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고종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저자 박종인 |
[소감]책 제목이 충격적이다. 아무리 나라 망할 때 왕이지만 매국노란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니까. 매국노 하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지칭하지 않는가. 그런데 저자는 고종을 매국노라 지칭했다. 자칫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이야기. 특히 전주 이씨 문중에서 가만히 있을 것인가? 책을 읽기로 결정하면서 저자의 책 파는 수단으로 이런 제목을 지은 게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땅의 역사"라는 뛰어난 평설을 쓰는 저자의 능력으로 볼 때 절대로 어떤 근거도 없이 단지 책을 팔기 위한 수단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책 내용은 고종을 신랄하게 깐다. 매국노라 부를 정도이니 잘한 점은 하나도 없다. 특히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이룩해 놓은 업적까지 깡그리 엎어버리면서 나라를 거덜 낸다는 내용은 뭐 이런 개 같은 군주가 있나 절로 욕이 나오게 한다. 저자가 고종을 매국노라 부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총 한 번 못 쏴보고 나라를 통째로 넘기면서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나라 망한 뒤 일본군에 복무하던 이우 왕자만 반일 활동을 하려다가 원폭에 희생됐고 나머지 왕족들은 일본 귀족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다. 어쨌든 이 책도 이영훈의 책 "반일종족주의"처럼 논란이 되지 않을 까 싶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중,고를 다니던 60년대의 역사 교육은 일제하 조선사 편수회에 뿌리를 둔 식민사학자가 만든 책으로였으니까.
[2021. 2. 9]
[덧붙임]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란 책을 반박한 "일제종족주의"란 책 제6장 고종의 항일투쟁사 그리고 수난사 - 김종욱"에 고종이 개혁군주란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에 "매국노 고종"이란 책이 위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면 박 기자가 몸 담고 있는 "조선일보사"가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신문을 발행하는 현실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가히 충격적이다. 조선 왕조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는 내용인 "땅의 역사"란 명평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반만족 행위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조선일보의 뿌리가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던 인물 -방응모-이고 그 후손이 대를 이어 보수층의 여론을 앞장서서 이끌며 경영하고 있으니 말이다.(2020. 7. 7)
아래는 책 내용을 요약한 자료와 반론 자료 그리고 저자가 직접 출연한 대담 내용 자료.
1. 요약 자료:박 기자의 견해를 그대로 전달한 내용.
부패한 정권, 무너진 국방, 폭증하는 세금, 고통받는 백성…. 만가지 악의 근원, 이것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매국노 고종의 진면목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상을 치를 돈조차 없는 나라. 철종이 죽고 새 왕이 등극한 사실을 청나라 황실에 알려야 하는데, 그 사신을 보낼 경비조차 없어 쩔쩔 매는 나라. 부국(富國) 대신 자기 금고를 채우기 바쁘고, 강병 대신 그에 써야 할 국가 자원을 국왕 개인의 호기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소모한 나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살벌한 제국주의 시대에 이런 왕조, 이런 국가가 존재했다면 모진 세상의 풍파에 생존이 가능했을까?
지금까지 국뽕 역사학자들의 선동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고종은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스러진 선하고 가련한 황제이자 자주독립을 기원한 개혁군주, 비운의 망국 군주 이미지다. 그의 아내 명성황후는 “나는 조선의 국모(國母)다”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다 처참한 최후를 맞은 위대한 근대형의 여성정치가요, 가련한 왕비로 추앙받는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았다고?
불행하게도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그와는 정 반대의 고종 모습이 나타난다. 그 충격적 결과물을 담은 무시무시한 책이 드디어 세상에 등장했다. 『매국노 고종』이란 책 제목부터다 도전적이고 파격적이다.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로서 조선일보에 「땅의 역사」를 연재 중인 박종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고종이 매국노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조작된 신화가 신앙으로 변하고, 종교로 변해 사실로 굳어지기 전에 조작을 폭로하기 위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나라를 팔아먹은 고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파헤친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 표지.
