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 |||
쿠너스도르프 전투, Alexander Kotzebue, 1848년작 | |||
날짜 | 1756년 – 176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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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유럽, 북아메리카 와 인도, 아프리카, 필리핀 | ||
결과 | 파리 조약,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북아메리카, 인도 식민지 획득.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 간접적인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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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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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영어: Seven Years' War, 독일어: Siebenjähriger Krieg 지에벤예리거 크리크[*], 1756년-1763년)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게 되어 유럽뿐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와 인도에까지 퍼진 세계대전으로 번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에 맞섰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은 포메라니아 전쟁으로도 불리며,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렸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주요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뉴프랑스(현재의 퀘벡 주와 온타리오 주)를
차지하면서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고,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진행과정
7년 전쟁은 1755년 9월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와의 대립으로 인한 식민지전쟁(말하자면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외교정책을 전환해 지금까지 동맹 관계를 맺어왔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끊고 강대국으로 발전하던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이에 대항해 1756년 5월 1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유럽 대립구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방어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이 대전환은 유럽 외교사상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은 프로이센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10월말 예방 전쟁을 개시하고 작센을 침공하였다. 이에 러시아가 방어 동맹에 참가하고, 다음 해에는 독일 제후들과 스웨덴도 프로이센의 적으로 돌아서는 사태가 벌어졌다. 5월에는 프랑스가 방어 동맹에서 공격 동맹으로 탈바꿈 후 거액의 원조금과 병력을 오스트리아에 제공하였고 여기에 러시아도 가담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3대 강국에게 포위당한 상황에 빠졌다.
3국의 포위에 대항하기 위해 내선작전(內線作戰)이란 전략을 세운 프리드리히 2세에게 작센은 중요한 지원 근거지였고,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 중 하나였다. 작센은 슐레지엔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의 ⅔에 해당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농업 생산 기반이 있기 때문이었다.
슐레지엔을 직접 침공하지 않고 작센-보헤미아를 침공 목표로 삼은 것은 슐레지엔을 목표로 하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자극을 완화하고 오스트리아군의 후방 연락선 측면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원래 슐레지엔을 주전장으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내선작전상 불리한 전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내선작전의 전략 태세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약체인 프랑스군을 동쪽에서 맞아 싸워 격파할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먼저 오스트리아군을 작센-보헤미아 지역에서 몰아 낼 필요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프라하로 전진해 5월 6일 오스트리아군과 격렬한 전투 상태에 돌입했고 양군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의 승리로 끝났고, 프라하는 포위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이후 군제 개혁을 거쳐 매우 강력해져 있었다. 명장 레오폴트 폰 다빈이 이끄는 막강한 오스트리아 군은 프리드리히 2세가 포위 중이던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4만여 명의 병력과 포 150문을 이끌고 진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공성군 병력 35,000명과 포 50문을 모아서, 6월 18일 콜린에서 야영 중이던 다빈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역으로 격파당해 12,09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다빈군은 8,000명의 사상자만 생겼다.
이 콜린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라하의 포위를 풀고 보헤미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호기로 판단한 연합군은 프로이센과 하노버를 침공하여 그해 9월부터 10월에 걸쳐 베를린을 집중공격했고,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을 점령했다. 위기에 빠진 프리드리히 2세는 10월 18일부터 11월 4일까지 작센지역에서 기동 작전을 실시했다.
일단 후퇴한 것처럼 보여 이를 오인하고 추적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군을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특기인 사행전술(斜行戰術)로 격파했다. 뒤이어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 시(市)를 점령한 카를 왕자가 이끄는 65,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3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스바흐에서 브레슬라우 근교 로이텐까지 12일 동안 약 170마일의 거리를 기동하여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사행전술을 구사해 승리를 얻었다.
북쪽에서 러시아군 지휘관 페르모르가 26,000명을 이끌고 프로이센에 침입하자, 이들을 소른도르프에서 격퇴했다. 그리고 다시 작센으로 돌아와 드레스덴을 점령했던 다빈군을 몰아내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호호키르히에서 야영 중 다빈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하는 상태에 빠졌는데도, 별도의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지엔에 침공한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슐레지엔으로 방향을 돌려 나이세를 포위한 후, 다시 작센으로 돌아가, 동맹군에게 괴롭힘을 받던 드레스덴을 엄호했다.
이처럼 민첩한 기동을 보인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였으나, 소른도르프와 호쿠스키르슈의 전투에서 훈련된 병사들을 다수 잃어, 다음 해에는 내선작전을 실행하는게 곤란하게 되었다. 1759년 새로이 병사를 보충하여 군대를 강화했지만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자신들의 주력을 갖고 침공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8월 크네르스도르프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과 격돌하여 양군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무승부로 끝났다. 다빈의 군대와 동맹군은 베를린으로 들어가 군세(軍稅)등을 징수하여 프로이센의 국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나, 러시아가 주저하였기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비스즈라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드레스덴에서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프로이센군은 1759년 여름부터 1년 동안 전 병력의 ⅓을 잃었다.
