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중, 단편 소설]※

[단편소설]눈물이 주룩주룩

Bawoo 2022. 1. 3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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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70고개를 넘어 죽음에 이르는 문턱이 점점 가까워지는 80고개를 향해 가는 중인 지금도 10대이던 고등학교 시절 3년을 생각하면 울화부터 치민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다시 살아보고 싶은 1순위일 정도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내 선택이었기에 원망할 대상조차 없다. 꼭 짚어내야 한다면 사촌 형이다. 나를 적성에 안 맞는 공고로 유도한 장본인이니까. 그러나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 사촌 형이 유도했더라도 내가 싫다고 했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 앞날을 설계할 줄 모르던 철없음과 이런 나를 좀 편한 자취생활을 하고자 이끈 사촌형의 이기심이 결합된 합작품이라는 게 맞겠다. 사촌 형이 공고가 아닌 인문계, 상업계만 다녔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이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적성에 맞는 인문계나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니게 됐을 테니까. 그러니 이건 어쩌면 내게 주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얼마든지 벗어날 기회가 있는데도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다녀놓고 울화가 치민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나는 참으로 바보같은 삶을 살았다. 최소한 고등학교 3년간은 말이다. 지금 얘기하려는 동창과의 추억을 빼면 지금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
1966년 새학기. 나는 2학년이 되었다. 1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과는 저절로 헤어졌다. 우리의 뜻은 전혀 관계없는 천편일률식 학교 행정 덕분에.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열차통학 할 때가 되면 하교 때 만큼은 역에서 꼭 만나니까. 한 학년 올라간 소감을 말하라면 한 마디로 말해서 개똥이었다. 마냥 가슴이 설레이는 사춘기인데도 그랬다. 모두가 학교생활이 재미없는 때문이었다. 애초에 학교 선택 자체를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어지간 한 것은 받아들이려 했지만 수업 시간표에서 확인한 수업 과목은 내게 끔찍한 고문으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시간이 줄거나 아예 없어져 있었던 것이다. 국어, 영어, 역사, 미술, 음악 등. 그러니 즐거울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 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도 못했다. 자퇴하고 하다못해 인문계 3류 학교라도 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위인 지금도 땅을 치며 후회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꿈에서조차 생각을 못했으니 나는 얼마나 바보같았던가. 그렇지 않은가? 앞날에 대한 설계를 했다면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했는데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 당시 내 꿈은 세칭 명문대에 가는 거였다. 국립 S 대가 안 되면 사립 Y 대가 목표였다. K 대는 관심 밖이었다. 이유가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냥 싫은 거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 이하로는 절대로 안 갈 생각이었다. 이유는 상고 명문 S 상고를 간 동네 친구 영국이 때문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다니는 학교는 다른. 같이 시험보자고 가져온 입학원서를 뿌리치더니 기껏 간 게 이름도 없는 공고였냐며 멸시에 가득찬 눈초리를 보내던. 그때 느낀 모멸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원하던 Y대에 들어가고 나서야 풀렸으니 6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 기나긴 세월을 어찌 잊을 것인가. 2년 반리란 투병생활까지 겪었으니. 그러나 그건 나중 얘기다. 결과가 좋았기에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엔 결코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엔 고작 이런 말을 혼자 뇌까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 영국아, 나는 앞날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이 중학 생활을 한 철부지여서 그랬을 뿐이야. 이제 너 때문에라도 꼭 명문대에 들어가 보일 게.' 혼자 이리 다짐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운 목표가 이랬으면 이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입학은 아무런 꿈이 없을 때 사촌형 때문에 했지만, 적성에 안 맞는 학교인 걸 알았으면 벗어나야 했다. 군사독재 시절이지만 개인의 학교선택 자유를 제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는가. 내가 원하면 자퇴, 전학 모두 할 수 있었는데 그럴 생각조차 못하고 적성에 안 맞는 걸 알면서도 벗어날 생각을 못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속된 말로 쪼다였던 셈인데, 이 쪼다라는 말을 70이 넘은 나이에 내 안중에도 없던 동창 놈에게 듣게 되어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더 심한 모욕적인 말로 되돌려주며 사과를 받아내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동창 놈 말이 100% 맞는 것 아니던가. 표현이 동창 놈 수준에 맞게 저급했을 뿐이었다. 당당하게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데도 못 벗어났고, 사춘기 접어들자마자 찾아온 이성에 대한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시작하여 가슴앓이만 하다가 끝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 외의 삶은 쪼다라는 표현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으니 이 고등학교 3년에만 국한된 것이기는 하다. 혹 모른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쪼다라고 생각한 또 다른 누구가 있었는지는. 분명한 건 설사 그리 생각한 인간이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겠는데 이 고교 3년동안만큼은 빼도박도 못하는 쪼다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즐거움이라곤 전혀없는 이 학교 생활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지금 이야기 하려는 친구와 같은 반이 된 것이다. 내 생에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 동성 친구인 "길수". 6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 "길수"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려니 눈가에 절로 눈물이 맺힌다.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아 이젠 빛이 바랜 사진첩 속 사진과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
길수와의 첫 만남은 새로 편성된 2학년 같은 반에서였다. 1, 3학년 반은 몇 반이었는지 또렷이 기억이 나지만, 신기하게도 2학년 반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길수가 내 짝꿍은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였다. 통로를 하나 사이에 둔, 길수 짝꿍은 따로 있는 자리. 나는 길수를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해버렸다. 동성간에도 사랑이 있다면 아마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반한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그때 나는 1학년 시절 열차통학하면서 본 한 여학생에게 반해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이란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길수가 이 여학생을 꼭 빼닮았던 것이다.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춘기를 짝사랑으로 시작한 건데 이건 내 성격상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교무실에 들어갈 때 무서워 벌벌 떨고, 선생들이 발표만 시켜도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심약한 성격. 만약에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소위 말하는 일진들의 먹잇감 아니었을까? 그러니 우리가 살아낸 60년대 10대들은 얼마나 순수했던 건가. 당장 내 동창들 중에도 좀 불량스러운 복장으로 으시대는 몸짓을 하고 다니는 애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걔들이 나 같은 범생이 쪼다급들을 괴롭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괴롭힘을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러니 우리는 요즈음 10대들과 달리 참 순박하게 10대 시절을 보낸 세대였던 것이다.

