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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의 여섯 번째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Bawoo 2020. 9. 22. 22:15

Wang Guangmei, in 1949.

 

왕광메이(王光美(왕광미), 1921년 9월 26일 ~ 2006년 10월 13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 물리학자정치가이고 류사오치(劉少奇) 前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의 6번째 부인이며 중국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생애

일생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중화민국 허베이 성 톈진(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녀의 부군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제5국가부원수를 지내었고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중국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내었으며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를 지낸 류사오치(劉少奇)이다.

학력

결혼

그녀는 1948년 8월 21일류사오치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1969년 와 사별할 때까지 그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문화대혁명

문화방송 교양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왕광메이는 문화대혁명 때에 마오쩌둥 주석의 부인인 장칭에게 핍박을 받았다. 마오 주석은 학식이 있는 왕광메이를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에 도움이 될 일꾼"이라면서 아꼈는데, 장칭은 이를 질투하여, 문화대혁명 때를 틈타 미국 간첩으로 몰아 핍박했다. (12년간 갇혀있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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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으며 이중 마지막으로 결혼한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와의 관계가 가장 유명하다. 왕광메이는 본래 물리학도였으나 중국 공산당의 영어 통역원으로 활동하다가 류샤오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왕광메이와 류샤오치는 나이 차이가 상당했는데 왕광메이는 1921년 생으로 23살이나 차이가 났다.


류샤오치가 국가주석 직위에 오르자 그녀도 일종의 퍼스트 레이디 자격으로 활동하였는데 남편을 도와 외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치파오 외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광메이 역시 남편과 함께 문화대혁명 때 커다란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여기엔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의 개인적인 질투도 한몫 했다는 평가가 강하다. 왕광메이가 당했던 수모 중 유명한 사례가 바로 '탁구공 목걸이'. 왕광메이가 류샤오치와 함께 버마를 순방할 당시, 하얀 치파오와 당시 버마의 권력자인 네윈이 선물한 버마산 루비 목걸이를 착용한 왕광메이의 모습에 대해 외신들이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장칭은 이를 '부르주아적 패션'으로 트집을 잡았고, 홍위병들은 이를 빌미로 삼아 왕광메이에게 치파오와 하이힐, 그리고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게 한 뒤 맹렬하게 비난을 가했다.


왕광메이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4인방이 숙청 당한 이후 복권되었다. 이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으나 현실 정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사회 봉사 활동 등에 힘쓰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사이에는 1남 3녀의 자식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류위안(刘源. 사진 위에서 왕광메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인물)은 현재 인민해방군 상장이며, 총후근부 정치위원으로 군부 내의 반부패 정풍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시진핑 시대 중국 군부의 새로운 실세로 평가받고 있는데, 역시 문화대혁명 시절 고초를 겪었던 시진핑 주석과의 인연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말 류위안이 인민해방군에서 퇴역했다는 보도가 나온 상태다. 명목상 이유는 65세의 나이로 상장 계급상의 정년에 해당하고, 현재 추진되고 있는 중국의 병력 축소 및 조직개편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류위안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해방군 내 반부패 운동에 대한 군부 일각의 반발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 대신 류위안이 전국인민대표대회 등의 다른 요직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시진핑의 측근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류위안을 포함해 류샤오치의 자녀들도 문화대혁명 때 수모를 당해야 했다. 딸인 류아이친(劉愛琴)은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근무하다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류사오치가 왕광메이와 결혼하기 전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류윈빈(劉允斌)과 류윈뤄(劉允若)역시 홍위병에게 폭행당한 뒤 수감되었다가 류윈빈은 자살, 류윈뤄는 병으로 인해 출소했다가 병사했다. 게다가 이 자식들은 모두 홍위병들이 자신의 부모를 모욕하고 폭행하는 것을 보도록 강요받은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 스스로도 부모들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중 류윈뤄는 다른 이유로도 박해를 받았다. 류윈뤄는 소련에 유학하면서 현지의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류사오치는 아들의 연애가 자칫 외교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류사오치는 류윈뤄에게 중국 여성과 결혼할 것을 권고하며 여러 여자들을 소개해 줬다. 그러나 류윈뤄와 딱히 맺어진 여성은 없었고 계속해서 편지로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다. 여기까지는 류사오치 집안의 가족 문제일 뿐인데, 장칭과 홍위병들은 이를 꼬투리 잡아서 류사오치와 류윈뤄가 소련에게 국가 기밀을 누설한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웠다. 류사오치와 류윈러는 편지를 보내면서 항상 다른 당 간부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실과 편지의 내용을 신고했으며 소련 간첩이란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또한 류사오치가 류윈러에게 소개해 준 여성 중 한명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평생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다. [namu.wiki/w/류사오치 나무위키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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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g Guangmei (Chinese: 王光美; pinyin: Wáng Guāngmĕi; Wade–Giles: Wang Kuang-mei; 26 September 1921 – 13 October 2006) was a Chinese politician, philanthropist and the wife of Liu Shaoqi, who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from 1959 to 1968.

