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영국

[식민지 개척자] Edward Gibbon Wakefield [웨이크필드]

Bawoo 2019. 6. 25. 23:19



       

         
Edward Gibbon Wakefield
Edward Gibbon Wakefield.jpg
Member of New Zealand Parliament for Hutt
In office
1853–1855
Succeeded byDillon Bell
Member of the Legislative Assembly of the Province of Canada for Beauharnois
In office
1842–1843
Preceded byJohn William Dunscomb
Succeeded byEden Colvile
Personal details
Born(1796-03-20)20 March 1796
London, Great Britain
Died16 May 1862(1862-05-16) (aged 66)
Wellington, New Zealand
              

        (20 March 1796 – 16 May 1862) is considered a key figure in the early colonisation of South Australia and New Zealand. Despite being imprisoned for three years in 1827 for kidnapping a fifteen-year-old girl, he enjoyed a distinguished political career.   


                       


                      


                      

[요약 ]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식민지에서 활동했으며, 캐나다 식민정책에 관한 더럼 보고서(1839)의 기본구상을 제시했다.

체셔의 한 젊은 상속녀를 속여 결혼한 혐의로 런던의 뉴게이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행형제도의 엄청난 문제점을 직접 목격했고 비참하고 야만적인 영국의 해외 점령지로 기결수들을 강제이주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기결수가 아닌 일반시민을 저렴한 비용으로 식민지에 정착시키는 정책이 영국 본토의 인구증가로 야기되는 가난과 범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요한 첫번째 저술인 〈시드니에서 온 편지…… A Letter from Sydney……〉(1829년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출판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내온 것으로 믿었음)에서 식민지의 왕실령 토지를 대규모 필지로 무상 하사하지 말고 작은 단위로 '충분한 가격'(적당한 고정가격)에 불하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영국에서 해외로 이주민을 보내는 비용을 얻을 것이며 이주민의 구성은 남녀 똑같은 비율로 영국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방식으로 안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31년 '충분한 가격' 개념을 구체화한 법규가 원래 기결수들의 정착지였던 뉴사우스웨일스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에 적용되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 쓴 익명의 출판물 〈영국과 아메리카…… England and America……〉(2권, 1833)는 1834년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법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법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를 기결수들의 정착지로 만드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충분한 가격' 개념을 구체화시켰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1836년 12월 28일 건설되었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1837년 뉴질랜드 협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은 1838년 다른 2개의 단체와 통합되어 뉴질랜드회사로 발족되었다. 1839년 9월 24일 동생인 윌리엄 웨이크필드를 단장으로 한 개척단이 마오리족 원주민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법적·도덕적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토지회사의 활동으로 영국의 뉴질랜드 합병이 가속화되었으며 유사한 정책을 추진한 프랑스를 앞지를 수 있었다.

한편 1838년 웨이크필드는 캐나다 총독 겸 고등판무관인 더럼 백작 1세 존 조지 램턴의 비공식 고문으로 5개월 동안 캐나다에 체류했는데, 총독의 수석 비서관인 찰스 불러로부터 자신의 구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더럼의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정세에 관한 보고서 Report on the Affairs of British North America〉(1839년 1월 31일 영국 의회에 제출)는 웨이크필드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식민지 행정위원회가 책임을 지는 단일입법부를 중심으로 어퍼캐나다(온타리오)와 로어캐나다(퀘벡)를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더럼이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웨이크필드의 조언과 구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웨이크필드는 캐나다의 새 입법부에서 잠시 퀘벡의 보아르누아를 대표했으며 세인트로렌스 강에 보아르누아 운하를 설계했다. 계속해서 그는 뉴질랜드의 사우스 섬에 성공회 정착지 캔터베리를 계획했다. 1847~50년 대규모의 '캔터베리 순례단'이 그곳으로 이주했으며 1853년 2월 2일 웨이크필드 자신도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의회의원으로서 공식적으로는 캐나다와 같은 '책임정부'를 제안했으나 총독서리 로버트 헨리 위니어드 대령과의 비밀회담에서는 이 계획을 비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54년 12월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했다. 1961년에 폴 블룸필드의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영국연방의 건설자 Edward Gibbon Wakefield:Builder of the British Commonwealth〉가 출판되었다.[다음 백과]


[정보]책-제국의 품격 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