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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동오):96세까지 장수를 누린 인물]여대(呂岱)

Bawoo 2021. 1. 9. 20:51

여대(呂岱, 161년 ~ 256년)는 후한 말기 ~ 동오의 군인으로, 정공(定公)이며 광릉군 해릉현(海陵縣) 사람이다.

생애

후한 말 시절

처음에는 현리에 있었다.

손권(孫權)의 막하에 있으면서 독군교위와 소신중랑장을 지냈다. 후한 말년에 교주자사로 있었다.

215년, 여몽과 함께 장사, 영릉, 계양 등을 공략하였다.

220년, 교주를 토벌하였다.

삼국 시대

황룡(黃龍) 3년(231년) 무릉의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245년육손이 죽은 후 상대장군이 되었으며, 252년에는 대사마가 되었다.

256년, 9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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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나라의 장수로 는 정공(定公), 광릉군 해릉현 사람이다.

96세까지 산 삼국지 최장수 인물 중 한 명.

삼국지연의에서는 딱 한번 지나가는 식의 서술로 나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대의 존재를 모른다.

2. 생애

2.1. 초창기, 형주 공방전

처음에 군,현리로 있었으나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오며 손권이 정권을 총괄할 때 막부로가 그를 알현해 오현의 승이 된다. 여대의 법률처리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손권의 마음에 들어 녹사의 일을 맡게 되었다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여요현의 장이 되는데 회계의 다섯 현에서 여합과 진량이 소란을 일으키자 여대는 독군도위가 되어 장흠과 함께 그들을 토벌해 다섯현을 안정시켜 소신중랑장으로 임명된다.

211년에는 윤이와 함께 한흥 건성으로가 장로를 유인하고자 하나 실패하고 212년에는 오나라로 돌아온다. 이때가 오범이 손권에게 유비가 촉을 얻을 것이라 주장했을 때로 여대는 촉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제에서 유비군을 둘러보고온터라 손권에게 병사의 반 이상이 죽어 촉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오범은 여대가 본 것은 사람의 일뿐이며, 자신의 주장은 인간의 도리라고 했으며 과연 유비는 촉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215년에 유비가 촉을 얻고 "양주(서량)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 같은 자세로 나오자 이에 분노한 손권은 여몽을 시켜 장사 등 세군을 공격하게 하며 여대는 여몽의 명에 따라 손무 등 십여 장수를 통솔해 형주의 세군을 공격해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들이 음산성에 들어가 저항하는 이들을 공격해 즉시 항복시켜 세 군을 얻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다시 오탕과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노숙을 시켜 공격하게 하며 여대는 예릉을 공격해 원룡을 붙잡아 참수해 이 공으로 여릉태수로 임명된다.

2.2. 교주 정벌

220년에 장사로 오게 된 보즐을 대신해 교주자사가 되어 교주에 도착하자마자 전박의 투항을 받아 자신의 세력에 더하여 울림의 이민족과 도적을 토벌하고 남해의 도적 왕금을 붙잡아 수도로 보내는 공을 세우고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부절을 받고 안남장군, 도향후로 봉해진다. 226년에 사섭이 죽었을 때 손권은 여대의 의견에 따라 교주를 광주와 교주로 나누어 교지태수에는 진시, 교주자사에는 대량, 광주자사에는 여대를 임명하는데, 이렇게 사섭 일가와 관련 없는 자들을 불러들여 자신들을 몰아내려는 것이 뻔한 일에 분노한 사섭의 아들 사휘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교지태수라 칭하고 대량을 따를 것을 주장하는 환린을 죽인 다음 해구를 지키는 병사를 동원해 대량과 진지에게 대항한다.

환린을 죽인 일에 분노한 환린의 형 환치와 그의 아들 환발이 사휘와 싸우나 이길 수 없자 강화하고 떠나는데, 이때 여대는 상소를 올려 사휘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고 3천의 군사로 출발하려고 한다. 그런데 옆에 있던 어떤 자가 사섭 일가가 교주에서 인망이 깊고 세력이 크니 서둘러 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자 여대는 적이 방비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한다고 대답한 뒤 밤낮을 항해하여 합포에서 대규모 군대와 합류하니 사휘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여대는 사일의 아들 사광을 사우종사로 임명해 군수의 자리만 해임하고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권하게 해 사휘는 형 사지, 동생 사간, 사송 등 여섯 명이 모두 웃옷을 벋고 몸을 드러내 영접하며 항복한다. 그러나 여대는 사휘가 항복하자 바로 그들의 앞에서 조서를 읽어 그들의 죄를 밝힌 뒤에 죽여 목을 무창에 보내고 그들의 또 다른 일족인 사위, 사일, 사광은 모두 나중에 출두해 죄를 용서받았지만 사일과 사위도 몇 년 후 법을 범했다고 주살해 버린다. 이 행위에 대해 손성은 뒷날 여대의 후손이 안 남은 것까지 언급하며 여대를 깐다(…) 반면 사휘가 환린의 간언을 무시하고 죽인 것 역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환린 항목 참조.