그가 밝혀낸 고종의 모습은 전율에 가깝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고, 근대화에 뒤쳐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저자 박종인이 말하는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요,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자다. 진짜 ‘매국노’는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라는 것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일 풍경을 담 너머로 자세히 지켜본 사람이 주한 미국공사관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명령권자가 고종이며, 자신이 명령한 사실을 속이고 또 속이고 있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하고 최하급인 황제(고종)는 국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황제는 외부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일본 지시에 따라 을사조약 반대한 한규설 파면한 고종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참정대신 한규설이었다. 조약 체결 후 고종이 내린 첫 조치는 한규설이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면서 파면한 조치였다.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 인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충고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황제 고종이 고분고분하게 일제의 명령을 따라 조약 체결에 반대한 사람을 파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기밀비 10만 원을 내탕금(황실 자금)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10만 엔 중 2만 엔이 황제 수중에 납입되었다. 당시 2만 엔이면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25억 원이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조선 전역을 군사부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협정이었다. 3월 20일, 일본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이날 이토 대사는 고종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제공했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 보장 및 향후 경의선 지분 보장을 확약을 했다. 경부선은 건설 당시 일본 로비스트인 다케우치 츠나(竹內網)가 경부철도회사 주식 1,000주와 5만 원을 황실에 헌납하고 진행한 공사였다. 그 지분을 보장한 것이다. 이래도 나라를 팔아먹은 원흉이 이완용과 을사오적이라고 우기겠는가?
이것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후 일본이 주는 세비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즐겼던 고종의 얼굴이다.
고종, 무당과 박수에 의지해 나라를 통치하다
1882년 이태원과 왕십리의 가난한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불러 난을 진압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반란을 진압해야 했을까? 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없었는가? 고종이 없애버렸다. 군인이란 군인은 국왕과 왕비가 살고 있는 창덕궁과 덕수궁 호위부대로 돌려버렸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 대한제국의 나라 빚이 1,300만 원이었다. 그 해 나라 예산이 1,310만 원이었다. 한 나라 예산에 맞먹는 빚은 어쩌다 생겼을까? 국왕 고종이 돈을 물 쓰듯 했기 때문이다. 어디에 썼는가? 독일제 철모 사고, 박력 있게 포성 내지르는 개틀링 기관총 사고, 자기 생일날 예포를 쏠 고물 상선을 순양함이라고 속아서 사고, 생일상에 올릴 프랑스제 식기를 사는 데 썼다. 돈이 모자라는 줄 모르고 무당굿을 하고, 한강의 용왕에게 먹이기 위해 몇백 석 밥을 지어 물고기 먹이로 내던졌다. 무당과 박수에 의지해 통치한 국왕이 바로 고종이었다.
군사가 사라지고 곳간은 텅 비고, 썩은 내 팔도에 진동하는 그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외국 공관으로 일곱 번이나 도망갈 궁리를 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해 살던 1년 동안 주요 국가 재산 다 팔아치우고 자기 왕좌를 보전한 사람이 고종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주인공은 매국노 이완용과 을사오적이 아니라 명령자인 고종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월계관을 써야 할 자는 고종인데, 이완용이 그 오물을 다 뒤집어 쓴 것은 훌륭하신 국뽕 역사학자들의 역사 사기극 덕분이다.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망국 과정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한 사람은 구한말 이 땅에 주재했던 서양 외교관들이다.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열강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망국의 제1원인으로 고종의 무능한 통치, 부패한 정부를 꼽았다. 무능 부패한 황제와 정부로 인해 독립·자치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1896년 10월 주한 영국공사관 총영사로 부임, 1898년 3월 대리공사로 승진하여 한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조던은 본국 정부에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 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오죽했으면 러일전쟁 당시 AP통신 전쟁특파원으로 활동했고, 서울·선양주재 미국 부영사 및 총영사를 역임했던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구제가 불가능한 국가다. 고종은 열강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고,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익(私益) 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을 포기하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수용해야 한다”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을 비판했겠는가.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을 출간한 저자이자 현직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 저자 박종인은 국뽕 역사학자들이 '개혁 군주'라고 가짜 신화를 창조해낸 고종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쳤다.
일본이 경악할 정도로 나라 파는 일에 적극 협조한 왕공족들
1910년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긴 고종과 그 아들은 대일본제국의 왕공족(王公族)으로 편입되었다.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순종은 창덕궁 이왕(李王)에 책봉되었고,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경성에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여 조선 총독의 감독 하에 두었다. 왕공족은 경성에 본저(本邸)를 도쿄에 별저(別邸)를 두었다.