만약에 이 시절에 이 소녀를 못 봤다면 어땠을까? 이성에 대한 관심이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변해있었으니 누군가를 사랑하게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눈에 반하는 정도가 아니면 마음이 동하지 않는 내 성격상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변변한 연애조차 해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버린 걸 보면. 그러니 사랑에 눈뜨는 사춘기가 되자마자 이 소녀를 보게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끝내고 말 운명. 단 한 줌의 용기만 있었어도 사랑으로 맺어졌을 것을. 소녀도 분명히 나를 좋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나는 의도적으로 길수에게 접근했다. 짝사랑 소녀에게는 해 볼 염두도 못 냈던 일을 동성이고 자연스럽게 매일 볼 수 있는 걸 기회로 삼아서. 길수도 내가 싫지는 않았나 보다. 나의 접근을 마다하지 않고 선선이 받아주었으니까. 이후 길수와 나는 내 짝꿍 태주까지 합쳐서 셋이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같이 경복궁에 여학생을 꼬시겠다는 목적으로 가기도 하고 우미관에 가서 서부 영화도 봤다. 우미괸에선 지도교사에게 불량학생으로 찍혀 모자를 뺏으려는 걸 잽싸게 도망치기도 했다. 두 건 다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같은 범생이 쪼다들에게는 이것만도 파격이었다. 가장 많이 함께 한 건 당연히 하교였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였는데 내가 열차통학을 하는 해가 긴 늦은 봄부터 이른 가을까지는 교문에서 헤어졌다. 길수와 태주가 타는 시내버스와 내가 타는 기차역이 서로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길수와 헤어질 때면 얼마나 아쉬웠었던가.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는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주로 셋이 함께 찍었지만 길수하고 둘이서만 찍기도 했다. (위 사진). 내가 둘이서만 찍자고 졸라서였는데 길수는 좀 별나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길수는 아마 몰랐으리라. 난 길수하고 찍은 거지만 마음은 짝사랑하던 소녀하고 찍는 거로 생각하고서였으니까. 길수가 이런 내 마음을 알 리는 없었을 것이다. 짝사랑하는 소녀가 있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학교는 다르지만 서울까지 같이 통학하는 동네 친구 호운이만 알고있는 비밀이었다. 길수는 내가 유난스럽게 자기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받았을 것이다. 셋이 붙어 다녀도 내 짝꿍 태주에게 대하는 태도와 확연하게 다른 걸 다른 누가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길수에게는 알지 못 할 그늘이 있어보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란 면에선 나와 똑같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점점 더 친해지면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큰형과 같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미 결혼해서 부양할 처자식이 있는 형.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었다. 우울한 모습인 이유와 관계는 없지만 길수 아버지가 유명한 출판사를 경영했었다는 것이다. D문화사란 교과서 외 다른 책엔 관심도 없던 나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던 출판사. 이건 길수가 가난한 농촌 출신인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길수는 늘 우울해보였다. 아마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이런 길수가 안스러워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때 나는 할 줄 아는 게 집, 학교, 학원을 오가는 일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굴 위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혹시 술, 담배를 할 줄 알았다면, 여학생을 쉽게 꼬시는 용기가 있었다면 위로해 줄 방법이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를 담금질하여 앞날을 설계하는 성격이 아니라면 일탈은 어쩌면 위안의 좋은 수단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사 그런 성격일지라도 가끔씩 하는 일탈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너무 몰두하여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실제로 길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지만 나는 그걸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탈도 나같은 범생이 쪼다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길수와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길수와 나 사이의 또 다른 장벽은 살아온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못 느꼈지만 길수는 느꼈을 그런 것. 언젠가 내 자취방에 데리고 갔을 때 한사코 들어오길 거부했는데 그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자기가 사는 환경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는 무언의 몸짓. 그러니 내가 길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길수도 이걸 알아 같이 어울릴 다른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길수는 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없는 애들이 대다수인 실업계를 택해 왔을까 의아했다. 설사 집안 형편이 어려울지라도 장남 한 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에 보내는 게 세태인데. 심한 경우 전답은 물론 소까지 팔아서라도 대학에 보내는 탓에 대학이 우골탑이라고까지 불리지를 않던가.
물어보지는 않았다.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혹 공부하는 게 싫어서인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 선에서 멈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길수와 나 사이에 자그마한 다툼이 있었다. 원인은 나의 잘 삐지는 성격 때문이었다. 거기에 길수가 기름을 부은 것이고. 길수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툼이 있던 즈음에는 결국 다른 반 아이 몇 명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주 불량하진 않지만 적당히 불량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아이들이었다. 담배, 술을 하는 가벼운 일탈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어 보이는. 가정 환경도 좀 괜찮은 편에 속해 보였다. 농촌 출신인 나와는 달리 길수하고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길수하고 벌인 다툼은 연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앙탈 비슷한 거였다. 난 너를 이만큼이나 좋아하는데 넌 왜 다른 아이들하고 어울리냐는 식의. 그렇게 서먹서먹한 상태로 3학년이 되었고 반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짝꿍인 태주하고만 또 같은 반에다가 짝꿍까지 되었다. 태주하고 갈라지는 건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제 길수의 모습은 아침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어쩌다 잠깐 보는 게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길수가 배정받은 반이 교사의 1층이어서 수업 들어가기 전에 교사 앞 작은 공터에 나와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길수의 곁에는 새로 어울리는 몇 명이 거의 같이 있었다. 나는 길수를 보며 화해를 하기는 해야겠는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늘 모른 체하며 그냥 지나쳤다.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건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길수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마치 "너 나한테 사과 안 할거야"라고 힐책하는 거로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 모르는 체하며 지나쳤다.

그런 길수에 관한 소식은 짝꿍 태주가 물어다 줬다. 저도 입시공부한다고 정신없을 텐데 언제 누구한테 소식을 듣는 건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같은 재단 소속 중학교 출신이라 길수 반에 있는 중학 동창 누구한테 들었나 보다 생각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길수가 요즘 불량기가 좀 있는 애들하고 어울린대. 여학생들에게 못된 짓도 한다나봐."
못된 짓이라.... 난 태주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됐다. 아침 등교시간에 간혹 보게되는 길수의 곁에 같이 있는 애들이 아주 불량스러운 축에 끼는 애들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나 길수, 태주는 여자애들에 관한 한 쪼다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여학생 꼬시자고 작당하고 경복궁에 가서도 말 한 마디 건네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겠는가.
