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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

Bawoo 2015. 3. 25. 22:50

 

이반 4세

Vasnetsov Ioann 4.jpg
러시아의 군주
재위 1533년 ~ 1584년
별명 뇌제(번개제)
공포제
출생일 1530년 8월 25일(1530-08-25)
사망일 1584년 3월 28일 (53세)
황후 아나스타샤

1530. 8. 25 러시아 모스크바 근처 콜로멘스코예~ 1584. 3. 18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1533~84)이며 러시아의 차르(1547~84 재위)로 공식 선포된 최초의 인물.
정식 이름은 Ivan Vasilyevich. 별칭은 뇌제(Ivan Grozny).

 

개요

스웨덴과 리보니아를 상대로 장기간 전쟁을 벌였으나 대부분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군대의 규율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한 행정체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면서 보야르(대귀족)와 여타 고위 귀족층을 탄압하며 공포정치를 폈다.

초기생애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2번째 아내 옐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의 첫째 아들이며 부계 쪽으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직계 후손이었다. 네프스키 공의 아들 다니엘은 1263년 모스크바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는 세습 모스크바 대공 칭호의 첫 소유자가 되었다. 다니엘은 또한 다닐로비치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이반 4세는 바로 다닐로비치 왕가의 군주 가운데 끝에서 2번째 인물이다. 모계혈통을 통해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귀족가문과 인척관계에 있었는데 이 가문은 16세기초 리투아니아에서 모스크바 지역으로 이주해왔다. 나중에 이반 4세 자신에 의해 공식화된 이론, 즉 다닐로비치 왕조가 신성 로마 황제 아우구스트의 직계 후예라는 것은 왕조문제를 둘러싸고 국가간의 주장에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을 넓히고자 지어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1533년 12월 4일 아버지의 사망 직후 그는 도르미티온 성당에서 대주교 다니엘에 의해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어머니 옐레나 대공비는 총애하던 신하 이반 오프치나 텔레프네프 오볼렌스키(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반이 그의 아들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생겨났음)의 도움을 받아 1538년 4월 3일 사망할 때까지 이반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옐레나 대공비가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반 4세는 어느 누구도 범행자로 지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 오프치나 텔레프네프 오볼렌스키는 감옥에 보내졌으며 이반 4세의 유모였던 오볼렌스키의 누이는 수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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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는 5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국정에 참여했으며 유력 귀족들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의 바로 한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그가 최초로 독자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13세 때 일인데 당시 궁정 내 한 파벌의 지도자인 안드레이 슈이스키 공을 바로 자기 면전에서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슈이스키 공은 그때 이반의 사냥개 사육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당시 실질적인 권력은 이반의 인척인 글린스키 공들의 수중에 있었다. 어린나이의 이반은 사냥과 수도원 방문 등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1545년부터는 전국 각지로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 같은 해 그는 '무례한 언사'를 하는 귀족들의 혀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떠한 비판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분노를 터뜨렸는데 젊은 혈기의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역죄로 간주했었다.

 

궁정신하들은 종종 모욕을 당했으며 대주교 마카리는 자주 이들 신하들 편에 서서 간섭하고 나섰다. 마카리 대주교는 1563년 숨질 때까지 이반 4세를 억제하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6년 6월 몇 사람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옛날 이반 4세가 총애하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인 표도르 보론초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이반은 자신의 결혼과 대관식 문제에 관해 마카리 대주교의 조언을 공식적으로 청했다. 대관식을 통해 그는 대공이라는 칭호 대신 차르(카이사르를 축약한 형태)라는 칭호를 얻었다.