원래 나라가 망해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군주들은 이집트, 베트남처럼 평민으로 강등되고 재산을 박탈당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달랐다. 일본은 폭력수단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조선 인민들의 복종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실을 보전하고 그들을 예우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왕공족들은 총독부의 고위 관리들이 경악할 정도로 통치권을 일본에 넘기고, 일본 천황의 통치를 받도록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왜 그랬을까? 나라의 주권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일에 왜 그렇게 열성적이었을까?
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은 천황가의 일원인 왕공족으로 환골탈태하여 극도의 예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것이었다(이왕무, 「대한제국 황실의 분해와 왕공족의 탄생」, 『한국사학보』 64호, 2016). 옛 궁내부를 대신한 이왕직(李王職)이 왕공족 재산과 신분을 관리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면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50만 엔, 이듬해부터는 180만 엔으로 올랐다(이윤상, 「일제하 조선왕실의 지위와 이왕직의 기능」, 『한국문화』 40호, 2007). 1911~1913 회계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이 5046만 9000엔이었으니(박기주, 「식민지기의 세제」, 한국조세연구원, 『한국세제사』 1편, 2012), 식민지 세출의 2%가 고종과 그 가족에게 투입된 셈이다.
1930년 9월 2일 자 총독부 자료 「이왕가 추가예산 설명」에 따르면 그해 이왕가는 유가증권으로 60만 7,778엔, 부동산은 논·밭·대지·임야 모두 합쳐 772만 6,091엔어치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매년 들어오는 세비가 150만 엔, 불시적인 행사에는 추가 예산이 투입됐다. 1921년 예산은 100만 엔이 늘어난 257만 3,425엔에 달했다.(김명수, 「1915~1921년도 구황실 재정의 구성과 그 성격에 관한 고찰」, 『규장각』35집, 2016)
너무나 안락하고 해피했던 망국 군주의 삶
병합 3주년을 맞은 1913년 8월 29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고종의 일상을 이렇게 전했다.
‘옥돌장(玉突場: 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女官)들을 함께 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한 때에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비운의 황제, 망국의 주인공은 일본 정부로부터 제공되는 막대한 세비를 받아가며 안락한 노후를 해피하게 보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족(蛇足)을 덧붙인다.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란 일본인이 일제의 한국병합을 기념하여 1910년 『한국병합기념첩』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일 병합이 다른 나라처럼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통한 강행이 아니라, 군주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었음이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대한제국처럼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넘긴 사례는 인류 역사상 지극히 드문 사례라는 것이다(이데 마사이치 지음·신동규 옮김,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조선사정」과 「조선사진첩」』,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2020, 37~38쪽).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해친 후 남이 해친다고 했다. 고종에 대해 더 궁금하신 점이 있는가? 그렇다면 박종인 기자의 『매국노 고종』을 사서 읽으시기 바란다. 전 국민이 이 책을 읽고 국뽕 가짜 역사의 최면에서 깨어나는 날 대한민국의 근대혁명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성기웅 기자 skw424@pennmike.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
2. 박 기자의 주장을 반박한 내용: 구체성 면에서 부족하다. 기존 교육 내용에 입각한 글
역사적 사실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고종을 '매국노' 해석 동의 쉽지않아
우리는 기시감 가득한 위기국면서
'경험 못해 본 나라' 꿈꾸다 말지도
경험했지만 성공 못한것부터 극복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
언제부터인지 정치인들이나 언론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신채호, 박은식, 윈스턴 처칠 혹은 미국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러가 말했다지만 별 근거도 없고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화두로 삼는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흔히 우리 국가 혹은 민족의 잘못된 과거를 잊지 말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달리 우리가 타국 혹은 타민족에게 당한 치욕이나 수모를 기억하고 반드시 되갚아주자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왜 치욕과 수모를 당했는지 그 배경과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어 우리 스스로의 잘못이나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되갚아 주기보다 되풀이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최근에 '매국노 고종'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서적이 출간되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근대를 열어가는 '개혁군주'였고, 강대국들이 각축하는 한반도에서 조선을 지켜내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적인 반일의병투쟁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했던 민족 투사였으나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결국은 독살된 '비운의 황제'에게 이러한 제목은 사실을 왜곡하는 불경스러운 호칭이었고 민족주의적 교육과 정치담론에 익숙한 사람들을 극도로 경악시켰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고종은 목숨을 걸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투쟁한 지도자였고, '을사오적'과 같은 친일 정치모리배들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팔려 나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주독립에의 열의를 북돋우고 국민들의 감성을 감싸 안았지만 그 스토리의 중간중간에 생략, 비약 그리고 비이성이 너무 많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고종을 암군이자 매국노로 해석하는 입장에 손을 들어주기란 쉽지 않다. 