태주는 몰라도 나나 길수가 못 생긴 편은 아니었다. 키가 훤칠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다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반 전체로 보면 작은 편에 속하기는 했다. 그래도 거의 170이 다 되니까 크게 문제될 일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얼굴에서는 길수나 나나 질 생긴 편에 속했다. 길수는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닮았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나도 영어 단과반에 다닐 때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표시로 말을 걸어온 여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그 여학생이 싫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모른 체 하고 말았지만, 외모 때문에 여학생들에게 외면당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편이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보면 호감을 느낄 만한 정도는 되고도 남는. 그러나 남자가 이성을 사귀려면 잘 생긴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필수 조건인데 난 그게 결여되어 있었다. 나를 먼저 좋아한 여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 등신, 쪼다인 성격. 그러니 길수가 여학생에게 말을 걸 정도의 용기가 있는 애들하고 어울리면서 의외로 쉽게 여학생들과 사귀게 되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 되었다 싶었다. 일부 불량기 있는 애들이 범죄성으로 여학생들을 괴롭힌 것을 자습 시간에 무슨 무용담처럼 늘어 놓은 그런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라고 어찌 그런 맘이 없었겠는가. 단지 용기없는 쪼다같은 성격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모범생 비슷한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여자애들과 어울려 노는 쪽이 아닌 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평생을 해로하며 사는 게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주는 또 충격적인 소식을 들려주었다. 막 2학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수가 국비 장학생을 지원했대. 그것도 육군이 아닌 해병대로. 형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다시 빼내려고 했지만 학교에서 거부해서 실패했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국비 장학생은 거의 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애들이 가는 거 아닌가 말이다. 부모가 자식 학비조차 대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 아이들. 뭐 한두 명 예외인 경우는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렇다고 보는 게 거의 맞을 것이다. 길수는 그런 집에 해당하지 않았다. 형이 고등학교 교사라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인데 그 정도 집이 어디 그리 많은가. 없는 쪽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집에서 자란 애가 대학에 갈 생각을 안 하고 왜 국비 장학생을 지원했단 말인가? 나하고 한참 어울린 2학년 때만 해도 대학에 갈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유흥비가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 건 이 글을 쓰면서였다. 당시에는 전혀 생각 못했던 일. 쟤는 도대체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길래 사서 고생길을 택하나 싶은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학생들하고 어울리려면 돈이 필요했을 텐데 이런 돈을 형이 줄 리는 없었을 것 아닌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게 국비 장학생을 지원하여 1학년부터 낸 수업료를 돌려받아 쓰는 방법을 택한 게 아닌 가 싶었다.
아무튼 길수와 어떤 식으로든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태주로부터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뒤부터였다. 국비 장학생을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한 거 아닌가 말이다. 자그마치 5년이다. 5년이란 긴 세월을 그 훈련 혹독하다고 소문난 해병대에서 복무해야 하는 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그러나 화해할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짜고짜 찾아가 너 도대체 왜 그럤어라고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게 뻔했다. 그러다가 묘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시내에 있는 학원 단과반을 다니고 있었는데 몸을 무리한 탓인지 이상 증세가 있었다. 전에 없이 쉽게 피곤해지고 식욕도 없고 자고나면 몸에 식은 땀이 나 있고 그랬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동네 의원에 가서 XㅡRay를 찍었다. 일주일 후 결과를 보러가니 폐침윤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약도 주지 않았다. 6개월 정도 무리 안 하면 된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이게 병을 키췄다. 폐침윤이란 폐결핵 초기 단계라는 거였다. 남에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의사와 내 무지가 겹쳐 졸업 후 장장 2년 반에 걸쳐 투병생활을 하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힘은 들었지만 꾸준히 다니던 학원을 그만 다녀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수강기간은 아직 반도 더 남아있었다. 환불해달라고 해봤자 얼마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옳타꾸나 이걸 핑계로 길수한테 화해 신청을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길수는 늘 그랬듯이 아침 첫 수업 전에 애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었다. 나를 볼 때마다 바라보는 예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는 길수에게 다가가 수강증을 내밀었다.
"이거 수강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요즘 몸이 안 좋아 못 다니겠어. 생각있으면 네가 대신 다녀라."
길수는 내가 내민 수강증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러곤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다였다. 난 길수가 내가 내민 수강증을 받은 거로 화해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길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난 몸도 시원찮았지만 입시 공부 한답시고 수시로 결석했다. 어떤 때는 일주일 이상 결석한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을 위한 아무 대책이 없는 싱태에선 그 방법뿐이 없었다. 담임선생은 엉덩이 빳다 몇 대 때리는 것으로 응징(?)했지만 강도가 세지는 않았다. 가장 착실한 축에 속하는 내가 학교에 안 나올 때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은 때문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어쩌다 등교할 때 예의 교사 앞을 지나치면서 길수 모습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태주에게 물어보니 학교에 거의 안 나온다더라는 대답이었다.
"몇 달 있으면 군대에 끌려가 5년이나 썩을 애들이라 결석해도 봐준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사고만 내지 않으면 가끔씩 등교하는 조건으로 눈 감아준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길수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길수는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끌려가 5년 동안 썩을 거였고 난 나대로 무려 10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살아가기 위한 싸움에 매달려야 했다. 그 기간 중에 생애 가장 기쁜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명문 Y대 뺏지를 다는 소원을 이룬 일. 그 외에는 악전고투의 나날이었다. 군대에 갔다오는 건 이 나라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필수 코스이니 당연히 이 기간도 포함됐다. 33개월 보름. 그러니 길수를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이었던 소녀는 이따금 생각났다. 동성보단 이성에게 빼앗긴 마음이 더 아름다운 추억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길수는 군대에서 썩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재가 확실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가 만날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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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제일 먼저 닥친 불행은 2년 반에 걸친 투병생활이었다. 난 대학 입시를 보기도 전에 이미 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원래 약하게 태어난 몸을 입시공부한다고 무리한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걸 조기 발견했으면서도 무지로 인하여 병을 키운 것이고. 몸 상태가 최악이었지만 어쨌든 봐보기나 하자고 목표로 했던 Y대 입시 시험장에 가던 버스 안에서 졸도까지 했다. 곁에 중학교 동창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시험장에도 못 들어갈 뻔 했다.
