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조선족의 복잡한 이주 경로와 독특한 삶의 리듬을 탐구한 책이 출간되었다. 1990년대 초반 조선족 사회와 연변 전역을 휩쓴 ‘한국바람’의 궤적을 따라가며 몸, 돈, 시간이라는 인류학적 렌즈로 이주노동자의 삶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이주, 경계, 꿈》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 권준희가 쓴 이 책은 미국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고, 2024년 미국동아시아인류학회(SEAA)에서 프랜시스 L. K. 쉬 저술상을 받으며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2년간 연변을 오가며 진행한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7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2023년에 미국, 2025년에 한국 땅을 밟은 이 책은 ‘시차의 글쓰기’의 정수를 선보인다. 저자는 ‘시차를 넘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말을 거는’ 형식을 통해 2025년의 시점에서 ‘가깝고도 먼’ 조선족 이야기를 다시 읽고 다시 질문하며 다시 사유하는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나아가 민족과 국적, 계급과 젠더가 얽힌 ‘경계에 있는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경계 설정과 차별, 배제의 구조까지 성찰하게 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여는 글|이주의 바람
1부 코리안 드림의 부상
1장 소수민족 변경지역
2장 냉대 또는 환대하는 조국
2부 불안정한 꿈들
3장 자유 이동의 리듬
4장 기다림의 노동
3부 새로운 꿈
5장 떠남과 머묾
6장 이주의 고리를 끊어라!
닫는 글|코리안 드림 이후
감사의 글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 책은 지난 30년간 조선족 사회와 연변 지역에 널리 퍼지고 실현되어온 코리안 드림을 해석하고, 오랫동안 ‘적국’으로 여겨졌던 고국, 한국을 향한 조선족의 집단적인 이주 열망에 관한 보고서이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한국에 갔다”거나 “두 명만 모이면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처럼, 지난 30년간 한국바람은 연변 어디에나 불었다. 한국바람은 금전적 성공과 실패, 위장 또는 실제 결혼, 새 아파트와 새 사업, 가정의 부흥 또는 몰락처럼 갖가지 맥락에서 회자되고 또한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 한국바람은 신문이나 학술지, 문학 작품이나 블로그는 물론 일상 대화를 통해서도 분석되고 유포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열망이나 동경, 자부심을 투영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바람이 불러온 갑작스러운 풍요, 물질 만능주의의 팽배, 조선족 공동체와 전통적인 가족 구조의 붕괴에 대한 우려와 비판도 연변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_20~21쪽, 〈여는 글|이주의 바람〉
연변 정착민의 역사는 한족과 조선족을 민족적으로 구별 짓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연변에서 시골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나는 조선족 친구들로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조선족이 허름한 싸리나무 울타리를 둘러 집을 짓는 반면, 한족은 매년 벽돌로 담을 쌓고 또 쌓으면서 조금씩 집터를 확장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구전되는 민족성에 관한 이야기는 조선족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반면, 한족은 한곳에 오래 머물 계획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80세 이상 조선족들은 친족 연결망과 인맥에 의지해 더 나은 경작지를 찾아다니며 동북 지방 전역을 끊임없이 이동했다고 회상했다.
