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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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 3월 4일 ~ 1602년 3월 24일 | |
태어난 곳 | 슨푸 |
죽은 곳 | 히코네 |
별명 | 이이 아카조나에(井伊赤備) |
최종 계급 | 증 종3위 |
주요 참전 |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
기타 이력 | 히코네 번주 |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1561년 3월 4일 - 1602년 3월 24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 말기의 무장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천하 통일을 도운 1등 공신이다.
지금의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으며, 와신상담 끝에 1575년 이에야스와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이후 특수부대인 이이 아카조나에(井伊赤備)를 조직하고 여러 전쟁에서 도쿠가와 군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에도 입성에 동참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60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들은 히코네 번의 번주로, 후다이다이묘의 최고봉으로 막부 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위키백과]
아명은 토라마츠.
토토우미국(遠江国) 이이노야(井伊谷)(현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에서 태어났다. 이이 가문은 대대로 지방영주였다. 이이노야는 위로는 다케다 신겐, 오른쪽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사이에 낀 지역이었다. 어느쪽이든 가신이 되어 그 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이 가문은 당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권안에 들어가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이마가와를 섬기게 됐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양할아버지 이이 나오모리는 1560년 오다 노부나가를 쳐들어갔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 당주를 이은 아버지 이이 나오치카는 세력을 불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는 모반의 의심을 사서 나오마사가 태어난 다음해인 1562년 요시모토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죽음을 당한다.
이이 가문은 남성이라고는 이이 나오마사만 남게 되었고, 아버지의 사촌여동생이자 한때는 약혼녀였던 지로호우시(또다른 이름은 유우엔니)가 그의 양모가 되며 이름을 이이 나오토라로 개명하여 당시 어렸던 나오마사를 대신하여 당주 역할을 하였다. 나오마사는 8살까지 나오토라가 맡아 기르다, 미카와(현 아이치현)의 절에 맡겨져 15살 때까지 교육을 받았다.
다케다 신겐이 죽고 다케다 세력이 약해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토우미 지역을 안정시켰다. 이에, 나오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절에 맡겼던 15살의 나오마사를 불러와서 157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했다. 이에야스는 만치요(万千代)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의 시종(小姓)으로 삼고, 영지를 갖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의 풍습으로 두 사람은 중도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여담으로 이에야스의 장모인 시나(첫아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외할머니)는, 나오마사에게는 친할아버지의 누나다. 두 사람은 먼 친척 사이다.
시종으로 일한지 1년 뒤인 16살 때, 이에야스를 암살하려고 침입한 자를 발견하고 단칼에 베어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공으로 기존의 10배인 고쿠다카 3천석을 받았다.(이이가전기의 기록)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싸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빨간 갑옷이 특징인 특수부대인 이이 적비(井伊赤備)를 조직하고 여러 전쟁에서 도쿠가와군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이의 붉은 귀신(井伊の赤鬼). 선배 무장격인 혼다 타다카츠가 몸에 상처 하나 없었다고 했던 것에 반해 그는 전장에서 맹렬히 활약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2] 그래서 보다 못한 타다카츠가 "장수된 자는 몸도 좀 사릴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그가 태어날 무렵 여러 사건으로 집안 남자들이 잇달아 살해당해 전멸하다시피 하는 바람에[3] 그가 5살 무렵 이이 나오토라가 여성의 몸으로 당주가 돼야 했던 기막힌 상황에서 비롯되는 성격이다. 나오마사가 너무 어리고 대를 이을 다른 남자들도 없으니 이이 나오토라가 여성의 몸으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이이가를 재건할 마지막 희망으로서 태어나자마자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을 그가 얼마나 사명감과 부담에 시달렸을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것이다. 게다가 도쿠가와의 다른 중신들이 대대로 도쿠가와에 충성한 세록중신인데 반해 그는 신참자였기 때문에 입지를 만들기 위해 그는 미칠듯이 공을 밝히는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공을 세우다 못해 아예 세키가하라에서는 아주 높게 쳐주는 이치방야리(적진에 첫 공격을 가한자에게 주어지는 공훈)를 차지하기 위해 원래 그 역할을 하기로 돼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속여 넘기기도 했다. 그의 공을 탐하는 성격은 결국 그의 사망원인이 되고 말았는데 서군 패배 확정후 서군에서 가장 이름 높은 무사중 하나인 시마즈 요시히로의 추격에 나섰다가 시마즈가의 자살 전술인 스테가마리(捨て奸)에 의해 저격당해 중상을 입고 만다. 이후 시마즈가의 처분을 논할때 그들의 영지를 보장해주고 화평을 유지함을 주장하는 개인적 원한을 넘어선 우수한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이지만 총상이 도져 사망하고 만다.
전장에서는 단신으로 말타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서, 부하장수들이 제발 진중하라고, 장수가 군세를 떠나면 남은 병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조언하자, "나보다 늦는 자는 앞으로 사내로 인정안한다"라고 대답했다.
또 '망나니 효부(人斬り兵部. '효부'는 관직명이다.)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장에서의 활약 때문이 아니라 성격이 격하고 부하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면이 있어서 가신이 조금만 일을 실패해도 직접 베어 죽여버리는 일이 많아서 붙은 별명. 실제로 이이의 군단은 도쿠가와 최강의 군단으로 용명이 높았으나 나오마사의 엄격한 군율 때문에 이를 견디지 못한 가신들이 혼다 타다카츠의 부대로 옳겨간 이들도 많았다고. 이를 두고 성은 이이(いい, 좋다)인데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 평을 듣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얼굴이 꽤 곱상했는지 전국무장 치고는 거의 남색을 하지 않은 이에야스의 남색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나오마사의 상처에 이에야스가 직접 약을 발라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에도 입성에 동참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602년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무골들인 다른 사천왕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났기에 후사를 맡기려고 했던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의 부고를 듣고 크게 상심했었다고 한다.
히코네의 마스코트 '히코냥'.
에도 막부 성립 이후 이이 가문은 막부 말기에 이르기까지 히코네 번의 번주로 군림했다. 후손으로 막부 말기의 다이로였던 이이 나오스케가 유명하다.[4] 지금도 히코네 시에서는 나오마사를 기리는 축제를 매년마다 열고 있을 정도로 히코네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마스코트도 위에서 보다시피 이이 나오마사의 투구를 쓴 고양이 '히코냥'. 이이 나오마사의 아들 나오타카를 구해준 고양이가 모델이라고 한다. 히코네 성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사한 갑옷.[나무 위키]
도쿠가와 사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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