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下
'종이 한 장에 열 줄 받아 적으면 여백이 없을 만큼(一札十行小無一毫之餘蘊)'(1779년 11월 12일 '정조실록') 말이 많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 많은 군주였다.(박현모, ‘정조의 지식경영 연구’, 숙명리더십연구, 2006) 그 말을 줄이면 이러하다. "선왕의 옳은 말씀이 아니면 노자·석가·제자백가 모조리 이단이다(異端云乎者 老佛楊墨荀莊申韓 凡諸子百家 而非先王之法言皆是也)."(1791년 10월 24일 '정조실록')'선왕(先王)'은 유교적 이상 군주 요와 순이니, 최고 권력자 입에서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이단이라는 선언이 나온 것이다.
승려가 만든 종이, 주자 말씀 담은 책
선비(士)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면 대부(大夫)가 된다. 대부가 될 선비와 선비였던 대부를 통칭해 사대부(士大夫)라 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입신양명의 수단은 학문이었고 시험과목은 성리학이었고, 입시 교재는 비쌌다. 임진왜란 전 필수과목인'대학'과 '중용'한 권 값은 상면포(常綿布·중질포) 서너 필이었다.(1529년 5월 25일'중종실록') 임란 후 군역 대신 나라에 바친 군포(軍布)가 연 2필이었고, 이를 감당 못해 달아난 자가 숱했으니 책값이 짐작된다.(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2013) 하여 일반 서민은 과거 볼 꿈을 접었다. 대부가 되는 꿈은 책 읽을 여유 있는 선비들이 꾸었다.
책 만들 종이는 사찰에서 생산했다. 지역(紙役), 종이 제작 노역은 가혹했다. 불경 잘 만든다는 사찰들에는 종이 생산 부역이 수시로 떨어졌다. 절 살림 맡은 사판승(事判僧)도, 공부하는 이판승(理判僧)도 고단하게 살았다. 이판사판, 지치고 쇠약해진 승려들이(1786년 7월 24일 '비변사등록') 다 도망가고 폐사된 절도 많았다. '중들이 모두 도망가 절이 텅 비었으니 그 해(害)가 백성에 미칠’(1670년 10월 7일 ‘현종실록’) 정도였다.(오경후,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 107집, 2005)
양산 통도사 또한 폐사될 위기에 빠졌다. 통도사는 1884년 주지 덕암당이 순찰사 권돈인을 설득해 지역을 면제받았다. 통도사는 이 '산 같고 바다 같은 은혜'를 기려 1884년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를 세웠다. 종이는 승려가 만들었고, 그 종이로 만든 책은 선비가 읽었다. 승려가 만든 종이 위에는 주자(朱子) 말씀이 적혀 있었다. 선비들은 주자를 '읽어야' 했다.
성균관 학칙 '주자학 외 독서 처벌'
임진왜란 직전 1582년 선조는 이이를 시켜 성균관 학칙을 정비했다. '학교모범(學校模範)' 3조는 '독서'다. 필독서는 소학, 대학, 근사록, 논어, 맹자, 중용, 오경과 사기(史記). 그리고 '성인이 짓지 않은 글은 읽지 말고 보탬이 없는 글은 보지 말아야 한다(非聖之書勿讀無益之文勿觀).'(이이, '율곡전서'15, '학교모범·學校模範') 아예 '보지 말라(勿觀)'고 했다. 203년 뒤 정조 9년(1785년)에 만든 성균관 학칙 '태학지(太學志)' 4조는 '노장, 불경 잡류와 백가자집 책을 끼고 다니는 자는 벌한다'고 규정했다.(강현구, '16세기 성균관 학령의 변화 연구', 2012) '처벌한다'는 것이다. 필독서를 특정하고 나머지를 금서(禁書)로 규정한 이 놀라운 정책이 망국 때까지 유지됐다.
지식 권력, 지식 독재
선비들은 독서 인생을 성리학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 필독서에는 세무, 국방, 사법, 보건 따위 각론은 적혀 있지 않았다. 선비들은 요순(堯舜) 시대를 이상 사회로 묘사한 중국 책을 읽으며 입신양명을 꿈꿨다. 많은 선비들은 사회에서 물러나 마음을 닦았다. 향교와 서원에는 대부를 꿈꾸는 선비들이 우글거렸고, 조정에는 꿈을 이룬 선비들이 우글거렸다.
당연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세상이 강림해야 했다. 그런데 1543년 백운동서원이 생긴 이후 조선 정치는 피투성이가 됐다. 선조는 나라를 버리려 했고 광해군은 동생을 죽였고 인조는 손자들을 죽였다. 칼과 총 대신, 지식인들은 지식 그 자체를 무기로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했다.
권력과 지식이 융합하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자기와 다른 지식을 가진 권력자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유교를 반대하는 자를 이르던 '사문난적(斯文亂賊·아름다운 글을 어지럽힌 도적)'이 조선에서는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하는 자'로 몰아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말로 쓰이게 되고 말았다.
1680년 남인 윤휴는 서인의 핵심이자 정적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찍힌 끝에 처형됐다. 윤휴는 "왜 조정이 선비를 죽이는가(朝廷奈何殺儒者云)"라 일갈하고 처형됐다.(이건창,'당의통략·黨議通略', 1884(?))