_66~67쪽, 1장 〈소수민족 변경지역〉
한국 정부의 비자 정책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와 재외동포에 대한 정부의 입장 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나는 조선족이 한국의 비자 정책에 얼마나 해박하며, 그 변화에 따라 얼마나 신속하게 자신들의 계획을 조정하는지를 보며 자주 놀라곤 했다. 1장에서 등장했던 지란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비자 기반의 친족 경제를 잘 보여준다. 지란 씨는 1984년생으로, 연변에 위치한 변경지역 마을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다른 농민들에 비해 부유한 편에 속했지만, 농사를 지어 버는 돈만으로는 딸의 연변대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재정적 부담을 덜어보려던 아버지가 알선업자를 통해 한국에 가려고 시도했지만, 비자 신청은 몇 년 동안 번번이 거절되었다. 지란 씨에게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사촌 언니가 있었고, 최대 네 명을 한국에 초청할 수 있었다. 사촌 언니가 본인의 부모님을 초청하고 나니 두 자리가 남았는데, 이 자리를 두고서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사이에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지란 씨가 이야기를 들려주던 때로부터 두 해 전 사촌 언니의 남동생이 중국으로 돌아왔고, 그 빈 자리는 지란 씨의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_96~97쪽, 2장 〈냉대 또는 환대하는 조국〉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다른 조선족들로부터 연변에서 놓여 있던 소득과 지출이 불균등한 상황에 대해 자주 들었다. 연변에서는 ‘과도한 자유 시간’에서 비롯된 소비, 즉 ‘과도한 일상’이 존재했다. 돈은 한국에서 벌지만 소비는 연변에서 이루어지면서, 생산과 소비 사이에 뚜렷한 지리적 분리가 생겨났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는 집을 떠난 것처럼 불편하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달리(Marx 1988, 74),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지 않고도 잘살게 된 조선족들만큼 연변에서의 자유 시간이 자유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들은 노동하지 않는 상태로, 연변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은 ‘일만 하며’ 고독한 삶을 살던 당시에는 연변의 정겨운 분위기를 그리워했지만, 연변에서의 ‘과도한 일상’에 드는 비용은 경제적·정서적 부담이 되었다. 옥순 씨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가 한국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여기며 식사나 잔치에 자주 초대했고, 후하게 돈을 쓰기를 기대했다. 옥순 씨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 번 초대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에요. 초대를 다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지는 거죠.” 이처럼 ‘과도한 일상’은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에게 피로감을 안겨주었기에, 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연결망 유지에 드는 비용 부담 없이 안정적인 수입으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옥순 씨를 비롯한 조선족 이주자들은 광범위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회적 연결망 속 일원으로 살기보다는, 노동하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일밖에 모르는’ 리듬에 익숙해진 뒤로는 연변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이렇듯 ‘1-3-2 리듬’에 따라 연변은 소비의 공간으로, 한국은 노동의 현장으로 삶이 분리되었다.
_82~83쪽, 3장 〈자유 이동의 리듬〉
이번 장에서는 한국과 연변에서 떨어져 사는 부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국경을 넘는 삶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층위의 기다림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발다사르와 메를라(Loretta Baldassar and Laura Merla, 2013)는 이동 중인 이들의 연결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돌봄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국경을 넘나들며 이동하고 결합하는’ 국제 이주 가족은 비대칭적이면서 호혜적인 방식으로 서로 돌봄을 교환하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해외에 체류하며 이동 중인 가족 구성원을 기다리고 책임을 다하는 일종의 경제 행위로서 기능하며, 이들은 부재와 별거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멀리 떨어져도 하나”의 가족으로 지내고자 노력한다(Baldassar and Merla 2013, 40). 나아가 이러한 연결성과 돌봄의 순환뿐 아니라, 국제 이주 가족이 경험하게 되는 취약성, 특히 이혼의 증가나 부부 간 젠더 역학 변화에 주목한다. 부모나 자녀, 그 외 가족을 기다리고 돌볼 때와는 달리, 결혼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 공동의 재정적이고 정서적인 돌봄의 프로젝트를 지향한다. 연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돈이 가는 곳에 사랑이 있다”는 말처럼, 기다림은 송금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고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힘이다. 송금과 배우자의 귀환을 ‘제대로 기다리는’ 동안, 이 기다림의 시간을 공유하고 미래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릴 가능성을 높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보듯, 기다림은 때로는 배신을 동반하기도 하고 불안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또한 젠더화된 역할과 오랜 별거로 인해 부부관계가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_159~160쪽, 4장 〈기다림의 노동〉
2006년 연변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연변 대중가요 〈모두 다 갔다〉에 등장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 연변은 꽤 활기차다는 인상을 받았다. 앞서 왕 사장이 농담처럼 말했던 연변의 “3대 산업”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젊은이들은 외식을 하고 돈을 ‘물처럼’ 써댔는데, 이는 부모가 한국에서 보내오는 ‘비상금’ 덕분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저녁에는 마치 그들이 한턱을 내야 한다는 기대가 존재했다. ‘한국 돈’ 탓에 조선족 젊은이들이 업무를 게을리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제기되었고, 이런 소비 행태는 연변의 고용주들에게 골칫거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버는 만큼 벌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일하려 들지 않는다는 인식도 퍼져 있었다. 데이비드 피츠제럴드David Fitzgerald는 사람들이 한 노동시장에서의 경험을 다른 노동시장에서도 실천하는 이중 노동시장을 지적한다(Fitzgerald 2009). 연변에서 만나 친구가 된 조 사장은 이 이중 노동시장 문제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_213~214쪽, 5장 〈떠남과 머묾〉
2008년을 시작으로 18개월에 걸친 현지조사를 마친 뒤, 후속 연구를 위해 2011년, 2013년, 2016년에 연변을 다시 방문했다. 2011년 여름, 연길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1년 반 사이 크게 달라진 도시의 모습이었다. 한층 정돈된 인상이었고, 고층 건물도 심심치 않게 들어서 있었다. 연길 외곽에 위치한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택시 창밖으로는 곳곳에서 진행 중인 공사 현장이 보였다. 새 도로가 포장되고 있었으며, 주요 간선도로는 확장 공사 중이었고, 도시 남북을 잇는 대교는 개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사 차량과 급증한 자가용은 교통 체증을 유발했다. 특히 연길역이 장춘長春(창춘)과 베이징을 잇는 고속철도망에 편입되면서(해당 노선은 2019년에 완공되었다) 인프라의 신설과 개보수, 확장은 도시와 농촌의 경관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고속열차 개통 이후 연길에서 장춘까지의 이동 시간은 기존의 일곱 시간 반에서 두 시간으로, 베이징까지는 스물세 시간에서 아홉 시간으로 크게 단축되었다. 오랜 시간 현장을 오가며 만난 조선족 이주자들은 이렇듯 연변의 급격한 변화에 혼란을 느낀다고 자주 털어놓았다.