그러나 동맹군의 공격은 병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약점으로 인해 둔화되어 프로이센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동맹군 측의 내부적인 약점은 스웨덴과 독일 제후국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과 러시아, 프랑스군의 질이 프로이센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60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다빈에게 농락당하여 슐레지엔 지역으로 들어가 북쪽의 러시아군, 남쪽의 오스트리아군, 합계 6만여명의 병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3만명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를 이동하여 리그니츠에서 적의 공격을 격파했다.
그 사이 주변을 둘러싼 환경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남하로 인해 폴란드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상실되는 것을 보고, 1758년부터 러시아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원조를 대폭 삭감하였다. 또한 식민지 전쟁의 중요성 때문에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도 같은 이유로 1761년 10월 프로이센에 대한 원조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1762년 1월 여제 에리자베타의 급사로 인해 러시아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에 패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어 그해 11월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에 1763년 2월 15일 프리드리히와 화해하고,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7년 전쟁은 독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센이 대국의 지위를 확립하고 독일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2국주의의 기초를 쌓게 만든 전투였던 것이다. 프로이센은 이 전쟁에서 18만 명을 잃었으나, 작센 지역을 보호 아래 둠으로써 군사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우수한 전략인 내선작전을 실시하여 정세에 따라 공세와 방어 작전을 현명하게 선택,시행함으로써 사면초가에 빠졌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프리드리히 2세가 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 후 프로이센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해외 식민지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다툼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은 불리한 상태에 빠졌으나, 1757년 전시 내각의 대피트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서서히 전황을 호전시켜, 영국의 해상 제패는 완료되었다. 1763년 2월 10일 파리에서 영국과 프랑스간의 조약 체결이 이루어진 결과 프랑스는 해외 이권의 일부는 유지하지만 해외 식민지 모두를 잃어버리게 된다.
평화
주요 전투
연도 | 날짜 | 이름 | 연도 | 날짜 |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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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 | 5월 20일 | 미노르카 섬 해전 | 1756년 | 10월 1일 | 로보지츠 전투 |
1757년 | 4월 21일 | 라이헨베르크 전투 | 1757년 | 5월 6일 | 프라하 전투 |
1757년 | 6월 18일 | 콜린 전투 | 1757년 | 6월 23일 | 플라시 전투 |
1757년 | 7월 26일 | 하슈텐베크 전투 | 1757년 | 8월 3일 ~ 8월 8일 |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 |
1757년 | 8월 30일 |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 | 1757년 | 9월 7일 | 모이 전투 |
1757년 | 11월 5일 | 로스바흐 전투 | 1757년 | 11월 22일 | 브레슬라우 전투 |
1757년 | 12월 5일 | 로이텐 전투 | 1758년 | 4월 29일 | 쿠달로르 전투 |
1758년 | 6월 30일 | 돔슈타트 전투 | 1758년 | 7월 7일 ~ 7월 8일 | 카리용 전투 |
1758년 | 8월 3일 | 나가파티남 전투 | 1758년 | 8월 25일 | 조른도르프 전투 |
1758년 | 10월 14일 | 호흐키르크 전투 | 1759년 | 4월 13일 | 베르겐 전투 |
1759년 | 7월 23일 | 케이 전투 | 1759년 | 8월 1일 | 민덴 전투 |
1759년 | 8월 12일 | 쿠네스도르프 전투 | 1759년 | 8월 19일 | 라고스 전투 |
1759년 | 9월 10일 | 퐁디셰리 전투 | 1759년 | 9월 13일 |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 |
1759년 | 9월 25일 | 호이어스베르다 전투 | 1759년 | 11월 20일 | 퀴베론 만 전투 |
1759년 | 11월 21일 | 막센 전투 | 1759년 | 12월 4일 | 마이센 전투 |
1760년 | 6월 23일 | 란트슈트 전투 | 1760년 | 8월 1일 | 바르부르크 전투 |
1760년 | 8월 15일 | 리그니츠 전투 | 1760년 | 11월 3일 | 토르가우 전투 |
1761년 | 7월 15일 ~ 7월 16일 | 필링하우젠 전투 | 1762년 | 7월 21일 | 부케르스도르프 전투 |
1762년 | 7월 23일 | 2차 루터베르크 전투 | 1762년 | 9월 24일 | 마닐라 전투 |
1762년 | 10월 29일 | 프라이베르크 전투 |
* 출처: 위키백과 - 문맥이 안 맞는 부분은 임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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