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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독소전쟁시 여성 저격수]루드밀라 미하일로브나 파블리첸코

Bawoo 2016. 3. 25. 22:29

 

루드밀라 미하일로브나 파블리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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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2일에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 벨라야 체르호프에서 태어났다. 어린 '루다'는 타고난 학생이었고 독립적인 성향이 있었으며, 아주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파블리첸코가 9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부모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로 이주했다. 파블리첸코는 이곳의 조병창에서 일했다. 또한 사격 클럽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바로 이 때에 저격수로서의 재능을 키워 나갔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군의 전면적인 소련 침공으로 독소전이 발발했을 때,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역사학 전공의 키에프 주립대학생이었다. 그녀의 많은 동급생들과 마찬가지로, 파블리첸코도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붉은 군대에 지원했다. 보충병 담당 장교는 처음에 파블리첸코의 잘 다듬어진 손톱과 패셔너블한 옷차림, 헤어스타일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파블리첸코는 장교에게 소총을 들고 싸우고 싶다고 말했다. 장교가 이 말을 듣고 실소를 터뜨리면서 총에 대해서 아무거나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사격술 수료증을 꺼내서 자신의 사격 실력을 증명했다. 장교는 그래도 못미더웠던지 파블리첸코에게 야전 간호원이 되는 것을 권했지만, 파블리첸코는 이것을 거절했고 결국 제 25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1941년 8월에 파블리첸코 일병은 '벨리아예프카'라는 마을 근처의 언덕 방어전에서 2명의 적을 사살하는 첫 전과를 올렸다. 그녀의 무기는 4배율의 PE스코프를 장착한 모신/나강 M1891/30 저격소총이었다. 이후 파블리첸코는 오데사에서의 2달 반 동안의 전투에서 187명을 사살했다. 오데사의 통제권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파블리첸코는 세바스토폴로 보내졌다. 세바스토폴에서 맹렬한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6월에, 파블리첸코는 박격포 포탄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이 때 그녀의 전과는 309명이었다. 소련군 지도부는 이 상처입은 저격수에게 잠수함을 타고 세바스토폴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파블리첸코는 절대 전사해서는 안 될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그녀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의 영부인 엘레노아 루즈벨트 여사에 의해 백악관에 초청을 받은 첫 번째 소련 시민이 되었다. 이 때 파블리첸코는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후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다시 전선에 돌아가지 않았고, 교관이 되어 2차대전 종전까지 수백명의 저격수를 양성했다(근 10개월간의 전과가 309명 사살이었으니, 만약 종전시까지 최일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했다면 전과는 600~ 700명에 육박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1943년 10월 25일에는 소련영웅금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 영웅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키에프 주립대학에 돌아왔다. 1945년에서 1953년까지는 소련해군 본부의 수석 연구원의 조수로 일했다. 이후에도 많은 국제 회의에 참석했고, 소련 노병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1974년 10월 10일에 5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녀의 시신은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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