_225쪽, 6장 〈이주의 고리를 끊어라!〉
지난 30년간 코리안 드림은 연변 조선족의 지배적인 꿈으로 자리 잡았으나, 새롭게 떠오른 차이나 드림과 경쟁하면서 그 강도가 서서히 약화되었다. 횡단하는 꿈들은 저마다 깊은 뿌리를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19세기 후반부터 국경을 넘나들던 한민족은 중국과 조선, 러시아와 일본 등이 지배권을 다투던 변경지역에서 쌀농사로 황무지를 개간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다. 1940년대에는 한인 이주 농민 중 상당수가 중국 동북 지방의 공산주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결과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중국 내 소수민족 집단으로 공인받아 정부, 교육, 언어, 미디어에 대한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한인들이 중국의 농지를 취득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이들의 삶은 연변이라는 자치주 변경지역 안에 제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조선족은 중국 내 대도시를 시작으로 북한, 소련, 한국, 일본, 미국에까지 이르는 외부 세계와 연결되었고, 그 결과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 바람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남’과 ‘이주를 통한 발전’이라는 꿈은 중국, 러시아, 북한과 접한 국경지대의 지리적 위치,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민족 관계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교차하는 중첩된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협상하고 실현되었다. 이러한 꿈들은 실제로 수많은 조선족에게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었으나, 어떤 이들은 이주와 발전, 사랑과 돈, 가정과 일 사이에서 지속적인 삶의 불안정성에 시달리거나 그 꿈에 배신당하기도 했다.
_161~162쪽, 〈닫는 글|코리안 드림 이후〉
출판사서평
♦미국동아시아인류학회(SEAA) 프랜시스 L. K. 쉬 저술상 수상작(2024년)
♦김현미(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추천
‘한국바람’을 타고 국경을 건넌 조선족
문화인류학자가 따라붙은 12년의 연구
사람들이 국경을 건넜다. 시작은 19세기 말,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정착한 조선인들이었다. 이들은 1949년 중국 정부로부터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사회주의 교육과 중국식 사회화를 거쳐 중국 공민으로 자리 잡았다. 냉전 시기에는 한국과의 연결이 단절되었지만,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한국 정부로부터 ‘재외동포’로 인정받았다. 이후 한국 사회로 진입해 ‘코리안 드림’을 좇는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집단이 되었다. 조선족의 이주 경로는 이 몇 줄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게 전부일까? 문화인류학자이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 권준희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 조선족의 복잡한 이주 경로와 독특한 삶의 리듬을 탐구한 책이 출간되었다. 1990년대 초반 조선족 사회와 연변 전역을 휩쓴 ‘한국바람’의 궤적을 따라가며 몸, 돈, 시간이라는 인류학적 렌즈로 이주노동자의 삶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이주, 경계, 꿈》이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민주화와 중국의 급격한 사유화가 교차하며 새로운 정치·경제가 맞물리는 지점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욕망 사이에 놓인 변경지역으로서 연변의 지정학적 의미를 탐구한 이 책은 미국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고, 2024년 미국동아시아인류학회(SEAA)에서 수여하는 프랜시스 L. K. 쉬 저술상을 받으며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2년간 연변을 오가며 진행한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7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2023년에 미국, 2025년에 한국 땅을 밟은 이 책은 ‘시차의 글쓰기’의 정수를 선보인다. 권준희는 ‘시차를 넘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말을 거는’ 형식을 통해 2025년의 시점에서 ‘가깝고도 먼’ 조선족 이야기를 다시 읽고 다시 질문하며 다시 사유하는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에스노그라피로 읽는
코리안 드림의 흥망과 그 이후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는 단순 현지조사가 아니다. 연구 대상자들과 오랜 시간 현장에서 함께하며 그들의 관점, 언어, 일상 리듬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인류학적 연구 방식을 일컫는다. 현장을 ‘천천히’ 포착하고, 그 결과물을 세상에 ‘늦게’ 소개하는 이 방식은 태생적으로 ‘시차의 글쓰기’를 취할 수밖에 없다. 조사 시점과 출간 시점 사이의 시차만이 아니라, 듣기와 쓰기 사이의 시차, 말한 자와 기록한 자의 시차, 그리고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았으나 그 순간에 존재했던 감정과 맥락 사이의 시차까지도 품고 있는 에스노그라피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16쪽). 그러나 어떤 현상이 과거에만 머물게 두지도 않는다. 지난 이야기를 끊임없이 불러내 끈질기게 다시 묻는다.