"과로인 것 같긴 한데 혹 모르니 큰병원에 가서 XㅡRay를 찍어보는 게 좋겠다. 어쩌면 큰병일지도 모르니. " 급하게 찾아간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병원의 의사는 속성 영양제를 놔 주고 크레졸 냄새가 나는 물에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다.
시험지를 받아든 나는 예상했던대로구나를 절감해야 했다. 아는 문제보단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아마 예비고사가 있었다면 미리 걸러졌을 것이다. "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시험을 보러와. 주제 파악 좀 해라"하는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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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결핵 2기야. 무얼하느라고 몸을 이리 망가뜨렸어. 요양원에 가면 좋은 데 형편이 되나?"
"그게 좀...."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못하자 의사는 다 알아챈 듯 했다.
"우선 객담검사를 해야하니 받아오고 당분간은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하니까 매일 오도록 해."
" 저어~ 치료기간은 얼마나. 입시공부를 해야하거든요."
"최소 2년이야. 공부는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는 꿈도 꾸지마. 어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무조건 쉬도록 해. 보신탕 같은 고단백 음식 많이 먹도록 하고."
이로부터 한 달에 한 번 꼭 의사의 얼굴을 봐야했다. 주사를 맞아야 하는 처음 한 달은 매일인 것을 포함해서였다. 국립 S의대를 나온 것이 틀림없는 의사는 권위가 철철 넘치는 모습이었다. '저 의사를 아버지로 둔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저런 사람을 아버지로 태어났으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텐데 복도 참 없지'라며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의사는 쉽사리 약을 끊으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주사, 객담검사는 치료 한 달만에 끊었지만 하루 20알씩 먹는 알약은 계속 먹어야 했다. 무려 2년 반 동안이었다. 2년이 지난 해에 의사의 허락없이 대입종합반에 등록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곧 징집을 위한 신검 통지가 올 것이고 그리되면 다음해에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기정사실이었다. 신검 불합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병이 거의 나은 것 같다는 느낌이 오는 상태이니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의사는 내가 약을 그만 끊으면 안 되겠냐고 통사정하다 싶이 했더니 XㅡRay 사진을 한참 더 들여다보더니 "요시, 끊어. 대신 절대로 무리하면 안 된다.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으니."라고 말하며 허락해주었다.
2년 6개월 만이었다. 무지의 소치로 6개월에 끝낼 수 있는 병을 2년 6개월이나 끌었던 것이다. 이후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입시공부에 몰두했다. 시작한지는 6개월이 지났지만 약을 끊었으니 좀 더 몰두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낮잠을 포함 8시간은 꼭 자야했다. 어찌됐건 학원, 집만을 오가는 지겨운 생활이 1년간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먹고 싸고 자는 일 외에는 오로지 학원의 입시 교과서에만 매달렸다. 결과는 합격. 야호~! 고등학교 1학년 때 통학열차에서 처음 보고 꿈꿨던 명문 Y대의 뱃지를 드디어 달게 된 것이다. 남들은 3년 만에 다는 뺏지를 6년이 걸려서. 그래도 적성에 맞는 국문과였다. 사학과가 더 잘맞았으나 당시에는 모르던 일이었다. 합격을 확인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은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영국이었다. 다니는 학교도 다르고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느닷없이 상고의 명문인 S상고 원서를 들고와 같이 시험보러 가지 않을 테냐던. 그때 나는 앞날에 대한 설계를 전혀 할 줄 몰랐던 아직은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었다. 반면 영국이는 자기집 형편이 어려운 걸 알아 명문 상고를 나와 은행에 들어갈 목표를 세웠던 것이고. 그 학교 시험 안 보겠다고 했을 때 실망한 표정과 S상고에 합격하여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공고 모표를 단 모자를 쓴 나를 통학열차 안에서 봤을 때 쳐다보던 멸시감 섞인 시선을을 결코 잊을 수 없었는데 이제 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 때부터 보지 못한 호운이를 찾아가 자랑했음은 물론이다. 호운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이 하는 인쇄소 일을 거들고 있었다. 호운네는 우리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집을 정리하여 역 근처에 있는 가게가 딸린 여관을 사서 이사했었다. 호운이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으면서도 대학에 안 간 건 두 가지 이유가 다 해당할 것이다. 집안 형편과 본인의 능력부족. 호운네는 식구가 너무 많았다. 늙은 할머니와 형 둘, 밑으로 동생 셋 그리고 6.25때 전사한 작은 아버지의 부인과 아들 한 명까지 호운이 아버지가 부양하고 있었다. 그래도 호운이가 나나 영국이 정도 머리가 되었다면 대학에 갔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SKY대 중 하나가 아니라면 쓸 데 없이 돈만 없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아무튼 영국이 한테 알려주라는 의도가 더 컸으니 아마 알려줬을 것이다. 그땐 이미 졸업하여 은행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첫사랑 소녀 계숙의 안부를 혹 아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한대로였다. 졸업한 뒤로는 통근열차 탈 일이 없어서 볼 기회가 없었다는. 소녀의 집이 호운네 집에서 그리 멀지않는 곳에 있었는데도.

이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여름방학 즈음에 입영영장이 나와 12월 초에는 입대해야 했다. 1학년 기말 고사도 치르기 전이었다. 그래서 입대 하루 전까지 등교해야 했다. 이후 33개월 보름간의 지긋지긋한 군대 생활을 하고 제대한 이튿날 바로 1학년 2학기부터 복학하여 2학년까지 다녔다. 1학년 2학기를 두 번 다니는 진기록을 남기면서. 입대 날짜가 너무 빨라 기말 고사를 못 치르고 리포트로 대신했는데 한문 과목 강사놈이 F를 준 때문에 1학년 과정 전체가 낙제 처리된 때문이었다. 나쁜놈의 새끼같으니 군대에 끌려가 고생할 학생한테 F를 줘. 그 갑질같지도 않은 갑질하면서 악덕을 쌓아 지옥으로나 떨어져 버려라. 염병할 놈."