국제정치외교에 무능했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백성을 학살하고, 혁신을 거부하고 개혁세력을 몰살했다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드러남에도 여전히 그렇다. 이럴 때면 이른바 '하인리히의 법칙'이 떠오른다. 하나의 대형참사가 발생하기까지 인명피해가 없는 300건의 사고에 이어서 29건의 경미한 부상 사고가 선행한다는 이론이다.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사적 대형참사가 고종이나 을사오적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사적 이익의 추구에서 곧바로 발생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의 수준과 역량이 어떠했길래 고종의 실정이나 대신들의 탐욕으로 인해 곧바로 망국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의문스럽다.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이나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한제국의 멸망이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길고 다층적인 과정에 의해 조선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매국노 고종'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개혁군주 고종을 내세운 '일제종족주의'의 주장에 동의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논의들로 인해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온 조선 패망의 역사는 잊혀진 역사가 아니라 왜곡된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가산제적 황제전권국가에서 몇몇 대신들이 압박하여 황제가 을사늑약이나 한일합방에 동의하도록 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황제와 대신들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백성들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담합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고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의 강력한 발굽 아래 허약하지만 선한 국가와 황제가 짓밟히면서 근대로의 민족자존의 희망이 유린당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제국주의시대에 국가 간의 관계를 이념적 선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근대적 봉건국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자본주의적 계급갈등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한 민족에게 현실이 먼저 왜곡되기 마련이다. 앞서의 어떤 해석을 택하든 결국 우리가 어떻게 왜 망했는지 모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겉보기에 유사한 내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로 소비될 뿐이다. 결국 우리는 기시감 가득한 극적인 위기국면에서 엉뚱하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꿈꾸다 말지도 모른다. 우선, '여러 번 경험하면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위기'를 먼저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3. 저자와의 대담 내용
-------------------------------------------------------------------------------------------
[책 소개- 인터넷 교보문고]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하고 최하급인 황제는 궁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황제는 외부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 미국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
‘비운의 개혁군주’라는 위선과 허상을 고발하다!
대한민국은 현재 분노와 좌절로 가득하다. 사라진 리더십, 붕괴된 경제, 폭증하는 세금, 방향을 잃은 외교…. 우리의 현 상황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그런 21세기 역사의 한복판에 고종이 소환되었다. 그 이유는 쇠락을 거듭하다가 종말을 맞이한 구한말의 상황과 현재의 대한민국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비운의 개혁군주’로 불리는 고종은 유독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온 존재다. ‘진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하에 감춰진 역사 발굴 작업을 이어온 박종인 기자가 고종의 실체를 파헤쳤다. 오랜 시간 취재를 통해 국내외 막대한 사료와 기록들을 고증한 결과, 그가 직면한 것은 우리가 배워온 고종의 모습이 전부 허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랜 역사의 조선이 몰락을 거듭하다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던 이유 또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왜 고종에게 비극적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고종을 단호하게 ‘매국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지를 한 권의 책 《매국노 고종》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저자 : 박종인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소위 386세대 신문 기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전공했다.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 중이다. 〈TV조선〉에 같은 제목의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발굴해 바로잡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서재필 언론문화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 징비록》, 《박종인의 땅의 역사》1·2, 《여행의 품격》, 《기자 의 글쓰기》,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내가 만난 노자》,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고,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 《마하바라타》를 옮겼다.