2004년 여름, 서울 홍제동 의주로교회에서 조선족 노동자들을 만난 것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104쪽). 당시 이곳에는 ‘불법 체류자’로서 강제 추방될 위기에 놓인 60여 명의 조선족이 머물고 있었다. 1999년 한국 정부가 제정한 ‘재외동포법’에서 사회주의 중국의 공민이라는 이유로 ‘재외동포’ 범주에서 제외된 이들은 개정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교회 안에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조선족 이주자들이 ‘고국’에서 마주하고 있는 고통을 목격한 저자는 이 일을 계기로 “조선족 이주자만큼이나” 한국과 중국을 횡단하며, 그들의 복합적인 삶을 조망하는 연구에 착수한다. 한국 사회에 노동자로 이주했지만,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구별된 법적ㆍ문화적 위상을 갖게 된 조선족들의 삶에 바투 따라붙어 면밀히 추적한다.
《이주, 경계, 꿈》은 “계속해서 다시 듣고 다시 쓰게 하는” 작업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이다. 저자는 참여 관찰, 인터뷰, 장기간 현장 생활을 토대로 연변을 기반으로 한 조선족 이주자들의 생애사와 그들이 품은 열망과 좌절, 경계와 이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한국으로의 집단적인 이주 물결을 가리키는 ‘코리안 드림’이 어떻게 시작하고 성장하고 쇠퇴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 개인의 ‘꿈’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꿈의 생애사’라는 독창적인 시선으로 그려낸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남’과 ‘이주를 통한 발전’이라는 꿈이 중국, 러시아, 북한과 접한 국경지대의 지리적 위치,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민족 관계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교차하는 중첩된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협상하고 실현되었음을 살핀다. 또한 조선족 이주는 국가 간 이동을 넘어, 농촌과 도시, 주변과 중심, 교육과 노동, 가족과 자본이라는 다층적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실천임을 밝힌다.
2009년 6월의 어느 화창한 날, 조선족 등산 모임 회원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등산 모임은 연구자인 내게 조선족의 일상 리듬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날 우리는 일광산으로 향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자연적 경계 역할을 하는 두만강이 긴 띠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변경지역으로서 연변이 지닌 특성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북한 쪽 외딴 소도시는 인구 밀도가 낮고 빈곤하며 퇴락해 보이는 반면, 중국 쪽은 농경지와 마을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부분 중산층이었던 등산 모임 회원들은 그 옛날 자신의 친지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변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고, 남북한에 모두 친척을 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도 이야기했다. 또한 중국의 세계적인 부상과 중국식 사회주의가 이룩한 경제적 위업에 대해 중국 공민으로서 갖는 자부심을 역설하기도 했다.(57쪽)
국경 넘기의 시작부터 새로운 꿈의 부상까지
폭넓게 이해하는 조선족 이주 역사
총 3부와 6장으로 구성된 책은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 관한 방대한 기록과 분석으로 가득하다. 1부 ‘코리안 드림의 부상’은 소수민족 변경지역이자 다양한 욕망이 교차하는 공간으로서의 ‘연변’을 소개하고, 이동하는 민족인 조선족이 한국과 조우하는 역사적 과정을 살핀다(59쪽). 특히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고국’과 조선족이 갖는 만남의 의미를 고찰하면서, 이들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독특한 이주노동자 집단으로 형성된 문화적ㆍ정치적ㆍ법적 과정을 서술한다. 특수한 “민족 관계성”, 즉 민족적으로는 ‘한인(韓人)’이지만 남한의 ‘한국 국민’은 아닌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지위를 활용해 한국 노동시장이 특수한 노동력으로서 그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확산했다고 주장한다(47쪽). 조선족 노동자가 보유한 민족적 가치가 어떻게 한국의 특정 서비스업에 적합한 노동력으로 자리 잡아 왔는지 주목하고, 이들이 값싸고 유능한 노동자로 ‘환대’받는 동시에 법적 제약과 사회적 차별로 ‘냉대’받는 이중적 양상 또한 들여다본다(90쪽).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치적 박해의 이유가 되었던 ‘친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한국으로 이주하는 수단으로 변화했는지를 조명한다(92쪽).