 

Early years

Wang Guangmei was born in 1921, and grew up in a distinguished and prominent Chinese family. Her father was a government minister and a diplomat; her mother was an educator. She studied French, Russian and English, learning to speak all three, and earned a degree in physics from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in Beijing. She also studied at an American missionary university, and was described as a sophisticated woman. In the mid-1940s, Wang Guangmei traveled to the Communist Party headquarters in Yan'an and served as an interpreter during efforts by the American statesman George Marshall to negotiate a truce between the Nationalist government and the Communist rebels. At this occasion, she gained the admiration of many Americans, which would later play a role in charges that she was an American spy.

There, at the age of 24, she met Liu Shaoqi, who was nearly twice her age and had previously been married on five occasions. For years she served as his secretary, and he was named a key deputy to Chairman Mao Zedong after the Communists took power in 1949. In 1959, Liu was named Chinese President, making him the second-most powerful man in the country.

First lady

After Liu became president in 1959, Wang became a very visible diplomatic companion to him. Wang Guangmei became once widely known in China as its beautiful, articulate, sophisticated first lady.[1] In the early 1960s, the couple traveled abroad on state visits to Afghanistan, Burma, Pakistan and Indonesia. In 1963, she joined a work team investigating corruption in the countryside, a mounting problem after the Great Leap Forward, Mao's development programme of 1958–61.

Cultural Revolution

Liu and his wife became targets of the Cultural Revolution, instigated by Chairman Mao. In mid-1966, when Red Guards erupted into prominence — and Liu and other leaders tried to fathom what Mao had in mind — Wang headed a work team to restore order among the students at Tsinghua University. The effort backfired when she came under attack by a militant opponent who accused her of being a counterrevolutionary. Her husband was also under fire by Mao and his deputies for being the leading "capitalist roader".

Wang Guangmei's public role had antagonized Mao's wife Jiang Qing, who was growing politically ambitious. In April 1967, at Jiang's instigation, the Red Guards forced Wang to put on a tight-fitting qipao dress she had worn at a banquet in Indonesia, with silk stockings, high heels and a mocking necklace made out of ping-pong balls, as proof of her bourgeoise, counterrevolutionary attitude.[2][3][1]

Wang was put under house arrest, then imprisoned. Her four children were also punished. Imprisoned in Qincheng Prison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Wang was kept in ignorance of her family's fate. After four years, her children plucked up the courage to ask Mao for permission to see their parents. It was through Mao's terse consent, "their father is dead but they may see the mother", that Wang learned of her husband's death. Wang spent about 12 years in prison, and was released in 1979 — just before Mao's widow Jiang Qing and her Gang of Four, who were blamed for the excesses of the Cultural Revolution, were put on trial.

 

Soon, Liu's reputation was rehabilitated, and Wang received compensation for her suffering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In 1980, she appeared in court during the trial of the Gang of Four as a victim of Jiang Qing's prosecution. Later, Wang was elected a permanent member of the National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She founded the "Hope Project", a program aimed at aiding the poor throughout China. She even donated her family's valuable antiques, a few dating back to the Qing and Song dynasties, to charity.

Wang died on October 13, 2006, at the No. 305 Military Hospital in Beijing. Her funeral was held at the Babaoshan Revolutionary Martyrs' Cemetery in Beijing on October 21, 2006.

Family

Wang is survived by four children.

Her eldest son, retired Gen. Liu Yuan, was a prominent officer in the People's Liberation Army.

Her daughter Liu Ting graduated from Boston University and Harvard Business School, and is chairman and president of the Asia Link Group, consultants in corporate finance.[영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