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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소련군의 마지막 전투]시무슈 전투

Bawoo 2019. 5. 15. 23:14




1. 개요


1945년 8월 18일 ~ 20일에 소련과 일본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자 2차 세계대전의 최후반기를 장식한 전투 중 하나.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있은지 3일 후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였다. 다만 이것이 소련과 일본 사이의 마지막 전투는 아니며, 그 이후에도 쿠릴 열도와 사할린 등지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교전이 더 이어졌지만 이만큼 대규모라고 부를 만한 전투는 이게 마지막이다.


2. 전략적인 배경


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협정을 파기하고 극동쪽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를 포함한 태평양의 최북단, 쿠릴 열도까지 공략하려 하였다. 이는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영토들을 되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스탈린이 연합국과의

종전 회담에서 소련으로 하여금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려는 기반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3. 지리적 배경


일본 북부의 쿠릴 열도(Kuril Islands), 일본어로는 치시마 열도(千島 列島)의 섬들과 사할린 섬은 본래는

아이누와 같은 여러 원주민들이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던 곳이지만, 18세기 이후 러시아가 진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영토권을 놓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서로 "이 섬도 내 것, 저 섬도 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은 이때까지 아직 홋카이도도 제대로 영토로 확보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여기는 일본의 영토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후 두 나라간의 교섭이 19세기 내내 계속된 끝에 1875년의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또는 화태천도교환조약樺太千島交煥條約)이 조인되면서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령이 되고, 사할린은 러시아령이 되었다. 하지만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전쟁배상금 대신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할양해야 했고 이 모든 땅은 1945년까지 일본 영토가 되는데, 이는 마치 지금 일본이 "북방 4도"를 대하듯이 러시아로서는 억울하게 빼앗긴 땅이 되어 되찾을 대상이 된 것이었다.


치시마 열도의 자연적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곳에는 대소 30여 개의 섬이 전장 1,200km에 걸쳐서 늘어서 있으며, 각각의 섬은 모두 화산섬으로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다. 최북단에 있는 시무슈 섬(점수도, 占守島)만이 해안선이 대부분 단애로 이루어져 있기는 해도 대체로 평탄한 편이었으므로 일본군은

이를 이용해서 이 섬에 항공기지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시무슈에서 가장 가까운 소련 영토인 캄차카 반도의 로파트카 곶 까지는 15km에 불과하고, 맑은 날이면 반대편 해안의 소련군 초병이 하품하는 모습까지 쌍안경으로 관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캄차카와 시무슈 사이에 있는 시무슈 해협은 암초가 많아 안전항해를 할 수 있는 통로의 폭이 3km에 불과해서 해난사고가 잦은 곳이기도 했다.


점수도의 전체 면적은 385㎢, 토질은 지표면에서 2m 깊이까지는 화산암이 풍화한 적토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밑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밑에는 암반이 있는데, 일부 산악지역이나 해안 단애에는

이 기반암층이 노출되어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는 날씨도 좋지 않아 5~6월이 되어야 봄이 오는데,

70여종의 고산식물이 꽃을 피우는 봄에도 바닷가에는 여전히 유빙이 떠다니고, 시계가 5~6m밖에 되지

않을 만큼 진한 안개가 끼곤 한다. 안개가 끼는 계절이 지나고 8월, 여름이 오면, 차가운 바다안개가 가끔

끼는 정도로 안개는 약해지지만 기온은 여전히 낮기 때문에  이곳의 일본군 수비대 병사들은 옷을 바꿔입을 필요 없이 1년 내내 동복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한 8~9월을 보내고 나면 점수도의 날씨는 가을이 없이 곧바로 겨울로 바뀐다. 10월 하순에서

5월 상순까지 반년 동안 내내 겨울이고, 11월부터는 지독한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1], 지금 당장은 맑더라도 30분 안에 일기가 확 뒤집히면서 풍속 30~40m짜리 폭풍이 몰아치는 일이 예사고, 이런 날은

시계가 거의 제로가 되곤 한다. 이런 날에 사병들이 막사 밖에 소변 보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실종되는 일도 한해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륙 양면에서 사고가 많은 섬이었는데, 특히 12월~2월 사이에는 해상에 삼각파도가 발생하여 해상교통이 아예 두절되는 일도 잦았다. 이는 주둔군에 대한 각종 지원 및 식량공급에 심각한 장애가 되는 문제라서 이 섬에서 전투에 적합한 계절은 8~9월을 중심으로 두세달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자연조건 때문에 나무도 별로 크게 자라지 못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으로 기게 되는데, 10m가 넘는 소나무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붙어 있는 이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니, 도로가 아니면 인마와 차량의 통행은 불가능했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니, 통행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이런 특징은 방어군에게 유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독한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전략적 가치는 꽤 큰 것이었다. 단지 소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치시마 열도 자체가 오호츠크해 입구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연락 루트도 이 시무슈 해협을 지났으므로 시무슈에서는 이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다(하지는 않았지만).