목차
서문_누가 고종을 변호하는가
1부_장성 1864~1873
1장_아버지, 장성을 쌓다
대원군의 갑자유신 1864~1873
이양선의 시대 | 일본의 굴기 | 학정과 민란의 시대 | 흥선대원군의 개혁, 갑자유신 | 대원군, 군사력을 강화하다 | 대원군, 진영논리를 부수다 | 대원군, 만동묘를 부수다 | 대원군, 서원을 부수다 | 대원군, 삼정문란을 개혁하다 | 대원군의 장성 | 대원군의 실책: 경복궁과 당백전과 쇄국 | 조선을 바꿀 수 있었던 갑자유신
2장_아들, 장성을 부수다
고종의 친정 선언 1873
1864년 운현궁에 열린 두 개의 문 | 1873년 11월 4일 심야회의 | 폭풍 전야 | 청황제의 친정과 고종의 사전포석 | “모든 것을 원위치하시라”: 노론의 대반격 | 최익현의 직격탄: 대원군을 쫓아내라 | 노론의 깊은 뜻 | 심야의 반격과 대반전 | 결별
2부_출항하는 유령선 1873~1882
3장_병정놀이
고종 친위부대 무위소와 사라진 진무영
공인된 폭력, 병권과 금권 | 의문의 사건들과 고종의 복심 | 고종의 욕심: 친위부대 무위소 | “매번 이런 식이니, 황공하옵니다 그려” | 괴물로 변한 무위소 | 고종을 위한, 고종의 군사 | 무너진 장성, 진무영 | 1875년 8월 일본 군함의 포격
4장_돈놀이
청나라 돈 청전 폐지
공포영화 같았던 화폐개혁 | 권력을 위한 두 번째 공인된 폭력, 금권 | 대원군 지우기: ‘백성을 위하여’ | 1874년 1월 6일 청전 폐지령 내린 날 | 일주일 뒤 1월 13일, 드러나는 고종의 무능 | 나흘 뒤 1월 17일, 고종의 끝없는 고집 | 다시 사흘 뒤 1월 20일, 포기하지 않은 왕 | 후폭풍, 가난의 나락 | 무능과 무지와 이기심 | 사악함, 그 결과
5장_건달 놀이
우글대는 민씨들
1906년 국무총리를 거부한 여흥 민씨 민영규 | 지도자와 고종, 권력과 비전 | 되살아난 250년 전 밀약 | 도전받는 왕권과 권위 | 다시 지켜진 밀약1: 숭용산림과 노론 | 다시 지켜진 밀약2: 노론보다 더한 연맹, 여흥 민씨 | 민씨, 고위직을 장악하다
3부_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1882~1894
6장_“이미 주상께 5만 냥을 상납하였느니라”
부패
미친 호랑이 | 가난한 군인들의 반란, 임오군란 | 모든 민씨들을 다 죽인다: 진살제민 | 황현이 기록한 민씨들의 행각 | 직접 뇌물을 거둔 최악의 부패 군주 | 죄의식이 전혀 없는 부패 | 당오전 발행과 무명잡세의 부활 | 갈수록 가난해진 나라 | 갈수록 부자가 된 군주 | 망국으로 이끈 기생충들
7장_이 나라는 내 것이니라
갑신정변과 독재자 고종 1884
고종의 파트너 갈아치우기 | 노론 정권을 위한 이념, 척화론 | 노론 거두 김평묵의 척양론 | 이어지는 노론과의 악연 | 첫... 번째 반성문 “모두가 내 죄다” | 두 번째 반성문, 그리고 “또 말로만 그러시려고?” | 지켜지지 않은 반성 | 개혁과 본질적으로 무관했던 지도자
8장_개틀링으로 학살한 백성
1894년 동학혁명
대신 모두가 경악한 어느 어전회의 |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 결과 | 고종과 민영준, 합동으로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다 | 민영준과 원세개의 비밀회담 | 그들은 백성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 원로 김병시의 작심 발언과 벗겨진 고종의 가면 | 일본의 참전과 대학살 | 모두 사면된 민씨들과 조병갑
4부_잃어버린 태평성대 1895~1904
9장_갑오개혁의 좌절
반동의 시작
낭비당한 10년 | 500년 모순 청산을 노린 갑오개혁 | 반동의 조짐 | 반동의 시작 | 권력 회수 | 나라를 팔다: 아관에서의 1년 | 실록에 기록된 나라 판매 현황
10장_집을 세우다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제국의 건설 | 권력 독점의 완성: 대한국 국제와 독립협회 | 경제력 독점의 완성: 내장원 | 부활한 매관매직 | 부활한 무명잡세: 우뭇가사리에도 세금을 | 군사력 독점의 완성: 대한제국군 | 텅 빈 국고와 사라진 비자금 | 광무개혁의 허구: 황제를 위한 개혁 | 허세와 낭비: 궁궐 신축과 생일파티 | 망국의 징조와 예언 | 1905년 마지막 반성 | 비웃음 당한 황제