욕을 해봤자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총장에게 탄원 비슷한 편지를 했다. 1학기 때도 F하나 없는데 낙제라니 너무 억울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1학년 2학기 성적을 무효 처리하고 등록금 낸 것은 인정할 테니 재수강하라는 답장이 왔다. 교무처장 명의로였다. 이리 되는 데는 나를 좋아한 과 동기 철오의 도움이 있었다. 내가 낙제 처리된 걸 편지로 알려주어 구제받을 대책을 마련하게 해 준 것이다. 이후는 그야말로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극한 생활이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지쳐서 포기한 나,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조짐은 대학에 들어간 해인 71년에 이미 있었다. 매스컴은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전이 한창이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축소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머니의 어두운 표정으로 보아 미군 소속 파월 기술자로 가신 아버지로부터의 송금 일정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군대에 갔다와서도 대학에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불안스러운 조짐. 이 조짐은 제대하기도 전에 이미 현실로 나타났고 난 가장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대학에 다니기는 커녕 가족들 생계를 책임질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미용사인 큰여동생에 가계를 맡기고 무리해서 2학년까지 다녔다. 그러곤 바로 휴학을 했다. 휴학이라곤 하지만 복학할 가능성은 1%도 없는 사실상의 자퇴. 2학년 과정을 무리를 하면서까지 다닌 건 그래도 2학년까지 마치면 전문대 졸업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이후 신문에 초대 졸 자격의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학과와 관련있는 신문사에 가봤지만 사이비 언론사였다. 상대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게 주업무로 보였다. 안 되겠다 싶어 공무원 시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복학하자마자 행시를 보겠다고 준비를 했었지만 택도 없었다. 시간, 실력 다 부족했다. 우선 급한대로 5급 시험으로 눈을 돌렸다. 이럴 거면 그 고생하며 명문 대학에 뭐하러 갔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 찬밥 더운 밥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잘 났건 못 났건 부모인 어머니와 여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다. 특히 막내 여동생을 고등학교에 보내줘야 했다. 나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1년을 그냥 놀았으니까. 5급 시험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군대에 가서 거의 3년을 썩힌 머리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었다. 4급시험도 봤지만 여기선 쓴 맛을 봤다. 문제의 난이도가 입시 수준보다 훨씬 높아 대입 학원을 다니듯 조직적인 공부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발령이 난 뒤에 부딛치며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5급 공무원으로 시작하는 사회생활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4급도 마찬가지였다. 공무원은 박봉으로 소문나 있어서 실력이 좀 있는 또래들은 대기업을 선호했다. 당연히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내 경우 명문대 출신이라는 꼬리가 붙어다니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박봉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행운이 찾아왔다. 임용 통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습관적으로 신문 구인, 구직 광고를 훑다가 후기 사립 S대의 직원 채용공고를 발견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비록 후기 대학이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대학인데 직원을 공채한다? 별일이네.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도 채용 조건을 살폈다. 학력 제한이 있었다. 그럼 고졸로 봐야겠구나. 만약에 합격하면 먼저 발령나는 곳에 가서 근무하면서 다음 일을 생각하기로 하자. 아무래도 대학이 좋긴 하겠다. 월급은 어차피 비슷할 테니까 동사무소 2년 의무 근무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시험문제는 아주 쉬웠다. 5급 공무원 시험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냥 상식 테스트 정도 문제. 영작 빼곤 거의 만점이었을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고 가서 보니 합격자는 모두 5명이었다. 행정직 3명, 경리직 2명. 행정직엔 명문 서울고를 나와 외대 영어과를 중퇴하고 나이로도 한참 선배인 한 명이 합격해 있었다. 횡정연 선배. 나보다 더 말 못 할 사연이 많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친해진 다음에도 절대로 말하지 않는 걸 보니 이런 확신은 더 굳어졌었다.
내가 발령받은 근무처는 이공대학장실이었다. 학력란에 출신학교를 공고로 쓴 것을 보고 이리 발령한 것 같은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혼자 근무하는 방에 배치된 것이다. 만약에 대학 중퇴 학력까지 썼다면 문과 출신인 나에게 꼭 이공대 학장실로 발령낸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2년간 주경야독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휴일인 일요일에도 공부하기 위하여 사무실에 나왔고 근무시간에도 할 일이 없을 때면 책을 펴놓고 공부했다. 유일한 시간 사치를 부린 건 몸이 지친 토요일 오후 5시 쯤에 명동에 있는 필하모니에 가서 두어 시간 정도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한 시간 정도 한 거였다.
국책은행인 J은행에 합격한 것도 행운이었다. 논문 문제가 내가 달달 외우다싶이 한 "실업에 대해 논하라"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경제원론 한 권을 거의 외우다싶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자신있는 주제였던 것이다. 논문을 완성한 순간 어렴풋이 합격을 예감했다. 영작이 시원찮은 외에는 만족할 만하게 시험을 치뤘기 때문이었다. 은행의 인기순위가 종합상사같은 대기업에 밀려 최우수 인력이 경쟁자로 나서지 않은 것도 도움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합격통지 엽서를 받아든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대학을 계속 다녔으면 졸업할 해에 대졸 봉급을 받는 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학위는 없지만 받는 봉급액으론 같았다. 비록 내가 원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인문계 출신이 그리 만만하게 들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연수시 상견례한 동기들이 자기 소개를 할 때 보니 나와 국립 S대 가정대 출신 여학생을 제외하면 모두 상경계 출신이었다. SKY대 출신이 아닐 뿐이었다. 학벌보단 전공이 중요하다는 걸 현실로 보여준 사례. 가장 기분이 좋은 건 처음 받아든 봉급이 사립 S대에 근무할 때보다 4배나 많은 액수라는 점이었다. 1년 후엔 막내 여동생도 여고를 졸업하고 국가직 5급 공무원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의 길이었던 학자나 언론사 문화부 기자. 고교 교사가 되는 게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인 걸 빼면 이젠 순탄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다. 적어도 뜻하지 않은 사고만 겪지 않는다면 말이다. 더 이상은 몸이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이대로 다니면서 서예나 배워 정년퇴직하면 서예학원이나 하나 차려 소일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로부터 대물림받은 가난도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될 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신군부의 구테타 및 집권, 이에 반발한 광주 5. 18 민주화 운동 같은 나라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평범한 삶을 사는 나에게는 찻잔 속의 태풍만큼의 영향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반복된 나날이 쌓여가면서 그렇게. 몸은 만성 피로에 쩌들었고 이렇게 무의미한 삶을 지속하며 살 수는 없다고 혼자 수도 없이 한탄해보지만 실질적인 아무런 대안은 없이 또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가장 중요한 일이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니 이게 해결 안 되면 꿈이고 지랄이고 다 웃기는 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또또 그렇게. 29살에 행원으로 시작한 은행 생활은 30중반이 되면서 대리급 중고참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길수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생각한 게 바로 이무렵이었다. 아마 박사학위 소지자도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서였을 것이다. 1986년 쯤. 길수를 처음 본 지 정확히 20년이 흐른 뒤였다. 길수가 어찌 살고 있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연관성도 없는 이 보도 때문에 길수가 생각 난 이유는 아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때문일 것이다. 학사 학위도 없는 주제에 시절을 잘 만나 대졸 대우 호봉을 받고 은행에 다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엔 상고 출신이나 은퇴한 운동 선수 출신 그리고 비명문계 대학 출신을 얕보는 반인화적 성향을 들어냈는데 이것도 자제하게 되었다.