게다가 치시마 열도는 미국 영토인 북방의 알류샨으로부터 일본 본토로 가는 중계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무슈는 서부에 자리잡은 해군의 카타오카 항공대 기지를 제외하고도 2곳에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가 있었다. 또한 폭이 2~3km정도 되는 시무슈와 이웃한 파라무시르 섬(황연도) 사이의 파라무시르 해협(황연해협)은 기항지/정박지로 아주 좋았기 때문에 중부-북부 치시마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해공군 기지가 점수도에 자리잡고 있었다. 점수도 이남에서 해공군 기지를 모두 가진 섬은 거의 치시마 남쪽 끝에 있는 에토로후 섬 밖에 없었다. 즉 여기가 뚫리면 바로 전선이 쿠릴 열도 남쪽 끝까지 밀리게 되는 것이고, 쿠릴에서 시무슈 이후 별다른 대규모 전투가 없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시무슈는 이렇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 섬이지만 공격은 좀 까다로웠는데, 섬 주위를 빙 두른 해안단애 때문에 병력을 상륙시킬 곳이 별로 없었다. 소련측 해안과 가장 가까운 동북부의 다케다하마(竹田浜), 서북부의 벳토부누마(別飛沼) 정면 및 남쪽의 가게마(蔭澗) 정면만이 공격 가능한 포인트였다.




4. 양측 전력


4.1. 일본제국


당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 제 91사단이었으며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73 보병여단 (지휘관 : 이와오 스기노 중장)

제 74 보병여단 (지휘관 : 사토 준장)

제 11 전차여단 (지휘관 : 이케다 대좌)

제 2 독립 전차부대 (제 11 전차 여단과 혼합 편제됨)

제 91사단 제 1 포병부대

제 91사단 제 2 포병부대

제 91사단 정비부대

제 54 항공연대


총병력 2만 3천명에 64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선박은 없지만 1500명의 해군과 약간의 전투기, 폭격기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이곳에 주둔중인 제 11전차연대는 19량의 97식 중전차 을형과 20량의 97식 중전차, 25량의 95식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5. 전투개요


5.1. 18일

18일 13시 정각을 기점으로 소련군의 상륙부대가 섬에 상륙함을 기점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당시 일본군은 상부의 명령대로 모든 무장을 헤제하고 소련에 항복하기 위해 준비중이었는데 이때 소련군은 일본군에게 해안가에 집결해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군들이 무장해제를 위해 해안가에 집결하였을때 갑자기 소련 해군함정에서 발포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하였다.이윽고 공군의 폭격이 가세하였고 상륙 주정을 통해 보병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일본군은 사상자를 다수 남겼고 아무리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눈뜨고 당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즉각 소련군에 대해 반격을 개시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군은 무장해제한지 얼마 안됐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격을 펼칠 수 있었다. 게다가 시무슈 섬의 일본군은 대전말기에 급히 징집된 병사들이 아니라 대전 기간 동안 중국,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을 배치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시무슈 섬은 전쟁 내내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던터라, 탄약과 장비 모두 부족함없이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해안에 자리잡은 소련군 선봉대를 16시, 제 11연대 전차 40여기가 덮쳤으며 소련군은 백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최초 상륙지로 후퇴하였다.이에 소련군은 대전차포대전차 소총으로도 충분할텐데를 투입해 난입한 일본군 전차들을 격파한다. 일본군은 2시간 가량 이어진 전투에서 투입한 40량의 전차중 30여기를 상실하였고 연대장까지 전사한다.


살아남은 전차들도 계속되는 소련군 증원병력을 막기위해 투입되었으며 결국 18일 하루만에 모든 전차를 상실하고 부대는 전멸했다.


5.2. 19일

전차부대를 상실하고 항공기를 띄울 수 없게된 일본군은 고지와 언덕을 기점으로 방어전을 지속했다.


5.3. 20일

중과부적에 빠진 일본군 잔당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6. 결과


소련 - 1567명 사상(516명 전사,1051명 부상및 실종)

일본 - 1018명 사상(256명 전사, 762명 부상)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소련군은 섬을 점령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일본군 사상자에 비해 소련군의 사상자가 이외로 많은데 이는 상륙한 소련군은 전차도 제대로 증원 안 됀 채로 알보병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일본군은 비록 쓰레기지만 전차부대로 소련군을 압박하는게 가능했고 정예병들이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상당하였다고 한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스탈린이 어느 정도 의도 했던 것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로 소련군이 다수의 사상자를 내어 쿠릴 열도 영유권에 대해 자신들이 흘린 피의 정당한 댓가를 요구 하려는 노림수가 들어가 있었다. 즉 저렇게 허술하게 공격을 시작한 것도 소련군 병사들의 목숨을 제물로 던져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계략이란 것



7. 그 이후


일본 제국 제 11전차연대가 참전했던 곳으로서 그때당시 격파된 일본제국 전차들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들은 반약한 전력으로 그나마 전과다운 전과를 보여준 정말 몇 안되는 일본군 전차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을 딴 육상자위대 전차대대가 홋카이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


[출처:gall.dcinside.com/board/view/?id=kancolle&no=2198179    디시인사이드 갤러..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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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군 전차부대 최후의 승리ㅡ시무전투 - 칸코레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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