11장_집을 버리다
고종의 칠관파천七館播遷
파탄 난 나라와 도주하는 군주 | 청나라 군사를 부른 왕과 병조판서 | 청일전쟁과 미관파천 | 그 사이 영국으로: 영관파천 | 성공한 망명, 아관파천 | 1897년 두 번째 미관파천 | 러일전쟁과 무더기 파천 미수 | 무더기 파천 미수의 결과
5부_고물을 팔아치우다 1904~1910
12장_러일전쟁과 주합루
황천항해 1904~1905
좌절된 도주, 그리고 러일전쟁 | 소름끼치는 사진 한 장 | 잃어버린 10년, 고물이 된 나라 | 거제도 일본국 기념탑과 러일전쟁 | 러시아의 동방정책과 조선 | 북새통이 된 조선과 지도부의 무지 | 1904년 제물포와 1905년 거제도 | 일본군이 총살한 대한제국인, 일본군을 위문한 대한제국 | 황천항해
13장_황제가 기댄 그녀, 앨리스
1905년 9월, 을사조약 두 달 전
공주, 하늘에서 내려오다 | 1905년 5월 일본 황족의 한성 나들이 | 1905년 6월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의 부임 | 1905년 9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1882년 한미조약 거중조정 | 철석같이 미국을 믿은 고종 | 홍릉에 나타난 버펄로 빌 | 고종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14장_늙은 조병세의 죽음과 난파선의 쥐떼들
을사조약 전야
의관 안종덕의 상소 | 원로 조병세와 고종의 대화 | 나라를 고물로 만든 고종 | 난파선을 떠나는 쥐떼들 | “그물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15장_매국노 고종
1905년 을사조약과 뇌물 2만 원
엠마 크뢰벨의 기억 | 그 음울하고 비겁했던 풍경 | 상소한 자들을 처벌하라 | 황제가 받은 접대비 2만 원 | 뇌물 30만 엔과 경부선 지분 | 떡밥 150만 엔 | 을사오적의 상소와 고종의 묵묵무답 | “나가 죽으시라”
16장_도주쿠노미야 이태왕
헤이그 밀사와 왕공족
돌아오지 않은 밀사들 | 밀사들, 그날 이후 | 왕공족, 도주쿠노미야 이태왕과 쇼토쿠노미야 이왕 | 왕공족의 탄생 | 왕공족의 식민 일상
책 속으로
누가 고종을 변호하는가. 아니 변호도 모자라 누가 고종을 자주 독립을 염원한 개혁군주라고 찬양하는가. 고종 정권은 ‘냉정하게 직시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느냐의 싸움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고, 그 근대화에 뒤쳐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그때까지 조선왕조 400년이 병약하게 흘러왔지만, 그 병색을 걷고 그나마 회복될 수 있었던 기회를 고종은 다 발로 차버렸다. 오로지 자기 목숨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러니 고종은 매국노다. 고종이 매국노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작된 신화가 신앙으로 변하고 종교로 변해 사실로 굳어지기 전에 조작은 폭로돼야 한다.
-서문 중에
청나라공사 서수붕은 말했다. “청나라는 매관매직을 한 지 10년도 안 돼 천하가 큰 난리를 겪고 종사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은 매관매직을 하고 30년이 돼도 아직 옥좌가 건재하다.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면 어찌 그리 될 수 있겠는가.” 고종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부끄러워할 줄 모르자 서수붕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민은 슬픈 민족이다”라고 하였다.