'그래, 이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족하며 살자. 박사 학위를 보유한 애들도 취업할 곳이 마땅찮아 쩔쩔맨다지 않는가. 불과 10년만에 기업의 인력 수요보다 취업 희망자가 과잉인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수요부족, 공급과잉. 나라가 그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는 했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갈 수 있던 대학을 이제는 누구나가 가는 고학력의 시대가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불과 20여 년 만에 못사는 집이 줄어들고 잘사는 집이 늘어난 것이다. 이 모든 게 장기 독재를 계속하다가 최측근에게 시해당한 박통이 초석을 다져놓은 것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내 10대, 20대 삶을 통째로 좌지우지 했던 양반. 이 양반 덕에 아버지가 파월 기술자로 갈 수 있어서 대학에도 갔고 휴학한 뒤에는 모든 직원 채용은 공채로 하라는 지침 덕분에 사립 대학 교직원으로 취업할 수 있어 지금의 직장인 은행에도 다닐 수 있게 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거였다. 저항세력도 많은 독재통치였기에 당신을 지지해 줄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아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독재통치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평범한 민중에게는 무능한 민주통치보다는 유능한 독재통치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걸 보여주는산 증거이기도 했다. 적어도 실질적 혜택을 받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그러니 그게 비단 나뿐이겠는가. 베트남 전에 기술자로 간 사람을 아버지로 둔 가족들은 다 혜택을 입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잠시 직장이었던 사립 S대 취업 동기인 나이 많은 황 선배도 마찬가지 였을 테고. 그 좋은 학벌을 가지고도 단지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괜찮은 직장에서 외면당하다가 박통의 무조건 공채 지침 덕분에 유명 대학교의 직원이 될 수 있었던 거니까.

이제 나는 몇 년 후면 40대가 될 터였다.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길수가 결혼을 했다면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길수의 행방을 알만한 동창이 내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 1학년 때 친했던 경오와는 연락이 되지만 길수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2, 3학년 때 짝궁이었던 태주는 내가 천신만고 끝에 명문 Y대를 들어간 뒤 딱 한 번 만나곤 자발적 행방불명이었다. '어떻게 한다?' 고심하고 있던 차에 마치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이 동창 한 명이 찾아왔다. 1학년 때 친했던 종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동창이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이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지? "
반갑게 손을 잡으며 내 자리 옆에 있는 손님 접대용 의자를 권하며 물었다.
"그런데 나 여기 있는 건 어찌 알았어?"
"경오가 알려줬어.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반창회에서 만나 대출을 좀 받아야 하는데 혹시 은행에 아는 사람 있냐고 물었더니 네 얘기를 해주더라. 그런데 어느 지점에 근무하는지는 모른대. 그래서 본점 인사부에 전화해서 알아낸 거야."
"그랬구나. 근데 무슨 대출을 받으려고? 주택자금 대출은 굳이 나를 안 찾아도 다 해주는데."
"그게 아니고 좀 많이 필요해. 이번에 단독주택을 하나 샀는데 데 돈이 많이 들어가서 생활에 쓸 여유자금이 없어. 또 배를 안 타니 뭔가 해야해는데 여기에 들어갈 밑천도 필요하고."
"배를 탔다고?"
"응, 몰랐었나 보네. 3학년 때 2급 통신사 자격을 땄어. 근데 육상 근무처는 많지도 않고 배만큼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 없더라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배를 탔지. 아무튼 제대하고 바로 탔으니까 얼추 15년은 됐는데 이젠 힘들어 못 타겠더라. 그래서 용기를 내서 배에서 내린 거야."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녀석 나하곤 달리 학교가 적성에 잘 맞았었구나. 자격증 따려면 공부깨나 열심히 해야 했을텐데.
"그랬구나. 고생 많이 했겠네. 대출은 얼마나 필요해?"
"0 천만 원 "
"금액이 크네. 그런 대출은 차장이 관리하니까 일단 물어봐야돼. 쫄따구 대리 시절에 경오가 부탁했었는데 차장이 자금이 없다고 딱 자르더라고. 그래서 못해줬어. 아무튼 그때하곤 상황이 다르니 잠시 기다려봐라."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오케 싸인을 했다. 그러면서 손가락 3개를 펼쳐보였다. 커미션 조로 3부를 받으라는 뜻. 그 시절엔 관행이었다. 은행돈을 빌릴 수 있다는 자체가 행운인 시절이었다. 연 이자가 거의 20%에 달했는데도 쓰겠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빌려 줄 돈은 적었다. 이것도 수요과잉, 공급부족. 은행이 자기 돈이 아닌 고객이 맡긴 돈을 모아 마음에 드는 사람, 곳에 빌려주고 커미션을 받는 권력의 토대가 되어있는 시기였다. 은행의 꽃이라 불리운 지점장이 축재를 할 기회의 장이 마련된.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난 오랜만에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는 동창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좋았다. 학교에 대한 애정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친했던 동창에 대한 마음은 그 반대였으니까. 물론 대출은 굳이 친한 동창 아니라도 받게 해주었을 것이다. 내 돈 빌려주는 것도 아니잖는가?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떼일 염려 거의 없이. 커미션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난 중개인 역할을 할 뿐이니 나를 믿어주길 바랄밖에 없고. 뭐 밥 한 끼 정도 얻어 먹을 수는 있겠다. 그 정도야 오가는 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니까.
"됐다. 준비할 서류 목록을 알려줄 테니 준비되는 대로 가져와라. 등기부 등본 감정해서 원하는 금액이 나오는지 감정해봐야 하니까. 감정가 나오면 네가 원하는 금액 다 해주고 안 나오면 가능한 최대 금액까지 해줄 게. 관행이 있는 건 알지?"
