시되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파리의 프랑스 왕실은 그 공격이야말로 무법자 영국을 북미에서 반드시 축출해야 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여겼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오하이오 강 계곡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음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공식적인 항의 서한을 보냈고, 영국과 프랑스는 공문들을 교환했다.
_흑역사 20. 〈외교 사절단을 군대로 착각하고 궤멸시킨 조지 워싱턴(1754년)〉 중에서
1922년 5월에는 레닌에게 개인적인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레닌은 4년 전인 1918년에 암살범의 저격으로 목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 후유증인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부분적인 마비 증세가 찾아왔고 잠깐 동안은 실어증까지 앓았다. 그러다가 다행히 기력을 회복해 얼마간 업무에 복귀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슴 아픈 소식만 접하게 되었다. 스탈린이 해외무역 정책, 식민지와 공화국들의 독립 등 자신이 추진했던 많은 정책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레닌은 자신이 병석에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권력overt power’이 소비에트와 레닌의 지지자들에게서 스탈린의 골수 지지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23년 레닌은 그동안 스탈린에게 철저히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건강이 나빠져 직접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레프 트로츠키를 앞세워 스탈린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최근 스탈린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권력 집단을 구축했는데, 그들은 이른바 반트로츠키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스탈린의 행동 대장으로 나섰다. 먼저 트로츠키를 공격해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그런 다음 레닌에게는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소비에트 수반을 가택 연금한 것이었다.
_흑역사 44. 〈스탈린에게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레닌(1917년)〉 중에서
출판사서평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알렉산드로스의 선택
정복왕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멸망시킨 후에 페르시아의 수도를 점령했고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한집 살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리스인들에게는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이고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했고 옛 페르시아 제국에는 그리스의 가치들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주력했다. 수도에서 현안들을 마무리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방 정벌에 나섰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다음 인도를 향해 동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번 정복 전쟁 중에 수많은 전투와 포위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그 바람에 30번도 넘게 부상을 당했다. 잦은 부상에 장사 없듯 결국에는 위대한 정복자도 잦은 부상과 고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전쟁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중병을 얻은 뒤였다. 그때가 페르시아를 침략하고 고작 6년이 흐른 뒤였고, 그의 나이 36세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세가 갈수록 깊어지자 장군들은 그가 없는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군들은 후계자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병석에 누운 황제를 수차례 알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식이 아들 한 명뿐이었는데, 후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는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왕비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어떤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어린 왕자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또 어떤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제국을 통치하고 보존하겠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얼마 후 왕위를 계승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장군도 일부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특정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자신이 깊은 병에 걸려 죽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평소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자신조차 그 주장을 정말로 믿었고 스스로를 신이자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한 명을 후계자로 선택해 달라는 장군들의 간청을 묵살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어딘가 미심쩍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특정인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대신에 자신을 둘러싼 장군들을 훑어보면서 왕위를 “가장 강인한 자”에게 물려주겠노라 말했다고 한다.
이유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은 각자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결국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제국은 사분오열되어 12명 넘는 통치자들이 나눠 가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자칭 “후계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내전으로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세 개 후계국만 남았다. (그리스를 포함하는) 마케도니아, (아시아 대부분을 포함하는) 셀레우코스 제국, (이집트를 200년 이상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등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19대이자 마지막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누이가 바로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안토니우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다. 알렉산드로스가 한때 통일한 제국의 영토는 후계자를 둘러싼 참혹한 전쟁터로 전락했고, 그 전쟁은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
사자왕 리처드가 요란을 떨면서 적지에 잠입한 대가
노르망디 공작이자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고 해서 사자왕으로 불리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인 살라딘이 십자군 원정대를 맞아 강공을 펼쳤지만 그들을 완전히 궤멸하지는 못했다. 1192년 살라딘은 십자군을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몰아냈고, 십자군은 기독교인들이 살던 다수의 성을 탈환했다. 이제 양측 군대 모두 지친 상태인 데다 군자금도 바닥이었다. 그러자 양 통치자인 리처드와 살라딘은 서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휴전 협정을 맺었다. 양측 모두가 각자 현 상황 그대로를 유지하는 선에서 합의했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의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끝내 수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실질적인 승자는 살라딘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도 영 빈손은 아니었다.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까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다고 보장받은 것이다. 이로써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십자군 맹세를 이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사자 왕의 귀국길은 가시밭길이 예고됐다. 잉글랜드로 돌아가려면 유럽을 관통해야 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리처드는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며 비판적인 데다 요구도 많은 아주 까칠한 인물이었다. 