“우리는 남편 쪽 사촌이 한국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기뻤어요. 한국에 초청받을 수 있을 테니,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았죠. 그런데 막상 그 사람들이 우리를 초청하기로 했을 때는 비자 신청에 돈을 내라고 하더군요. 5,000달러를 달라는 거예요. 199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꽤 큰돈이었어요. 그래도 불법 알선업자를 통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래 같아서 사촌에게 그만큼을 지불했어요. 한국에 입국한 다음에는 그 사촌과 더는 관계를 하지 않았어요.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국에서 가깝게 지내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전에 이미 끊어진 관계였으니까요.”(94쪽)
2부 ‘불안정한 꿈들’에서는 몸, 돈, 시간이라는 인류학적 렌즈를 통해 코리안 드림의 변동성 속에 존재하는 희망과 좌절, 번영과 쇠락, 이동성과 비이동성을 분석한다. 조선족 여성 노동자 세 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반복적인 이주가 만들어낸 공간의 분할, 즉 돈을 ‘벌기’ 위한 장소인 한국과 돈을 ‘쓰기’ 위한 장소인 연변에 초점을 맞춰 논지를 전개한다(125쪽). 재외동포법 개정과 함께 미등록 조선족을 대상으로 일종의 사면 조치로서 고안된 H-2 비자 제도 아래에서 ‘1-3-2’ 리듬(5년짜리 비자로 한국에서 일하기에 앞서 1년간 중국에 머물렀다가 돌아온 후 3년간 한국에서 일하고 다시 입국해 2년을 일하는 구조)으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생활에 따라 형성된 독특한 시간성의 면면을 살펴본다(123쪽). 조선족 여성들의 이야기는 고도로 젠더화된 일터(한국)와 젠더화된 가정(연변)을 오가며 이주의 리듬, 한국 돈의 힘, 젠더와 민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노동하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국제적 이주의 주체로 자리매김해왔는지를 드러낸다. 또한 ‘기다림’을 노동의 한 형태로 바라보며, 비이동성 또한 이주를 추동하는 핵심 동력임을 주장한다(159쪽). 연변에 남아 사랑하는 가족의 귀환을 기다리고, 그들이 보내오는 송금을 기다리고, 한국에 갈 기회를 기다리는 이들의 삶을 소개하면서 ‘이주하지 않는 이들’ 없이는 반복적인 이주의 과정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호 씨: 10년 전 내 아내가 한국에 간 뒤로 너무 외로워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거의 매일 마셨지. 연변에는 외로운 ‘보토리’들이 너무 많아. 달리 뭘 할 수 있겠어? 집에 가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데.
등산객 1: (부러워하며) 하지만 자네 부인은 정기적으로 송금을 해줄 거 아냐? 지금 가지고 있는 집이 몇 채지? 두세 채 되나?
등산객 2: 요즘에는 이혼하지 않았고, 집이 한두 채 있고,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송금이 계속 들어오면 행복한 거야.
