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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 시기 문신] 풍당(馮唐)

Bawoo 2020. 6. 26. 21:12

풍당

풍당은 한나라 안릉(安陵) 사람으로, 문제(文帝)때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나 중랑서장(中郞署長)이 되었다. 흉노의 침탈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문제에게 군주의 올바른 형정을 진언해 가납되기도 했으나, 좀체 승진하지 못하였다. 무제가 즉위한 뒤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지만 이미 나이가 90세를 넘겼기 때문에 대신 그의 아들 풍수(馮遂)가 낭(郎)으로 채용되었다.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풍당(馮唐)의 조부는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은 대(代)나라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漢)나라가 흥기한 후에는 다시 안릉(安陵)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풍당은 당시에 효행(孝行)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서 중랑서(中郎署)의 장(長: 낭관)으로 천거되어 문제(文帝)를 섬겼다.

한 번은 문제가 수레를 타고 풍당이 재직 중인 중랑서를 지나갈 때 풍당에게 물었다. “노인은 어찌해서 그 연세에 아직까지 낭관(郎官)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가? 사는 집은 어디인가?"

풍당은 모두 사실대로 대답했다. 문제가 말했다. “짐이 대(代) 지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짐의 상식감(尙食監) 고거(高袪)가 자주 짐에게 조나라 출신의 장수 이제(李齊)의 현명함을 거론하면서 거록성(鉅鹿城) 아래에서 악전고투했던 정황을 들려주었소. 지금도 짐은 식사를 할 때마다 문뜩 이제가 거록성에서 악전고투했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합니다. 노인도 이제라는 장수에 대해 알고 있는가?”

풍당이 대답해 말했다. “이제라는 장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란 장수가 병졸을 통솔한 것보다 못합니다.”

황상이 물었다. “무슨 때문인가?” 풍당이 말했다. “신의 조부가 조나라에 있을 때 사병을 통솔했던 장수로 있었는데, 이목과 절친했던 사이였습니다. 또 신의 부친이 예전에 대왕(代王)의 재상을 지낼 때에 조나라 출신의 장수 이제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풍당에게 염파와 이목의 사람됨에 대해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치면서 말했다. “아! 짐만이 염파나 이목과 같은 인물을 장수로 삼지 못했도다. 만약에 짐이 그런 장수를 얻었다면 설마 흉노(匈奴) 때문에 노심초사하겠는가?”

풍당이 말했다.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설사 염파나 이목 같은 장수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임용하실 수 있는 도량이 없습니다.”

황상은 크게 노하여 바로 몸을 일으켜 궁궐로 돌아갔다. 한참 후에 풍당을 불러들여 꾸짖어 말했다. “공은 어찌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짐에게 모욕을 주었는가?”

풍당은 사죄하며 말했다. "신은 비루한 사람으로 꺼리어 피하여 숨길 줄 몰랐습니다.”

이때에 흉노가 대거로 조나현(朝那縣: 지금의 영하성 고원시(固原市) 동남쪽에 위치함)를 침입해 북지(北地)의 도위(都尉) 손앙(孫卬)을 살해했다.

문제는 마침 흉노의 침입 때문에 노심초사를 했던 참이라 마침내 또 다시 풍당에게 물었다. “공은 어찌해서 짐이 염파와 이목 같은 장수를 임용할 도량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풍당이 대답했다. “신은 상고시대에 제왕이 장수를 출정시켜 전송할 때에는 제왕이 몸소 꿇어앉아 수레바퀴를 밀어주면서 당부하길 ‘곤내(閫內: 도성문 안쪽)의 일은 과인이 처결할 터이니, 곤외(閫外: 도성문 바깥)의 일은 장군이 통제하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군공을 세운 자에게 작위와 상을 주는 것은 모두 장군이 결정해 돌아와서 다시 조정에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빈말이 아닙니다. 신은 조부에게 이목은 조나라 변경에서 군대를 통솔할 때에 주둔하는 곳에서 거두는 조세를 모두 병졸들에게 상을 주는 데 썼고, 상을 주는 것은 장군이 밖에서 결정했으며, 조정안에서 간여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제왕에 장수에게 중임을 맡겨 그가 책임지고 성공하게 명령했는데, 이 때문에 이목은 비로소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남김없이 다 발휘했습니다.

