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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운동가, CIA 요원, 우리나라에도 깊이 관여한 인물]고다마 요시오

Bawoo 2020. 5. 18. 22:05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을 당시 고다마 요시오.


고다마 요시오(일본어: 児玉誉士夫, 1911년(메이지 44년) 2월 18일 ~ 1984년(쇼와 59년) 1월 17일)는 일본의 극우 운동가이자 CIA 요원이었다.[1][2][3] 폭력조직 금정회(후의 도천회)의 고문이었으며[4]정재계의 흑막’(政財界の黒幕), ‘해결사’(フィクサー, fixer), ‘우익의 거괴’(右翼の巨魁)라고 불린 거물이었다.

생애[편집]

어려서 불우하게 살다가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에 건너가 경성산업전문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돌아와서 초국가주의자가 되어 현양사도야마 미쓰루 밑에서 배웠다. 여러 우익단체를 전전하다 국회 삐라살포 사건, 이노우에 준노스케 장관 협박사건을 일으키고 투옥되었다. 1932년에 석방되자 만주에 건너갔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항공대에 물자를 납품하면서 각종 스파이 활동을 했다. 1946년A급 전범 용의자로 연합군에 체포되었으나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1948년에 석방되었다.

1950년대에는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소위 G2)과 야쿠자 조직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서 폭력단으로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총리대신의 임용 등에도 간섭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며,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연정 결과 거대 공룡정당 자유민주당이 탄생할 때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정치권의 흑막으로 군림했으며, 1960년대에는 야쿠자들을 동원해 아이젠하워 방일을 반대하는 안보투쟁 투쟁원들을 와해시킬 음모를 꾸몄다.

또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와도 만주 시절 인맥을 쌓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도 세지마 류조와 함께 적극적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뒷세계의 큰손으로 군림하던 고다마는 마침내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탈세 및 외환법 위반으로 기소당했고, 1984년에 자신이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뒤 발작으로 사망했다.

같이 보기

  • 흑막
  • 사사카와 료이치
  • 기시 노부스케
  • 록히드 사건
  • 마에노 미츠야스 - 록히드 사건 당시 코다마에게 천벌을 내리겠다며 경비행기를 몰고 코다마 저택에 자폭한 포르노 배우. ‘최후의 카미카제’라고 불렸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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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떤 사람인가?[편집]

    일본 극우진영의 전설적인 브로커. 후쿠시마현 출신이다.

    전전(戰前),전후(戰後) 일본 정치계의 브로커(세지마 류조처럼)로 유명한 사람이다. 말그대로 어둠의 해결사. 야쿠자들과 긴밀한 관계로 금정회의 고문이었는데 나중에 일본 3대 야쿠자인 이나가와 카이로 변신한다. 일종의 반달과 같은 사람으로 야쿠자와 우익 정치계를 연결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은과 금에서도 이름만 짧게 등장한다. 이자와 의원이 히라이 긴지와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자네가 헤이세이의 코다마라고 들었다며 언급.

    2. 극우 정치깡패[편집]

    원래는 공산주의를 공부한 적도 잠깐 있다고 하지만 곧 도야마 미츠루[1] 밑에서 배우면서 국가주의(반공주의)를 습득했다. 이후 도야마 미츠루가 고문으로 참여한 건국회[2]에 가담하면서 '쇼와 천황 직소사건'을 일으켜서 처음으로 투옥된다. 반년간의 투옥 생활 이후에는 더더욱 급진파가 되어서 이번이는 건국회도 탈퇴하고 이번에는 더더욱 급진화 되어서 사사카와 료이치가 주도한 국수대중당에 가입했다.[3] 국회에서 삐라를 뿌리고, 이노우에 쥰노스케[4] 협박사건을 일으켜서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한 뒤에는 도야마 미츠루의 아들과 함께 당시 수상과 장관을 암살하고 황도파 군인들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투옥.

    그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전부터 외무성 정보부의 인맥을 통해서 일본제국 해군의 후원하에 정보기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와 인맥,기술을 쌓아갔다. 상하이에서 텅스텐이나 라듐, 코발트 등의 전략물자를 구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텅스텐 구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헤로인을 수출했다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패전 이후에는 자금줄이었던 일본제국 해군에는 완전히 입씻고 자신이 몽땅 챙겨서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돈의 일부는 일본민주당[5]의 창당자금으로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먹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도조 히데키와 달리 사형되지않고,기시 노부스케랑 함께 살아남았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과거 일본제국의 핵심이었던 우익정치권과 군조직을 밀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냉전이 본격화되자 다시 반공으로 넘어가는 역주행 과정에서 CIA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풀려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에는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일명 G2)와 야쿠자 조직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서 폭력단으로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총리대신의 선출에도 간섭할 정도로 세력이 커져서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대연합으로 거대 공룡정당 자유민주당(일본)이 탄생에도 관여하면서 정치권의 흑막으로 군림했다. 1960년대에는 야쿠자들을 동원해 아이젠하워 방일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을 와해시킬 음모를 꾸몄다. 이 당시 코다마와 죽이 맞았던 대표적인 정치인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였다.