-3부.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중에서
그렇게 긁어모은 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고종 주머니로 다 들어갔다. 그 황당한 거지 국가에서 국왕은 이상하리만치 부자였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시대에 옛 호조를 대신해 국가 재정을 담당한 관청이다. 이듬해인 1902년 탁지부가 국고에서 경운궁(현 덕수궁) 중건 공사에 돈을 끝없이 지출하는 와중에 그해 8월분 관리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탁지부는 내장원에 급히 은화 8만 원을 빌려 경비를 메꿨다. 그러자 내장원에서는 그해 세금이 징수되는 대로 즉각 상환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고종은 국가에 빌려준 돈을 언제라도 회수할 자세가 돼 있는 왕이었다. 마치 빚쟁이처럼, 고종은 국가에 빌려준 돈을 서둘러 상환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었다. 매천 황현은 “고종이 탁지부를 공물로, 내장원은 자기 개인 것으로 보고는 마치 진나라와 월나라처럼 아무 상관없이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3부.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중에서
고종이 말했다. “다른 나라 군사를 빌려 쓰는 경우도 나라마다 전례가 있다.” 회의장은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반대하는 대신들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고종이 입을 열었다. “중국에서는 전에 영국 군사를 빌려 쓴 일이 있었다.” 우의정 정범조가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것이 중국 일을 본받아야 할 일이겠습니까.” 고종도 지지 않았다. “여러 나라에서 빌려 쓰려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 군사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정범조가 또 반박했다. “청나라 군사라 해도 어찌 애초에 빌려 쓰지 않는 것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설득으로 듣지 않으면 의정부에서 의논해 소탕하라”고 명하며 화제를 돌렸다. 회의는 충격 속에 끝났다.
-3부.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중에서
전주성이 함락되기 전인 4월 4일 전현직 대신 전원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좌의정 조병세가 고종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백성들이 쪼들리고 억울하여 무리지어 호소하려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인데 언제 한 가지 폐단이라도 제거하고 한 가지 고통이라도 바로잡아서 백성의 실정에 부응한 적이 있습니까.” 고종이 남 일처럼 답했다. “탐욕스럽고 포악한 정사를 견뎌내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좌의정 조병세가 말을 이었다. “오늘 백성들은 극히 불쌍합니다. 네 칸짜리 초가집이 있는 사람은 1년에 100여 냥을 바치고 5, 6마지기 토지를 가진 사람은 4석이 넘는 조세를 바치니 입에 풀칠도 할 수 없게 되어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안착하여 생업을 즐기게 된다면 어찌 뛰어다니며 소란스럽게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크게 고치고, 조치를 시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겁니다.”
-3부.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중에서
국가 명운이 달린 위기상황은 기회이기도 했다. 지도자이자 권력자로서 권력욕을 희생하고 자기가 소유한 자원을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다면 더 강건한 권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끝까지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위기는 기회로 바꾸지 못하고 위기로 끝났다. 조선을 노리는 외국 세력도 고종에게는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국가 운명과 무관하게, 고종은 나라를 바꿔가며 왕권 유지와 강화에 도움이 되는 국가를 파트너로 택했다. 이를 위해 땅에 있던 금은보화와 수목은 외국에 팔았다. 곳간은 텅 비었고 마침내 고종 본인이 열쇠를 쥐고 있던 내장원 금고 또한 텅 비어버렸다. ‘오로지 백성을 위하여’ 권력을 잡고 시작한 정치가 31년 동안 완벽하게 퇴보하고 나라는 고물, 너무도 팔아먹기 좋은 급매물 고철덩이가 돼버렸다.
-5부. 「고물을 팔아치우다」 중에서
을사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 원을 집행했다. 이 일본공사관 기록 전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돼 있다. 문서에는 지출된 금액을 계산한 메모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조약 체결 6일 전에 황제 고종이 일본공사에게서 2만 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10년 서울 숙련 목수 일당이 1원이었다. 목수 연봉을 200원으로 가정했을 때 2만 원은 이 목수 100년 치 연봉에 해당한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은 2,500만 원이니, 그 100배는 25억 원이다. 그 25억 원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 상태’였다. 조약 상대방의 궁박함을 이용한 증뢰요, 태조고황제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나라를 판, 수뢰다.
