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3중 협주곡’(트리플 콘체르토)로 불리는 이 작품은 베토벤이 남긴 협주곡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다른 모든 협주곡들이 단 하나의 독주악기를 위한 것인 데 비하여 이 협주곡만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세 대의 독주악기를 기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전파 시대에 유행했던 ‘협주 교향곡’의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당시 유행하던 ‘피아노 3중주’ 편성에 관현악을 결합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협주곡은 베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시기에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면에서는 같은 시기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퇴보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걸작’으로 불리는 경우는 없으며, 진지한 베토벤 애호가들조차 이 작품에 제한적인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협주곡 역시 베토벤의 음악이 아니면 불가능한 매력과 나름의 의미를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관현악은 베토벤다운 당당한 위풍과 힘찬 기백을 뿜어내고, 독주악기들도 화려한 명인기와 교묘한 앙상블을 뽐낸다. 특히 세 명의 뛰어난 독주자가 관현악의 적절한 지원을 받으며 연주할 경우 그 매력은 배가된다.
아마도 베토벤의 의도는 당대에 각광받았던 실내악 형식이자 자신의 작곡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이기도 했던 ‘피아노 3중주’를 관현악이라는 보다 강력한 표현 매체와 결합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법이 다분히 유희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데 있다. 즉 베토벤은 이 곡에서 주제를 치밀하게 발전시키는 대신에 서정적인 선율들을 세 개의 독주악기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느슨하게 반복하도록 했다. 당연히 곡은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선율들이 지닌 힘은 그 깊이를 온전히 지탱하기엔 조금 약했다. 아울러 세 독주악기를 관현악과 결합시키는 수법도 그리 세련되거나 혁신적이지 않고, 악상의 풍부함이나 전개의 치밀함이라는 면에서도 별로 돋보이지 않는다.
이런 약점들은 베토벤이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베토벤이 이 이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던 1803년에서 1804년 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그는 ‘크로이처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를 발표한 직후였고, ‘발트슈타인 소나타’와 ‘영웅 교향곡’을 작곡 중이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혁신적이고 완성도 높은 걸작들을 속속 꺼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3중 협주곡’도 그러한 혁신 또는 실험의 일환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고된 작업 도중에 쉬어 가는 경유지 정도의 의미였을까?
3중 협주곡은 피아노 트리오 편성에 오케스트라 반주가 붙는 형식의 곡이다.
루돌프 대공과의 인연
베토벤이 이런 특이한 형태의 협주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비서 노릇을 했던 안톤 쉰틀러에 따르면, 애초에 이 곡의 피아노 파트는 루돌프 대공을 위해서, 바이올린 및 첼로 파트는 각각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자이틀러와 안톤 크라프트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루돌프 대공은 이 협주곡이 만들어지던 무렵 베토벤을 처음 만나 그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베토벤과 대공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신실한 우정을 나눴다. 대공은 베토벤에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고, 베토벤은 대공에게 ‘대공 트리오’, ‘황제 협주곡’, ‘하머클라비어 소나타’, ‘장엄 미사곡’ 등 최고의 걸작들을 헌정했다.
루돌프 대공의 음악적 재능과 피아노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협주곡이 작곡될 무렵 대공의 나이는 아직 15~16세였다. 따라서 베토벤이 어린 대공의 연주력을 감안하여 이 곡의 피아노 파트를 비교적 평이하게 썼다는 가설은 메우 그럴 듯하다. 하지만 루돌프 대공이 이 곡을 연주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이 협주곡은 루돌프 대공이 아니라 로프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프랑스를 향한 구애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이 협주곡의 작곡 동기를 베토벤의 ‘프랑스에 대항 관심’과 관련짓기도 한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젊은 시절 베토벤은 나폴레옹(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게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또 한때는 빈을 떠나 파리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영웅 교향곡’의 작곡도 원래는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3중 협주곡’의 경우에는, 그 장르적 연원이 바로 프랑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협주곡의 독주부에 복수의 악기를 배치하는 ‘협주 교향곡’(symphony concertante) 양식은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차츰 독일의 만하임과 본 등지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도 그 영향권 아래에서 탄생한 작품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은 역시 단순한 장르의 차용이나 답습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독주부는 ‘협주 교향곡’의 전통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이것은 역시 베토벤다운 실험정신의 발현이라고 보아줄 수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독주부의 주도권이 ‘피아노 3중주’에서 관레적인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니라 첼로에게 주어진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곡에서 첼로는 모든 악장의 주제 제시를 도맡는 것을 비롯하여 전곡에 걸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때 염두에 두었다는 안톤 크라프트는 하이든이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악단에서 수석 첼리스트로 활약했던 당대의 손꼽히는 명연주가였다.
정리하자면, 이 ‘3중 협주곡’은 당대의 가장 대중적인 실내악 편성과 영웅적인 오케스트라의 결합을 통해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자 했던 베토벤의 실험정신의 산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그 실험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느냐에 대한 평가는 따로 내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1악장: 알레그로
C장조, 4/4박자. 장대한 첫 악장은 온화하면서도 절도 있는 행진곡 풍으로 진행된다. 이런 규모의 첫 악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여리고 차분하게 시작되는 도입부가 사뭇 인상적이며, 특징적인 부점 리듬을 내포한 주제들에는 정중하고 여유로운 기품이 서려 있다. 두 개의 주제는 공히 첼로에서 등장하여 장식적인 바이올린을 거쳐 피아노로 이어지며, 이것들이 비교적 단순하게 반복 변주, 확장되는 동안 관현악이 중후하고 위풍당당한 멋을 더한다.
2악장: 안단테
A플랫장조, 3/8박자. 불과 53마디로 이루어진 간주곡 풍의 느린 악장. 독립된 악장이라기보다는 피날레 악장을 예비하는 긴 서주로 볼 수도 있다. 독주 바이올린이 서정적인 주제 선율을 차분히 노래하는 가운데 피아노가 섬세한 아르페지오로 두 악기를 뒷받침하며, 오보에, 파곡, 현의 피치카토 등이 가미된다. 마지막에는 독주악기들에 의한 카덴차 풍의 부분에 이어 곧바로 다음 악장으로 넘어간다.
3악장: 론도. 알라 폴라카(폴란드 풍의 론도)
C장조, 3/4박자. 폴로네즈 풍의 춤곡 리듬에 기초한 론도 악장. 폴란드 궁정에서 유래한 폴로네즈(polonaise)는 나폴레옹 시대에 귀족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춤곡이다. 경쾌하고 흥겨우면서도 기품과 세련미를 유지하는 멋진 피날레이다. ▲곡은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폴로네즈 풍의 피날레로 막을 내린다.
1804년 여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비공개 초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인 초연은 1808년 부활절 이전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졌다. 또 빈에서는 같은 해 5월 아우가르텐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독주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초연되었다.
추천음반
1. 스비아토스라프 리흐테르(피아노)/다비드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첼로)/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EMI
글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