지식 권력의 완성체, 정조
정조는 학문을 사랑한 왕이었다. 태어나며 자연스럽게 얻게 된 권력에 학문까지 겸비했다. 당대 그 어떤 학자보다 넓고 깊은 지식을 소유한 최고 권력자였다. 18세기 중엽 지식권력사회 조선은 그 지식과 권력의 완전체를 통치자로 맞이한 것이다.
정조 13년 겨울 우의정 김종수가 말했다.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 신하들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 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언로를 열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傲然自聖 輕視群下之意 有以潛消其敢言之氣 此開言路之說也)."(1789년 11월 17일 '정조실록')
신하의 충언과 논쟁을 수시로 뛰어넘는 정조에게 던진 충고였다. 군주가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말이 너무 많다보니 그런 일은 수시로 있었다. 정약용도 정조가 만든 규장각 생활을 이렇게 비판했다. "어린학생처럼 때리며 생도 같이 단속한다(擊之如童蒙 束之如生徒). 문득 임금의 사인이 되어 버리니, 이 또한 좋은 법제가 아니다(便作人主之私人 此又法制之未善者也)."(정약용, '경세유표', '예관지속')
'거중기'는 기록에 남기지 말라
1785년 정약용 형제를 위시한 남인 집단이 천주교 책을 읽다가 적발됐다. 정조는 중국 서적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1788년 남인 피해를 우려한 정조는 이렇게 교시했다. "정학(正學)을 크게 천명한다면 이런 사설(邪說)은 일어났다가도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본다."(1788년 8월 3일 '정조실록') 1791년 천주교도가 조상 신주를 불태우자 정조는 주자학 외 일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일체의 중국 서적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국경에서 봇짐을 압수수색해 중국 책을 색출하고 조선 선비들에게는 명말청초(明末淸初) 문체(文體)를 금지했다. 양명학과 고증학적 내용도 문제 삼았다. 이 문체를 사용하거나 책을 읽은 노론 소속 관료 4명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이 문체로 과거 답안을 쓴 본 선비를 낙방시키고 유배를 보냈다.(1792년 10월 24일 ‘정조실록’ 등)
그리고 규장각 관료 이덕무와 박제가를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이들 문장을 좋아하는 줄로 아는데, 이들의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배려하는 것뿐. 나는 이들을 배우로 기른다(予實俳畜之)."(홍재전서, '일득록' 5, '문학' 5, 1797) '일성록'에 따르면 이 말은 1792년 11월 6일 어전회의에서 나왔다. 박제가와 이덕무가 서얼 출신이라 배려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책 읽는 바보(看書痴·간서치)'라 자칭했던 소심한 이덕무는 광대 취급받았다는 말을 듣고 두 달 뒤 죽었다.
'異學의 禁'과 코페르니쿠스
1790년 일본 에도 막부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채택하고 타 학문 금지령을 내렸다('간세이(寬政) 이학(異學)의 금(禁)'). 야마모토 기타야마(山本北山) 같은 개방파 5명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간세이 다섯 악마(寬政五鬼)'라 불렸지만 아무도 처형당하지 않았다. 1811년 막부는 네덜란드어 번역청 '번서화해어용(蕃書和解御用)'을 설립해 서양학문 난가쿠를 다시 허용했다. 번역청은 훗날 도쿄제국대학이 되었다. 1793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어 통역가 모토키 료에이(本木良永)가 대중 천체 안내서 '신제천지이구용법기(新制天地二球用法記)'를 펴냈다. 료에이는 100쪽이 넘는 책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설명했다.
1850년대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펴냈다. 첫 장에 이규경은 '십이중천변증설(十二重天辨證說)'을 소개하며 유럽 천문학이라 했다. 십이중 구 천은 코페르니쿠스가 폐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었다.
빛 보지 못한 실학(實學)
1796년 수원 화성이 완공되고 신하들이 그 기록을 남기자고 청했다. 특히 공기(工期) 단축과 비용 절감을 이룬 획기적인 기술, '거중기'를 왕의 문집 '홍재전서'에 싣자고 했다. 거중기는 정조가 청나라에서 은화 2000냥을 들여 사온 '고금도서집성'에서 도르래 원리를 적은 '기기도설'을 골라 정약용에게 직접 알려준 기술이었다. 정조는 불허했다. "공예(工藝)의 말단에 불과하니, 어찌 후세에 남겨줄 만한 것이겠는가(此不過工藝之末).” 거듭되는 청에도 정조는 허락하지 않았다.(‘홍재전서’ 177, ‘일득록’ 17, ‘훈어’ 4)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는 1934년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처음으로 햇빛을 봤다. 정조 당대에 소위 '실학자'의 저술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학문은, 그러했다.
1906년 고종 "성균관을 부활시켜라"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나라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대한제국은 누더기가 됐다. 5개월 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학부에 명을 내렸다. "책을 끼고 다니며 공부하는 선비들을 보기가 드물다고 하니 대단히 안타깝다. 시급히 (성균관) 건물을 수리하고 특출한 인재들을 불러다가 교육하여 뛰어난 선비들을 집결시킴으로써 도를 빛나게 하라.”(1906년 4월 15일 ‘고종실록’) 다스려야 할 나라는 어찌됐는가. 제가는 했는가. 아니, 수신(修身)은 했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0/20190320003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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