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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 갑자사화 때 효수형 당한 태종의 증손]이총 [李摠]

Bawoo 2020. 2. 15. 22:24


[李摠] ?~1504년(연산군 10)


조선전기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에 연루되어 등에 연루된 왕족. 종실.

개설: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구로주인(鷗鷺主人)·월창(月牕). 태종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이다. 이종은 온령군(溫寧君) 이정(李裎)[원문은 이정(李䄇)]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으며, 생부는 온령군의 동복동생인 근녕군(謹寧君) 이농(李襛)[원문은 이농(李禯)]이다. 이총의 첫째 부인은 평양조씨, 둘째 부인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인데, 의령남씨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딸이다. 어려서 무풍부정(茂豊副正)에 제수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강경서(姜景敍) 등과 교유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효수형을 받고, 아버지 우산군과 형인 용성부정(龍城副正) 이간(李杆)과 동생 한산정(韓山正) 이정(李挺), 화원부정(花源副正) 이간(李揀), 청양부정(靑陽副正) 이건(李揵), 금천부정(錦川副正) 이변(李抃) 등은 남해의 섬으로 귀양갔다가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에 함께 사사되었다. 이들을 이른바 7공자라고 부른다.

남효온·홍유손(洪裕孫) 등과 함께 청담파의 중심인물로서 시문·음률·서예에 뛰어났으며, 양화진에 집을 짓고 고기잡이로 유유자적하였다. 시조 일부가 전한다.

1506년(중종 1) 무풍도정(茂豊都正)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숙종 31) 정려를 받았고, 1738년(영조 14) 무풍군(茂豊君)에 가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 『추강집(秋江集)』
  •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 『허암유집(虛庵遺集)』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암 무풍군 이총 사우 및 유물 일괄

장암 무풍군 이총 사우 및 유물 일괄
대한민국 부여군향토문화유산
종목향토문화유산 제140호
(2018년 10월 31일 지정)
수량일괄
관리전주이씨 무풍공파 종회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98-3 외


암 무풍군 이총 사우 및 유물 일괄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에 있다. 2018년 10월 31일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40호로 지정되었다.[1]

지정 사유

무풍군 이총은 조선 태종의 증손으로 조선 전기 4대학파 가운데 청담파의 지도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을 당한 후 중종때 신원되어 여러 차례 증직, 증시되었는데,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현재 무풍군 이총 사우에 잘 보존되어 있다.

무풍군 이총을 모신 사우 내에는 사당을 비롯하여 재실, 정려, 삼문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무풍군 이총과 관련된 유물은 기록 자료들로서 교지(4점)와 정려현판(3점), 그리고 무풍군 이총이 직접 썼다고 하는 간찰 1점이 있다. 이 중 교지나 간찰 등 고문서의 경우 최소 1백여년에서 최대 550년까지 연대가 추정되고 있는 진품으로서 그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