이때에 전차 1천 3백대를 선발하고, 활과 쇠노를 잘 쏘는 기병(騎兵) 만 삼천 명,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금(百金)을 하사 받은 정예병사 10만 명을 파견했기 때문에 북쪽으로는 흉노 선우(單于)를 물아내고,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담림(澹林)을 멸했습니다. 서쪽으로는 강한 진(秦)나라를 억제하고, 남쪽으로는 한(韓), 위(魏) 나라를 지원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에 조나라는 거의 패업(覇業)을 이룰 뻔했습니다. 그 후에는 공교롭게 조왕(趙王) 천(遷)이 즉위했는데 그의 모친은 원래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던 천한 아낙이었습니다.

조왕 천은 즉위하자 바로 진나라 왕의 뇌물을 받은 간신 곽개(郭開)의 참소를 듣고 마침내 이목을 주살했으며 안취(顔聚)로 하여금 이목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이로 때문에 조나라 군대는 패주했고,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며 나라는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신이 개인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위상(魏尙)이 운중군(雲中郡) 태수(太守)로 있을 때, 그는 주둔지의 조세를 모두 다 병사들을 위해서 사용하여 배불리 먹이고, 또 사재를 털어서 5일마다 한 차례씩 소를 잡아 빈객, 군리(軍吏)와 시종들을 청해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로 때문에 흉노는 먼 곳에 피했고, 감히 운중군의 변방 요새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노가 일찍이 한 차례 침입한 적이 있었는데, 위상이 부대를 거느리고 출격했는데, 이때에 사살한 적군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대개 이때에 참전한 병졸은 모두 평민들의 집에 있던 자제들로서 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대에 입대했으니, 어떻게 ‘척적(尺籍: 군령과 군공을 기록한 문서)’, ‘오부(伍符: 군사가 서로 대오를 유지하는 수칙)’ 등의 군령을 알겠습니까?

그들은 단지 하루 종일 힘써 작전에 참여하여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들을 붙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막부에 전공을 보고할 때 한마디 말이라도 실제 정황과 부합하지 않으면 법관들이 법령을 인용해서 그들에게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들에게 마땅히 상을 주는 것은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했지만, 법관이 의법 조치를 취하는 것은 반드시 적용시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론 폐하의 법령은 너무나 엄격하고 빈틈이 없는 반면에 포상을 하는 것은 매우 인색하며, 징벌을 가하는 것은 너무 엄중합니다.

더불어 운중군의 태수 위상은 상부에 보고한 전공 중에 적군을 참수한 수급(首級)에 단지 여섯 명의 착오가 있었을 뿐인데, 폐하께서는 바로 그를 법관에게 넘겨 죄로 다스렸고, 그의 작위를 삭탈하여 1년간의 도형(徒刑)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말하건대 폐하께서는 비록 염파나 이목 같은 장수를 얻으셔도 중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참으로 우둔하여 꺼리어 피하여 숨길 줄 몰라 폐하께 무례를 범했으니,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문제는 기뻐했다. 그래서 당일로 풍당을 황제의 칙사로 임명해 위상을 사면하도록 하였고, 다시 위상을 운중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풍당을 거기도위(車騎都尉)로 발탁하여 중위(中尉)와 각 군(郡)과 국(國)의 전차부대의 병사들을 관장하게 했다.

전쟁도

고대 전쟁의 모습을 나타낸 벽돌 그림

한 문제 후원(後元) 7년(서기전 163년),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하자 풍당을 초(楚)나라의 승상으로 발령 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면직되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후에 현량(賢良: 책문을 통해 직언과 극간(極諫)을 잘하는 인재)이란 과거제도를 만들어 천하의 인재를 모집했는데, 이때 풍당이 천거되었다. 그러나 풍당은 그 때에 이미 90여 세가 되어 다시 관직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풍당의 아들인 풍수(馮遂)을 낭관(郎官)으로 임용했다. 풍수의 자(字)는 왕손(王孫)이고, 또한 기발한 인사였으며, 나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출처] 사기열전102-장석지(張釋之).풍당(馮唐) 열전|작성자 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