이 사실에 분노한 것은 역사가들 뿐만이 아니라 당대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손권 편에 서서 싸웠던 사휘의 부하인 감례와 환치가 반발하며 여대를 공격하지만 여대의 분투에 결국 패하며, 이 공으로 여대는 반우후가 된다. 이렇게 사섭 일가의 문제가 해결되자,[2] 설종과 함께 구진[3]까지 토벌해 수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남쪽에 세력을 크게 떨쳐 부남(캄보디아), 당명(라오스 남부), 임읍(베트남 남부)에서까지 손권에게 공물을 보낸 왕들이 늘어나자 여대는 진남장군으로 승진한다.

2.3. 형주 방위

231년에 남쪽 영토가 맑고 안정되자 설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대를 불러 장사 구구에 주둔하게 했으며, 마침 무릉의 소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준과 함께 진압했다. 234년에는 반장의 군대를 이끌고 육구에 주둔하게 했다가 후에 포기(적벽근처)로 임지를 옮긴다.

235년에 여릉의 이환, 노합과 회계의 수춘, 남해의 나려 등의 도적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자 유찬당자를 지휘해 시작하자마자 수춘의 항복을 받아 그를 토벌에 이용하며, 236년에는 유찬이 이환, 당자가 노합을 사로잡아 이들을 처형했다. 238년에 이들의 진압을 완료하고 육구로 돌아왔다.

손권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여대를 칭찬한다.

나려는 험난한 곳에 기대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머리가 잘리는 데로 이르게 되었고, 이환은 흉악하고 교활하며 이미 투항했었지만 또 모반했다. 앞뒤로 이들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여러 해 동안 붙잡지 못했다. 그대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들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대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절개는 이 일에서 더욱 빛났다. 원흉은 이미 제거되었고 크고 작은 도적들은 두려워 떨고 있으며, 그 나머지의 작은 무리들은 땅을 쓸 듯 소멸할 것이다. 오늘 이후부터, 국가는 영원히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을 것이고, 세 군은 안정되어 걱정하다 놀라는 일이 없을 것이며, 또 복종하지 않던 백성들을 얻어서 부세와 노역을 공급받게 되었으니, 깊이 찬탄하고 감복할 만하다. 상은 그 달을 넘지 않는 것이 국가의 통상적인 규정이다. 적합한 법령을 만들어 그대가 결정하라.

239년에 반준이 죽자 그를 대신해 형주의 공문서를 결제했으며, 육손과 함께 무창에 있으면서 포기를 다스리다가 요식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다. 손권은 그를 교주목으로 삼고 당자를 보내 여대를 돕게 했는데, 그는 1년 안에 요식과 비양을 참수하고 무창으로 돌아오니, 그의 나이가 이미 80을 넘었는데도 신체는 여전히 정력적이고 근면하면서도 직접 직무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장승이 "그대는 육손과 함께 주공단, 소공석[4] 급의 인물"이라며 칭찬을 한다.

2.4. 중앙에서의 말년

이궁의 변 당시에는 손패파의 일원이었으며 245년에 육손이 죽고 제갈각이 그 지위를 잇자 손권은 무창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여대에게는 우부를 맡겨 무창 상류로부터 포기까지 관할하게 하며, 246년에는 상대장군으로 승진한다. 252년에 손권은 그에게 어린 태자 손량을 탁고해 손량이 즉위하자 대사마로 승진했고, 256년 9월 16일에 향년 96세로 병사하자 아들 여개가 후사를 이었다.

그는 유언을 남겨 장례는 옻칠을 하지 않은 소박한 관으로 하면서 거친 두건과 마로 된 옷을 입어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도록 힘쓰라고 했으며, 여개는 모든 것을 유언대로 행하였다.

3. 기타

여대는 청렴한 몸으로 공무를 받들었으며, 지나친 곳마다 칭송할만한 업적이 있었다. 처음에 교주에 있을 때는 여러 해 동안 집안을 보살피지 않아 처자식들이 굶주리고 궁핍하게 되었다. 손권은 이 사실을 듣고 탄식했으며, 먼 곳에서 일하느라 집안을 못 챙겨 궁핍한 것도 챙겨주지 못한다면서 신하들을 질책하고는 여대의 집에 돈, 쌀, 베, 비단을 하사해 해마다 고정적으로 보내주었다.

생전에 서원이라는 자와 매우 친해 그를 천거해 서원은 시어사까지 승진했으며, 여대가 죄를 짓자 서원은 오히려 이 일을 간언하여 논쟁하고 또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했고 여대는 오히려 이것이 자신이 서원을 중시한 이유라고 하였으며 서원이 죽자 이제 자신의 허물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1] 유비와 동년이다.[2] 실제로는 헬게이트 오픈이었다. 오나라에 꾸준히 진상품을 보내며 6대째 교주를 다스리던 사씨 일족이 몰살당하는 것과 함께 교주 일대의 치안이 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반란도 수 차례나 더 일어났다.[3] 九眞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에 걸쳐 베트남의 하노이 이남, 탄호아 이북에 두었던 군.[4] 연나라의 시조인 주 왕조의 인물.[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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