"그럼, 그건 각오하고 있다. 그걸 주고서라도 은행돈 빌려쓸 수 있는 게 어디냐"
"그럼 됐다. 자세한 건 대출받을 때 얘기하자. 근데 너 혹시 동창 중에 이길수라고 알아? 해병대 국비생으로 갔었는데."
"모르겠는데. 내가 동창들은 꽤 많이 아는 편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야."
"그럼, 심영식은? 걔도 해병대 장학생으로 군대 갔잖아."
"영식이라면 잘 알아. 우리 동네 살아. 제대하고 안기부에 통신직으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그만두고 일식짐 차리려고 준비하고 있다."
"잘 됐네. 그럼 지금 당장 전화해서 내가 한 번 만나잔다고 그래봐. 얼굴도 볼 겸 알아볼 게 있다고 하면서. 나는 이리 말하면서 책상 위에 있는 내 전용 전화기를 종두 앞으로 가볍게 밀어놓았다.종두는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더니 잠시 뒤적거렸다. 그러곤 전화기 번호판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종두다. 개업준비는 잘 돼가? 다른 게 아니고 너 혹시 우일석 알아? "
상대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소리가 끊기더니 바로 이어졌다."
"일석이가 통화하고 싶다는데 바꿔줄게."
영식이와 만날 약속은 전광석화 같이 이루어졌다. 성미 급한 내가 당장 오늘 저녁 퇴근 후 만났으면 했고 영식이가 잠시 밍설인 끝에 오케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B역 알지? 거기 북쪽 개찰구에서 만나. 시간은 6시."
통화를 끝내고 종두에게 같이 저녁 먹을 테냐고 물으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시간이 안 맞는다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내가 퇴근할 수 있는 최대가능시간까진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하기로 하고 서류 준비되는 대로 다시 와라."
*
개찰구에 모습을 나타낸 영식의 모습은 옛날과 달라진 게 별로 없어보였다.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었다. 깡마른 몸집에 내성적인 표정.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거다. 벌써 20년 가까운세월이 흘러있지 않은가. 그런데 느낌이 그랬다. 훈련이 가장 세다는 해병대 생활을 했는데도 내성적인 분위기가 그대로였던 것이다. 천성은 여간해선 변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당당 나만 해도 그랬다. 하사관 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을 땐 사회에 나오면 참 씩씩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군댓물이 빠지니까 원래 성격으로 돌아와 있지 않았던가. 달라진 게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만약에 제대 후 짝사랑 소녀를 만났다면 가슴앓이는 절대로 하지 않을 자신은 생겨있었다.
"저기 불고기 좋아해? 이 근처에 맛있는 불고기 집이 있거든. 저녁시간이니 거기 가서 저녁에 반주로 맥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하자."
영식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 나는 자연스럽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영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만나자고 헀으니 당연히 내가 살 것으로 생각하고 왔으리라.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음식점 안은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가장 조용한 곳으로 보이는 구석진 곳으로 영식을 안내했다. 직원이 주문 받으로러 오자 불고기 3인분과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 술 좋아하나 보네."
"아냐, 원래 전혀 못했는데 책임자 회식 자리가 종종있다보니 한두 잔씩 마시면서 는 거야. 여기가 단골이야. 그러는 너는?"
"나도 마찬가지야. 맥주 한 병이 한계야."
"잘 됐네."
"그런데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 겸사겸사야.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연이 있던 동창들이 어찌 지내나 궁금해진 거야. 마침종두가 왔길래 이길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길래 네 이름을 댔더니 연락처를 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네 얼굴도 볼 겸해서 만나자고 한 거야."
음식과 맥주가 나왔다. 고기가 익기 전에 맥주 한 잔을 먼저 따랐다.
"자, 건배.이렇게 20년 만에 만나니 너무 반갑다."
내가 잔을 앞으로 내밀며 건배를 외치자 영식은 좀 뜨악한 표정으로 잔을 맞부딪쳤다.

사실 영식이와 내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3년 동안 같은 반을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기차통학할 때 기차 안에서 가끔 마주
친게 다였다. 나보다 훤칠하게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한 것으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뿐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서로 나눌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이런 영식이가 하루는 내게 말을 건 적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통학 열차 안에서였다. 갑자기 웬일인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내 짝사랑 소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계숙이라고 알지? 너하고 같은 역에서 타는 애. 지난 토요일에 덕수궁에서 헤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만났었다는 얘긴가? 나는 이제는 입석까지 꽉 차서 보이지 않는, 통로 맞은편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소녀 쪽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짚히는 일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영식이가 내가 타고 있는 칸에서 거의 매일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거의 내가 앉아있는 근처에서였다. 난 그걸 나하고 친해지려고 그러는 건가 착각했었다. 그런데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고 내 쪽으로 서있지도 않았다. 통로 기준으로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내릴 때도 따로 내려서 갔다. 난 좀 섭섭했지만 길수에게 한 것처럼 일부러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그건 길수 하나로 족했다.
'그러면 그게 게 내 첫사랑 소녀를 우연히 본 뒤에 마음에 들어 소녀를 매일 찾아서 탄 것이었구나.'
소녀와 나는 늘 같은 칸에서 타고 다녔다. 타는 곳이 시발역이라 자리가 여유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같은 칸, 같은 자리에 얼마든지 앉아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먼저 잡고 앉는 쪽은 내가 많은 편이었다. 역과 집 사이 거리가 먼 편이어서 일찍 서두르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면 소녀는 어김없이 내가 앉아 있는 칸으로 와서 통로에 사람이 없으면 내가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좀 늦을 경우는 소녀가 앉아 있는 칸을 찾아다녀 소녀가 보이는 곳에 앉았고. 이런 나를 보고 동네 단짝친구 호운이는 늘 툴툴거렸다.
"출세하면 여자는 얼마든지 있어. 걔한테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나보다 한 살이 많아 철이 일찍 든 것인지 호운이는 출세라는 말을 아주 쉽게 했다. 고작 고등학교 1학년 생인 데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 왜 그런 얘기를 나한테 와서 하지? 나하고 그 소녀는 실질적 관계가 하나도 없는데. 혹 내 얘기를 이 친구한테 했나? 그렇다면 왜? 이 친구하고 헤어지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나? 아니면 나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이 친구를 이용한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이 소녀를 짝사링하고 있다는 걸 들킬까 싶어서였다.