젊은시절의 차르

1547년 1월 16일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2월 3일 아나스타시아 자하리나-유레바와 결혼했다. 신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안드레이 코빌라코슈킨 가문(이 가문에서 다음의 러시아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탄생했음) 출신이었다. 1560년 8월 7일 아나스타시아가 숨질 때까지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었다. 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 가운데 단지 2명만이 생존했다. 역사가들은 아나스타시아가 마카리 대주교처럼 이반 4세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고 빈번히 평화중재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젊은 나이의 이반 4세에게 정의의 원칙에 기반을 둔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품게 한 것은 바로 마카리 대주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업무의 체계화가 시작되면서 개혁방안들이 제시되었으며 이 제안들은 1547, 1549년 교회총회에서 승인되었다. 나중에 차르를 배반하게 되는 안드레이 쿠르프스키 공에 의하면 당시 이반 4세는 '선발 위원회'(Chosen Council)라고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고문단으로부터 전반적인 지침을 구했다. 이들 고문단 가운데 유력 인사로는 당시 차르의 총애를 받던 사제 실베스트르와 젊고 유능한 정치가 알렉세이 아다셰프(나중에 불명예스런 일을 겪게 됨) 등이 있었다. 1550년 새로운 법전이 편찬되었으며 행정실무와 군복무 조건이 개선되었다. 이와 함께 지방정부에 광범위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타타르족 정벌

1549년 차르의 자문기관으로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가 소집되었다. 러시아의 군주들은 타타르족의 침략에 오랫동안 두려움을 느껴왔으며 이반 4세 역시 이같은 위험성을 선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카리 대주교에게 섭정을 맡기고 자신이 직접 참여한 1547, 1549, 1552년의 원정 결과 볼가 강변의 카잔에 위치한 타타르 칸국(汗國)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또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은 아무런 전투 없이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내부적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러시아의 우위권에 관한 규정 때문에 사태가 더욱 얽혀들어갔다.

 

러시아의 우위권을 명시한 규정들은 지나치게 복잡해 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귀족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그 세력 또한 성장해갔다. 1553년 3월 이반 4세가 중환으로 드러눕고 보야르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상속자인 어린아들 드미트리 왕자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게 했다. 추밀원과 보야르 위원회는 각자의 입장으로 나뉘었으며 대다수 사람들은 이반 4세의 어린 아들이 차르로 즉위할 경우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이 재발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보야르 세력은 차르 후보자로 이반 4세의 사촌인 스타리츠키의 블라디미르 공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여태까지 자신이 의지해왔던 많은 사람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아들 드미트리에게 왕위계승권이 돌아가도록 전반적인 승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불명예스런 일을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블라디미르 공 자신도 섭정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 공이 합법적인 왕위계승 절차에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15년 동안 블라디미르 공과 야심에 찬 그의 어머니는 이반 4세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결국 이반 4세에 의해 두 사람 모두 제거되었다(1569경)(→ 색인 : 혼란시대).

리보니아와의 전쟁

볼가 강 양안이 러시아의 영토로 확보됨에 따라 이반 4세는 육지로 둘러싸인 러시아의 오랜 관심사였던 해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리처드 챈슬러가 이끄는 영국상인들이 북해항로를 통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사실이 있기는 하나 이반 4세는 그토록 갈망해오던 유럽과의 통상이 발트 해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남쪽보다는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1558년 1월 리보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582년 1월 15일 러시아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게 사태개입을 요청, 안토니오 포세비노 교황청대사가 중재를 위해 파견된 이후 양측간 휴전이 체결됨으로써 전쟁 시작 후 24년 만에 끝이 났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아무런 실익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오랜 전투로 국력이 쇠잔해졌다. 이반은 자신의 희망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도저히 인내할 수 없었으며 1581년 무척 사랑하던 상속자인 이반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차르는 이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차르의 분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그의 아들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들을 지팡이로 패죽이고 자신에게

 놀란 이반 뇌제. <일리야 레핀 그림>

 

 

 