아랫사람들이라면 왕이 그런 성정을 가졌어도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일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는 동안 리처드는 특유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으로 유럽의 여러 왕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듯했다. 가령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는 예전에 사이가 좋았지만 결국 우정이 틀어졌고,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을 공공연히 모욕해 원수지간이 되었다. 또한 게르만의 속주 대부분을 통치하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와도 척을 졌는데, 하인리히에게 반기를 든 시칠리아의 왕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먼저 리처드는 왕비를 배편으로 로마의 교황에게 보냈다. 그런 다음 자신도 배를 타고 그리스를 향해 출발했고 아드리아 해 입구에 도달했다. 그곳에서부터는 새로 건조된 세 척의 갤리선을 이용해 이동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리스 서해안의 코르푸 섬에서 그 갤리선들을 얻었다고 한다(아마도 움직임을 더욱 효과적으로 숨기거나,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도 사치를 부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 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크로아티아 북부 지역인 슬라보니아의 자라에 상륙했다. 이제 육로로 몇백 킬로미터 더 가면 그에게 우호적인 통치자인 사보이 공작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유럽 대륙에 잠입하고 싶은데 왕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야 아주 많지만, 분명 리처드의 방법은 특별나지 싶다. 사실 리처드의 잠입 시도가 실패한 이유 하나는 고급 요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세상에 어떤 평범한 템플 기사단원이 고급 요리를 요구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당시에는 이국적인 요리였던 구운 닭고기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잠입이 실패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예컨대 몇 안 되던 수행원들이 그를 계속 ‘폐하’라고 부르는 통에 위장이 탄로 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리처드에게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복수의 칼을 벼리던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공작의 부하들이 빈 인근에서 리처드를 붙잡았다. 심지어 붙잡힐 당시 그가 사창가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는 리처드를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넘겼다. 이렇게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는 게르만 민족의 엄격한 감시를 받는 포로로 참담한 수모를 당했다. 게다가 그를 감금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마침내는 잉글랜드가 국왕을 석방시키기 위해 두 명의 수도원장을 파견해서 그의 몸값을 협상했다. 붉은 수염이라는 별명이 붙은 하인리히는 그를 풀어 주는 대가로 무려 15만 마르크의 몸값을 요구했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1년 총수입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워낙 거금이다 보니 잉글랜드가 15만 마르크를 모으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리처드는 1194년이 되어서야 2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웠던 잉글랜드의 살림은 파탄이 났다.
단두대의 이슬이 되더라도 품위는 잃고 싶지 않아
1791년 파리는 폭동에 휘말렸다. 루이 16세는 파리는 물론이고 프랑스 대부분에서 왕으로서의 지배력을 상실했다.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파리의 폭동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일단 궁전을 탈출해 여전히 국왕 일가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곳 중 하나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탈출 계획은 오직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사실상 국왕 일가는 친위대를 포함해 어떤 보호 수단도 없이 은밀하게 탈출할 계획이었다. 어쨌든 본래 계획은 그랬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탈출이 실패한 책임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물어야 옳다. 애초 계획대로 가족이 한 사람씩 몰래 빠져나가는 대신에, 앙투아네트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이동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것은 출발이 지연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준비해 둔 마차가 너무 좁아 좀 더 넓은 마차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앙투아네트는 어차피 마차를 새로 준비해야 한다면 화려한 금박과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왕실 전용의 대형 마차 중 하나를 타겠다고 요구했다. 궁전 직원들이 어둠 속에서 종종걸음 치며 변경된 계획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궁전을 빠져나갈 시간이 되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는 별도로 마차까지 이동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번에는 왕비가 현명하게 행동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앙투아네트는 궁전 정원에 만들어진 호사스러운 미로를 통과해 빠져나가기로 선택했다. 설상가상 왕비는 미로에서 길을 잃었고 가까스로 미로를 탈출해 마차에 도달하기까지 30분이 더 지체되었다. 본래는 야음을 틈타 밤에만 이동해 날이 밝기 전에 목적지인 방데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루이 16세 일가는 이튿날 해가 떴을 때도 아직 파리 인근의 도로 위에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이 지나치던 마을 중 한 곳에서 혁명 가담자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를 알아보았다. 솔직히 그런 시국에 그런 마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 마을에서 발각되었고, 어쩔 수 없이 궁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궁전으로 돌아온 후 사면초가에 몰린 루이 16세는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에 서명했다. 새 헌법에 의거해 이제부터는 새로 구성된 입법 회의가 모든 법을 제정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입법 회의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두려움에 프랑스를 탈출한) 수백 명의 귀족들에게 귀국을 명한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그 칙령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입법 회의는 루이 16세의 거부권을 무시했고 망명 귀족들의 토지와 사업체를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편승해 자코뱅파 극단주의자들은 파리의 고질적인 문제들, 보편적인 불만 사항, 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배 등을 부각하며 군중을 선동했다. 급기야 이웃 국가들마저 프랑스를 침입하겠다고 위협하자 이제 국민 방위군의 지원을 받았던 폭도들이 궁전에 난입했다. 루이 16세는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궁전 근위대에게 폭도들을 향해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유 여하야 어쨌건 결국 그들은 폭도들을 향해 발포했다. 시위대가 스위스 용병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루이 16세를 붙잡아 탕플 탑에 유폐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아홉 달 후 앙투아네트도 명백히 조작된 허위 혐의로 남편의 뒤를 이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우리는 흑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1924년까지 인류사에서 흑역사라 불릴 만한 사건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흑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항상 자만심과 불안감이 흑역사를 촉발한다는 진실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누구든 실수를 저지른다. 그동안의 역사서들은 주로 성공과 승자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던 인간의 부끄러운 반쪽의 모습이다. 이것을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더 성숙한 역사를 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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