그즈음 나는 짝사랑 소녀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줌의 용기만 있어도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걸 그 용기가 없어 스스로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젠 마음을 접자. 한눈에 반해버린 소녀를 매일 보면서도 혼자 가슴앓이나 하는 쪼다같은 성격으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잖은가. 마음 고생 그만하자.'
해가 짧아지는 가을이 오면 열차통학은 불가능했다. 집에서 캄캄한 밤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때가서 자연스럽게 포기하자. 3학년 땐 형이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방을 혼자 쓰게 되니 통학할 일도 없어지지 않는가. 짝사랑 소녀의 모습을 매일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 중이었는데 영식이 한테서 이 소녀를 만났다가 헤어졌다는 말을 들은 거였다.

" 근데 은행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야? 상고 출신도 아니고 공고 출신이."
잔을 한 차례 비운 영식은 그게 제일 궁금했었나보다. 하긴 종두도 그런 눈치였었다.
"사연을 얘기하자면 좀 길어. 기회가 오면 얘기해줄게."
내가 명문 Y대를 다녔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은행에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얘기를 뭣하러 하랴 싶어서였다.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공고를 나와 소위 말하는 명문 Y대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직접 체험한 나로서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머리 좋은 애들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국비 장학생으로 다니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본 입장이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 S대는 몰라도 K, Y대는 노력만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영식이만 해도 그랬다.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지만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한 입 두 입 건너 알려지게 마련인데 영식이가 그 그룹에 속했다. 시험을 볼 기회조차 없는 가난한 집 환경만 아니었다면 내가 다닌 Y대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 영식이에게 "나 Y대도 다녔어"라고 말하는 건 교만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 동창들 앞에 나설 일도 없었다. 친했던 애들은 소식이 끊긴지 오래였다. 광수, 경오, 종두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영식이 내가 소식을 아는 동창 전부였다. 내가 Y대를 다닌 것을 아는 유일한 동창인 광수도 다른 동창들을 일부러 만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Y대를 다녔다는 건 어쩌면 무덤까지 가져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영식이 본인이 자세하게 물어본다면 알려줄 수도 있기는 했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은 안 간 거야? 등. 그런데 묻지 않았다. 일면 서운하기도 했지만 종두도 묻지 않은 거로 봐서는 은행에 다니는 자체로 더 이상 뭘 알랴 싶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그보다 훨씬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길수는 왜 찾아?"
"응, 2학년 때 굉장히 친했거든. 내가 굉장히 좋아했었어. 그동안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냈는데 나이가 들어가느라 그런 건지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장은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등."
내 말을 들은 영식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길수, 죽었어. 그것도 오래전에."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들었는가 싶기도 했다."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한창 나이잖아. 혹시 군대 있을 때 사고 났어?"
"아니, 그게 아니고 제대하고 몇 년 지나서야."
"어디 크게 아팠던 거야 아니면 무슨 사고를 당했어?"
여기서 영식은 한숨을 또 푹 내쉬었다. 그러곤 테이블에 놓여있는 맥주를 병째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곤 결심한 듯 말했다.
"길수, 자살했어. 제대하고 한 4년 정도 지난 때였을 거야."
"잠깐, 지금 자살이라고 그랬어? 틀림없는 거야?"
"그럼. 해병대 동기들 모두 장례식장까지 갔다 왔는 걸."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도대체 한창 나이에 왜, 그 힘든 군대까지 갔다왔으면서.
"도대체 이유가 뭐야? 한창 나이에 아파서도 아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왜 끊어?"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다만 한 가지 짚히는 일은 있어. 같이 훈련 받을 때 우울증 증세가 좀 있긴 했거든. 주변이 다 동기동창들이라 그런대로 견뎠는데 제대하고 심해진 거 아닌가 싶어."
숨이 콱 막혀왔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 나 화장실 잠깐 다녀올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멀어보였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수도꼭지를 틀어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물이 계속 나오는 상태 그대로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곤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때마침 용변을 보러온 사람이 자기 볼 일을 끝냈는데도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은 상태 그대로 있는 나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고 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인가? 나처럼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한 몸만 챙기면 되는 삶인데. 그래서 그럤나? 챙겨야 할 가족이 없으니 이 지겨운 세상 훨훨 떠나버리자고 생각했나. 병신 같은 자식,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다면 나 같으면 그 용기 가지고 한 세상 살아보겠다.
문득 대학동기 철오가 생각났다. 내가 낙제한 걸 알려주어 제대 후 복학하는데 큰 도움을 준.철오도 혈혈단신이었다. 길수는 형이라도 있지만 철오는 아무도 없었다. 본인 말로는 그랬다. 그래도 입주과외 같은 걸 하면서 꿋꿋하게 공부하여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잖은가. 너무도 비교되었다. 바보같은 놈. 속으로 한 번 더 욕을 하며 머리를 드니 길수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눈물도 흘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일석아! 날 많이 좋아해줬는데 이렇게 됐다. 난 사실 너를 처음 봤던 그때 이미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엄마, 아빠 일찍 돌아가신 충격이 너무 컸거든. 그걸 억지로 참고 견디며 버텼는데 제대 후 더 이상 세상 살아내기가 싫더라. 하늘나라에서 보니 넌 참 열심히 살던데 난 그런 의욕이 없었어. 그저 엄마, 아빠 곁으로 빨리 가고만 싶더라. 그러니 너나 남은 생 열심히 살다가 와. 기다리고 있을 게."
그러더니 이번엔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역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바보, 등신, 쪼다 같은 놈아. 2년 동안 그렇게 기회가 많았는데 그 기회를 다 날리고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만들어? 영식이한테 내 얘기 못 들었어? 네가 하도 오랜동안 내 애만 태우길래 나한테 접근하는 애들한테 난 이성교제를 하기엔 아직 어리다고 거절하면서 버티다가 때마침 네 동기 영식이가 접근하길래 너한테 자극을 주려고 했던 건데 그것도 무위로 돌려놓고 사라져? 그래도 3학년이 되어 통학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로 기대했는데 아예 사라져 버렸어. 나쁜 놈."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세차게 흔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물기를 닦아냈다. 그러자 길수, 짝사랑 소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내 얼굴이 보였다. 두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