-5부. 「고물을 팔아치우다」 중에서
종묘사직의 향불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일본 황실이 해체되는 1945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명칭이 바뀌고, 순종의 직계는 천황가의 일원인 왕족으로, 그 형제들은 공족으로 대우받았다.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했다. 일본 왕족보다 높았다. 재산은 막대했다. 조약에 따라 나라는 사라졌지만 구황실은 이듬해부터 세비도 지급받았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50만 엔이었다. 그리고 150만 엔은 1921년부터 30만 엔이 증가해 1945년까지 180만 엔으로 유지됐다. 1911~1913년 회계 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예산은 5,046만 9,000엔이었다. 식민지 세출의 2%가 2,000만 조선인의 10만분의 1도 되지 않는 옛 지배자 가족에게 매년 지급됐다.
-5부. 「고물을 팔아치우다」 중에서
출판사서평
고종의, 고종에 의한, 고종을 위한 나라의 종말!
고종에게 조선은 국가가 아니었다. 그저 개인 소유물에 불과했다. 백성은 자신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요, 유일하게 그의 안중에 있던 것은 자신의 안위와 호사뿐이다. 왕권을 잡은 고종은 자신의 친위부대 무위소에 모든 병력과 군비를 집중시키며, 중무장한 서양 함대와도 대등했던 국방력을 무장 해제시켰다. 또한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학정에 저항하는 백성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고종의 대책 없는 화폐개혁은 경제를 붕괴시켰으며 부족해진 국고를 채우기 위해 환곡 폐단은 심화되었고, 통나무와 우뭇가사리에까지 세금을 매겨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잔치를 위해 폐선을 사들이는 등 온갖 사치와 향락에 막대한 국고를 쏟아 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채굴권 등 국가자원을 팔아 자기 금고를 채우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온갖 무능과 부패로 국가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고종은 조정을 민씨 일가로만 채웠고 황제를 등에 업은 이들은 가렴주구와 학정을 일삼아 국가 몰락을 재촉했다. 고종은 철저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난파시키고 있었다.
무능한 지도자는 어떻게 역사를 무너뜨리는가!
무능한 지도자가 이끌던 시대에도 개혁의 기회는 존재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 기회들마저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목숨 걸고 상소하던 충신들은 하나둘 스러져갔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 개혁을 일으켰던 세력들은 자신의 왕권에 대항한다며 분노한 고종에 의해 처참히 몰살됐다. 당시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외국 인사들은 고종에 대해 공통된 평가를 내렸다.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황제(고종)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다”라고 했고,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고종의 면전에 “매관매직을 30년 간 하고도 옥좌가 건재하니 귀국의 운수가 왕성하다”며 비아냥댔다.
국가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고종은 일본을 신뢰하며 사례금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아 챙겼다. 무엇보다 을사조약 당시 자신의 지위와 안녕을 약조하는 조항만을 챙기고 총 한 번 쏴보지 않은 채 평화롭게(?) 국가와 백성을 일본의 손에 넘겼다. 결코 개혁군주도, 비운의 황제도 아니었던 그는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일본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누리며 호의호식했다.
우리는 고종을 통해 무능한 지도자가 어떻게 국가와 백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보았다. 《매국노 고종》을 집필한 박종인 기자는 단언한다. “불편한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진실을 외면한다면 치욕의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 책의 목적은 단순히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내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희망의 미래를 준비하고 위기의 재현을 막아보자는 데 있다. 우리는 국민들의 헌신과 땀방울을 딛고 다시금 부활한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역사의 교훈을 직시하고 다시 징비해야 할 때이다.
'♣ 책 도서관 ♣ > - 역사,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친일파 야스쿠니 식민사관 일본회의-이영채, 한홍구 (0) | 2021.07.22 |
---|---|
지리 대전-일촉즉발 남중국해의 위험한 지정학:로버트 캐플런 (0) | 2021.07.10 |
바이러스전쟁(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도현신 (0) | 2021.07.07 |
중국의 선택-21세기 미중 신냉전 시대:이철 (0) | 2021.06.10 |
더 위험한 미국이 온다:바이든 정부 4년, 시장과 돈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0) | 2021.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