    3. 록히드 사건[편집]

    1977년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등과 함께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다. 흑막이라서 잘 드러내지 않지만, 워낙 여파라든가 규모가 커서 당연히 조사를 받을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를 숭배한 마에노란 배우 겸 아마추어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그의 집에 자폭(카미카제) 을 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 코다마 요시오는 살았다(...) 일본 극우들은 배신을 해서 그를 감옥에 보내야한다고 집회를 했다. 참고로 동성회의 보스인 정건영[6]그와 관련이 있었다.

    4. 한국과의 관계[편집]

    코다마와 한국의 관계는 비교적 초년부터 시작된다. 코다마 요시오가 어린 시절 서울에 있던 친척에게 맡겨져서 경성상업전문학교[7]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다마 요시오가 다시 한국과 연결되는 것이 국교정상화이다. 한국의 박정희와 야쿠자 정건영 그리고 일본의 통칭 지한파라는 기시 노부스케, 코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등의 인맥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뤄내게 된다. 친일파 이런거 보다는 아주 넒게 보면 아시아주의의 영향도 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돈이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이 넘어갔고, 이 돈을 먹기 위해서 일련의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다마 요시오는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받았다. 참고로, 기시 노부스케는 1등급 광화대장이었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이렇게 코다마 요시오가 한국정부에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이 코다마 요시오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제외하면 김종필의 형 김종락, 석정선, 김용태 등 상당수가 김종필 계열 인물들이었다. 코다마를 통해서 김종필을 박정희의 차기로 올리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물론 코다마는 그런 것까지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알렸다. 당연히 이 사실에 분노한 박정희가 김형욱을 시켜서 도청하게 한 결과 위의 3인방은 모두 숙청된다. 이것이 유명한 JP불충사건, 혹은 노골적으로 코다마 불충사건이다.

    참고로 통일교의 총재인 문선명도 이 사람과 사사카와 료이치[8]와 관련이 있다.

    방위산업체이기도 한 포스코 금속이 설립될 때에도 고다마의 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많다.

    5. 사망[편집]

    1984년에 자신이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뒤 발작으로 사망했다.

    6. 그를 모델로 한 소설[편집]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짐승의 길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 코다마를 모델로 해서 만든 정계의 흑막 캐릭터가 나온다.

    7. 같이보기[편집]

    [1] 일명 두산만(頭山 満). 아시아주의의 대표격인 인물이고, 일본 국가주의자의 상징중 하나이다. 을미사변의 배후이자 경술국치의 뒤에서 활약한 것으로 손꼽히는 겐요사의 창시자이고,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이나 손문을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흑룡회라고 해서 일본 우익 야쿠자 조직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시아주의 항목에서는 이 사람을 이상주의자로 이론도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을 뿐이라고 언급하고 대동아공영권 이론에 휘말리면서 이론이 변질되었다는 식으로 적혀 있는데, 이 사람도 극우파이고 일본중심 병합을 선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흑룡회건국회이다. 그나마 유사한 정치인이라면 이토 히로부미.[2] 도야마를 고문으로 밀어낸 회장이 누구냐면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이다. 이 사람은 텐노는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학설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로운 학풍으로 등장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갖추고 있으며, 법인으로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가지고, 텐노는 그 최고 기관이다'라는 상식적인 텐노 기관설을 아작내버린다. 당시 일본이 실제로는 수상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면서도 명목적으로는 신권정치가 된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 먹혔기 때문이다.[3] 역시 A급 전범이고, 기시 노부스케와 친분이 있었다. 경정 사업으로 번 돈을 갖고 '일본선박진흥회'란 비영리 재단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일본재단'이다.[4] 당시 내각이었던 제 2차 와카즈키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자면 재정경제부 장관 격. 참고로 이 사람 1932년 우익들에게 대로에서 암살당했다.[5]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당. 1955년 역시 같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합당해서 지금의 자민당이 되었는데, 이것이 55년 체제의 시작이다.[6] 마치이 히사유키[7] 이 곳이 바로 박노준으로 대표되는 야구 명문고 선린상고, 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의 전신이다.[8] 1899~1995. 1963년 T교 재단의 일본지부 고문. A급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UN평화상을 수상[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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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8

    주인공들과 회담을 성사 시키는데, 그들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 세지마 류조, 고다마 요시오다. 기시 노부스케 도조히데끼의 내각에서 승승장구한 인물로 스스로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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