호 씨: 다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아내를 10년 넘게 기다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나는 그 사람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어. (웃으며) 한국에서 중국으로 돈을 보내주면 사랑도 여전한 채라고 그냥 믿는 거지.(156쪽)
3부 ‘새로운 꿈’은 중국 경제의 부상에 비추어 코리안 드림을 새롭게 성찰하고 재평가한다. 조선족과 한족이 코리안 드림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특히 ‘연변에 머물기’와 ‘연변을 떠나기’를 둘러싼 열망과 망설임에 주목한다(190쪽). 이를 통해 연변 내 송금 주도형 경제 발전이 만들어내는 국제 이주를 향한 열망과 민족 간 관계가 재정의되는 과정을 포착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수많은 조선족이 ‘차이나 드림’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점을 논한다. 또한 연변 지역에서 회자되는 한국바람의 재평가에 주목하며, 그 이후 국면에서 드러나는 희망, 좌절, 불안, 후회의 정서를 기록한다(226쪽). 이어지는 ‘닫는 글’에서는 이렇듯 30여 년간 지속된 코리안 드림이 점차 지배적 지위를 상실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그 이후의 삶’을 조명한다. 코리안 드림이나 차이나 드림과 같은 ‘국가의 이름으로’ 단일화되고 단순화된 꿈을 넘어, 새로운 삶의 경로를 모색하는 새로운 세대의 부상을 전망한다.
요즘은 한국에서 일하는 게 부끄러워요. 친구들에게 또 한국에 간다고 하면, ‘아직도 한국에 가?’, ‘왜?’라는 반응이 돌아오거든요. 무시당하는 느낌이죠. 그래서 요새는 그냥 중국 남부, 선전이나 광둥에 가서 사업한다고 말해요. 한국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고 싶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비밀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거죠. 나는 학교도 많이 못 다녔고 특별한 기술도 없어요. 몸뚱이 하나가 전부예요. 그러니까 조선족인 내가 한국에서 할수 있는 건 단순한 육체노동뿐이죠. (중략) 그런데 연변에 돌아와도 방법이 없어요.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에 가야죠.(258쪽)
경계에서 꾸는 꿈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
《이주, 경계, 꿈》은 연변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연변은 조선족의 우선권과 한국어 사용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조선족자치주이자 소수민족 변경지역으로, 서로 다른 꿈들이 교차하며 경합을 벌여온 역동적인 공간이자 지난 30년간 한국바람이 불러온 구조적 변화 속에서 삶의 리듬과 돈의 흐름 또한 초국가적 양상을 띠게 된 현장이다.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공간’인 동시에 ‘사람’이고, ‘출발점’이자 ‘또 다른 가능성’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간의 단조롭고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며 새로운 경계와 관계를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서의 연변을 만나볼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은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 연변이라는 지역성,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배경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이주노동과 국제 이동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조선족의 사례’에서 시작해, 이주의 꿈이 어떻게 탄생하고 재구성되는지 조망한다. “기존의 북미ㆍ유럽 중심 연구를 넘어, 이주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프랜시스 L. K. 쉬 저술상 심사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 사회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한결 각별하다. 저자가 영어로 쓴 책이 모국어인 한국어로 다시 번역되면서 이 책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인 한국 땅을 찾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족 혐오를 멈추자” 호소하지 않는다. 조선족 이주자의 삶의 경로를 탐구하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과 이동, 경험 속에 얽힌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구조를 밝히고 이주민과 한국 사회가 처한 다층적 문제를 분석한다. 민족과 국적, 계급과 젠더가 얽힌 ‘경계에 있는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경계 설정과 차별, 배제의 구조까지 성찰하게 한다.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과 탈냉전 한국이라는 두 체제의 틈새에서 조선족 이주자들이 겪어온 다양한 ‘꿈의 경합’을 촘촘히 그려낸 이 책은 연구자뿐 아니라 폭넓은 독자층을 아우른다. ‘이주’라는 익숙한 단어 뒤에 감춰진 복잡한 시간성과 사회적 경계의 층위를 드러내며, ‘우리’와 ‘타자’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묻는다.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국경을 건넌 조선족 이주자들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건너 한국 사회에 당도했다.
춘자 씨 뒤편으로 또 다른 조선족 여성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은 일자리 문의로 계속 울려대는 사무실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직업소개소를 나서면서 춘자 씨는 소장의 태도에 대해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소장은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사실은 조선족을 무시해요. 저 사람 하는 말 좀 보세요. 조선족이 돈만 밝힌다고 생각하잖아요. 한국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면서요. 한국 사람들은 뭐 돈 안 좋아하나요?” 춘자 씨는 스스로를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는 좋은 조선족’으로 묘사했지만, 방금 나눈 대화에서 보았듯 직업소개소나 일터에서 조선족에 대해 갖는 편견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돈만 좇는다는 낙인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우리는 돈 벌려고 여기 온 거잖아요, 안 그래요?”(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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