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uard Künneke (1885-1953)
Biedermeier Suite (c. 1942)
1- Polka
2- Mazurka
3- Kleine Liebesszene (Little Love Scene)
4- Ecossaise
5- Lied des Laternenanzünders (Song of the Lamplighter)
6- Ein Biedermeier-Walzer (A Biedermeier Waltz)
The Biedermeier period refers to an era in Central Europe during which the middle-class grew and arts appealed to common sensibilities in the historical period between 1815, the year of the Congress of Vienna at the end of the Napoleonic Wars, and 1848, the year of the European revolutions.
'비더마이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1815년부터 1848년 3월 혁명 이전까지의 '왕정복고시기(Restaurationszeit)'에 독일어권에서 나타난 시민풍속 및 정신적·문화적 성향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속물의 의미를 지닌 '비더만'(Biedermann)과 '붐멜마이어'(Bummelmeier)의 합성어로서, 원래는 독일의 시인 루드비히 아이히로트(L. Eichrodt: 1827-1892)가 1855-1857년에 발표한 '방황하는 수필집(Fliegende Bl tter)'에 연재된 글의 가공 저자인 '고트립 비더마이어'(Gottlieb Biedermeier)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더마이어'는 보수적이고, 사회비평적인 입장보다는 소시민의 안락한 여흥에 비중을 둔 당시의 독일 시민들의 전형적인 자세를 풍자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독일문학사에서의 '비더마이어'는 시대개념으로서 그 이전에 출현한 '낭만주의'와 19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나는 '사실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비더마이어 시기 내에는 '청년 독일운동(Junges Deutschland)'이라는 자유주의 물결과 나폴레옹 혁명 이전의 국왕중심체계를 유지하려는 보수반동(Vorm rz)의 상반된 조류가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사에서의 '비더마이어'는 -문학사에서와 같은 시기를 일컬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와 같은 시대개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낭만주의' 개념이 이 시기의 주요 작곡가(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의 작품에 통용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음악학에서는 '비더마이어'라는 개념을 문학에서 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특징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즉 소시민적 편협, 고루하고 속물적인 교육열, 센티멘탈리즘, 저급함 등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 용어가 본래 가졌던 긍정적인 의미, 즉 시민적 성실함과 기지와 해학이 풍부한 등의 긍정적 의미는 배제되고 부정적 의미만 부각된 셈이다. 비더마이어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적 구사는 특히 음악학의 옛날문헌에서 접할 수 있다. 이 문헌에서의 비더마이어는 '낭만적'이라고 표현하기에 꺼려지는 부정적인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의 집합체로서 규정된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 음악학자는 모저(Hans Joachim Moser: 1889-1967)인데, 그는 당시의 작곡가였던 크로이처(Conradin Kreutzer: 1780-1849), 슈나이더(Friedrich Schneider: 1786-1853), 질혀(Friedrich Silcher: 1789-1860), 로르칭(Albert Lortzing: 1801-1851), 니콜라이(Otto Nicolai: 1810-1849), 폰 프로토우(Friedrich von Flotow: 1812-1883), 헬러(Stephen Heller: 1813-1888), 프란츠(Robert Franz: 1815-1892) 등을 "비더마이어의 작은 대가(Kleinmeister)"로 일컬었다(이들은 헝가리 태생의 헬러만 제외하고 모두 독일 출신의 작곡가들이다).
한편, 다른 음악학자들은 비더마이어에 대하여 보다 올바르고 진일보한 이해를 작품의 장르적 특징과 양식적 특징에서 얻고자 시도하였다. 이 특징들은 '작은 대가들'에 국한되지 않고, '리트'와 '서정적 성격소품'의 전면적 부상, 오페라나 징슈필에서 보여지는 세태적이고 풍자적 경향, 교향곡에서의 서정적이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주제성 등을 포괄한다. 이 입장은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호이쓰너(H. Heussner)에 의해 대변되고 있지만, 비더마이어와 낭만주의의 경계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각기 상이한 현상들을 정당화하기에는 너무 일괄적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슈만의 피아노 작품 '어린이를 위한 앨범'은 비더마이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다른 작품인 '다비드동맹무곡'이나 '크라이슬러리아나'는 낭만적 자세에서 탄생된 곡인 것이다. 그리고 호이쓰너는 비더마이어를 작품사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예를 들어 슈베르트 리트의 점차적인 유행과 같은- 작품의 수용사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양식적 측면에서 낭만주의와 비더마이어와의 불분명한 구분의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음악적 낭만주의와 음악적 비더마이어를 보다 분명하게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한 것은 독일의 음악학자 칼 달하스(Carl Dahlhaus)의 공적이다. 달하우스는 음악적 낭만주의와 음악적 비더마이어 둘 다 작품사의 일부분이면서 음악적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사'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적 비더마이어는 '제도사(Institution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비더마이어는 작곡가, 작품 그리고 음악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공공기관이나 제도의 관계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적 비더마이어와 낭만주의는 여러 부문에서 상호 대립적인 특징을 가진다. 즉,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당시 설립되고 시행되던 음악기관(제도)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낭만주의 예술관은 독창성과 혁신성을 강조한 '천재미학'(Genie sthetik)을 근거로 대가들의 양식적 실험성과 진보성이 담긴 작품을 선호하였으며, 이들 작품은 주로 소수의 이지적 청중들에게만 수용된 반면, 비더마이어적 작품들은 대중적 성격을 지닌 당시의 전형적인 시민계급의 사회적 음악기관(제도)인 음악축제(Musikfest), 오라토리오 협회, 음악애호가들의 합창그룹인 징아카데미(Singakademie)와 리더타펠른(Liedertafeln), 살롱음악(Salonmusk), 가정음악(Hausmusik)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음악문화가 국가의 주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20세기에서처럼 상업적 중개인에 의해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대중 자신들의 관심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적 여흥을 주요 목적으로 한 이들 제도(기관)를 위해 쓰여진 작품들은 다수의 시민계층의 취향에 부합하였다. 여기에서 연주되거나 불려지는 음악은 낭만주의가 요구하는 예술적 개인성이나 독창성이 아니라 실용성을 지닌 것이었다. 음악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통하여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하며, 아울러서 음악을 통해 서로간에 친해질 수 있는, 즉 오락성이나 사교성을 고려해야 했다.
비더마이어들의 작곡가들은 고전시기의 음악장르, 형식적 모델, 작곡기법을 고수하면서 실내악, 오라토리오, 혹은 대중경가극(Spieloper) 등 각 장르에 적절한 '서법'(음조)을 선택하였다. 그들의 음악적 이상은 모차르트였다. 모차르트에게서 "시간을 초월한" 이상적 양식의 대표자로서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비더마이어의 이러한 전통주의적 입장은 당시 지배적인 낭만주의적 독창성미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낭만주의자들은 이들의 작품을 보수적이고 절충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표적 작곡가들의 아류로 매도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더마이어는 19세기 중엽까지 정통성이 있는 양식의 한 경향으로서 믿어졌다. 음악적 비더마이어의 맥락에서 작곡된 작품들은 대중들의 여흥 및 사교에 대한 요구에 부합하였고 동시에 음악의 교육을 널리 확산한다고 인식되었다. [출처:cafe.daum.net/cbsconductor/1kbq/230 cbs conduc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