나중에 이반 4세는 자신이 처형한 3,0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이름이 담긴 추념문(sinodiki)을 상당한 금액의 돈과 함께 여러 수도원에 보냈으며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수도사들에게 당부했다. 이반 4세 자신이 추념문에 이름을 포함시키지 않은 사람도 다수인데 이들 희생자 대부분은 이반 4세가 오프리치니나(oprichnina:차르 직속령)를 형성했던 시기에 처형당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전통적 방식으로 통치되도록 하고 나머지 한 부분(미망인의 몫, 즉 오프리치라고 불렸음)은 1,000~6,000명 규모의 엄선된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직접 통치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관한 모든 문서들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모스크바의 화재 가운데 하나에 의해 거의 다 소실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반 4세의 집권기간 중 이 시기 동안의 그의 행동에 대해 상이한 설명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전제적인 군주 이반 4세와 특권을 빼앗기는 데 불만을 품은 구(舊)귀족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심도 있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반 4세가 군대 지휘관들에게 품었던 불만이다.

 

일례로 오프리치니나는 탁월한 야전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인 쿠르프스키(이반 4세와 먼 친척관계에 있었음)가 이반 4세를 배반하고 폴란드 왕의 편으로 넘어간 직후 형성되었다. 오프리치니나는 1565~72년의 단지 7년간 만 존속했었는데, 오프리치나 연대가 크림 반도 지역에 있는 타타르족의 공격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데 실패하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반 4세의 정신상태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의 집권기에 대해 살벌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통치방법과 업적

그가 취한 조치들 가운데 많은 부분, 특히 공개처형의 잔혹함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를 불쾌하게 한 성직자들을 죽이는 방식에서는 그의 노브고로트 시민 학살 때와 마찬가지로 극도의 잔인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반 4세의 잔혹함을 당시의 상황 속에서 살펴보고 또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사건과 이단재판소에서 행해진 방법들과 비교해본다면 반드시 그의 행위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극단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이반 4세가 첫번째 아내 아나스타시아의 사망 후 결혼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매우 타산적인 정치가였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아나스타시아가 세상을 떠난 지 11일 후 그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관계를 트고자 교섭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혼인을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교섭은 성공적이 아니었으며 나중에 재차 교섭을 시도하고 카타리나와의 혼인을 위해 스웨덴과 1567년 휴전을 체결하기까지 했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카타리나는 스웨덴 왕 에리크 14세의 동생인 요한 3세의 아내가 되었다. 이반 4세는 폴란드와 러시아 간의 정치적 통합을 희망했다. 이같은 구상은 당시 러시아와 폴란드 양측의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같은 것이었다.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죽자 이반 4세는 재빨리 폴란드 왕위 후보자를 내세웠다.

 

이반 4세는 의심할 나위 없이 격정적인 인물이었다. 통치권자가 배우자 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갖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빈번히 아내가 바뀌었다. 평생 6명의 아내가 있었는데(7번째 결혼은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음) 그 가운데 3명은 결혼생활중 세상을 떠났으며 그보다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단 1명이었고, 나머지는 그와 이혼한 후 수녀가 되어야 했다. 그는 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시녀 가운데 한 사람인 메리 헤이스팅스와 혼인하는 문제를 놓고 영국대사와 협의한 적도 있었다. 1553년 이후 영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크게 관심을 쏟았으며, 1566년에는 장난삼아 왕위를 포기하고 영국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품어보기조차 했지만, 158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의 차르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다양하다. 외교정책에서 그가 취한 조치는 모두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노선은 이후로 표트르 대제가 계속 추종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정책은 통상부문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해 번영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은 이웃 유럽 각국들 사이에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반 4세는 또한 타타르족과 투르크 세력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인쇄를 비롯한 문화의 발전을 적극 장려했다. 독서량이 풍부했으며 문장력도 뛰어났다. 남아 있는 그의 글들은 정치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뛰어난 언어구사 능력과 신랄한 풍자가 특히 돋보인다. 또한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였으며 그의 신앙심은 흔히 정치적 목적과 상충되기도 했었다. 기도문과 교회음악을 직접 작곡하기까지 했으며, 종교문제에 관한 그의 주장에는 대단한 힘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자의 무한 권력을 옹호하는 데 최대 역점을 두었는데 이같은 견해는 당시 대부분의 군주들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 다음 백과 - N. Andreyev 글 / 사진 자료: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