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아버지란 이름으로(完)>

[단편소설] "아버지란 이름으로"

Bawoo 2014. 5. 14. 01:15


 "아버지란 이름으로"

              

그는 볼 때마다 늘 기운이 없고 뭔가 풀이 죽은 듯한 모습으로 테니스장에 나타난다. 요즘 들어 조금 나아졌다곤 하지만 몇 년 전 처음 봤을 때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그때는 참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요 몇 년 사이에 확 달라진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그 이유를 잘 몰랐다. 단지  "저 사람 집안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아들에 관한 이야기.

 

그와 나는 일년 전부터 일 주일에 두 번 테니스를 치기 위한  정기 모임에서 만난다.  테니스 실력이 뛰어난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끼리 모여 운동하는 모임을 같이 뜻을 모아 만든 이후 늘 그래왔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최근까지도 별로 없었다. 관심도 거의 없었다. 필요에 따라 운동을 하기 위한 만남을 갖긴 하지만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전혀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서로에게 호감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단지 테니스를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 그리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도 한창 서로를 알아가며 일생동안 우정을 쌓아가는 시절인 성장기 10대 때도 아니었다.  이제는 삶의 노년기에 접어든 60이 넘은 나이인 것이다. 게다가 초반도 아닌 중반.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아니 본 건 관내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장에서였다. 언제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게 대략 5~6년여 전쯤 되니 그 전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구청 주최로 봄, 가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동호인 대상 시합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상대팀 선수로 처음 만났다. 이후 내가 마지막으로 나간 대외시합에서 상대팀 선수로 다시 만났다.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은 정기적으로 만나 같이 운동하는 사이가 되어있다.

처음 본 그의 인상은 그리 호감이 가는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쪽. 체구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눈매가 지나치게 날카롭고 뭔가 모르게 상대방을 위압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아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처신이 몸에 밴 내 눈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살아온 듯 싶은 느낌. 부모로부터 넉넉한 재산을 물려받아 남의 밑에 들어가 일할 필요성이 없는 삶을 살았거나 말 한 마디로 수하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했을 것 같은 느낌. 아무튼 내가 살아온 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나이는 얼추 비슷해 보였는데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나이를 알려면 본인이 직접 나이를 밝혀야만 가능한데 단지 시합을 하기 위해 잠시 만난 사이에 물어볼 수는 없었다. 시합이 끝나면 다시 볼 기회도 없는 터라 그럴 필요성도 안 느꼈다. 나이가 비슷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이런 나의 선입견을 한 방에 깨버리는 모습을 곧바로 보여줬다. 마치 내 생각을 미리 읽고 "당신 사람 잘못 봤어"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시합을 하려면 양팀 선수들이 코트 중앙에 있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게 되어 있다. 그때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하는 "반갑습니다"란 인사말이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버린 것이다. 손을 잡고 인사를 할 때 그의 행동은 너무도 정중하고 예의가 발랐다.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주 은근하고 예의를 갖춘 목소리. 상대방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 이 사람 보여주는 인상하곤 언행이 영 딴판일세.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웠으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새는 없었다. 그럴 필요성까지는 안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가 끝난 뒤 곧바로 시합에 들어갔고 나 아니 우리 팀은 졌다. 이후 내가 마지막으로 대외 시합을 나간 때에 한 번 더. 그의 실력이 나보다 월등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승부욕의 강도에서 차이가 난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합 당일의 몸 상태와 파트너의 실력도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승패에 집착하기 보다는 즐기는 위주로 하는 나의 성격 탓이 가장 컸다. 평소 성격이 어떻건 일단 시합에 나가면 이기는 걸 목표로 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되는 성격이었다.


테니스를 좋아는 한다. 그것도 엄청. 그러나 아는 사람들끼리 즐기는 차원으로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까지이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하고 경쟁해야 하는 대외 시합은 성격에 잘 안 맞았다. 경쟁에는 강인한 승부욕으로 무장한 정신자세가 필요한데 난 이게 잘 안 되는 성격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상대방 실력이 나보다 약한 경우에도 잘 이기지 못했다. 그 원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린 마음 탓이기에 딱히 해결 방법도 없었다. 해결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승패에 신경 안 써도 되는 단순 친목형 시합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속 테니스회에서 대외시합에 나가달라고 부탁을 해도 으레 거절을 해왔다. 나가봤자 팀에 도움은 안 되고 짐만 된다고. 시합에는 연령대별로 3개 복식팀이 나가게 되어 있다. 30대, 40대, 50대 이렇게. 50대가 제일 먼저 시합을 하는데 이 팀이 져버리면 나머지 두 팀은 무조건 이겨야 된다.  50대조인 나는 이런 부담을 팀에 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으레 거절을 한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실력은 아직 한창 부족한데 시합 나가는 걸 좋아하는 40초반의 젊은 친구가 참가비 다 댈테니 같이 좀 나가달라고 사정사정해온 것이다. 이것까지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60대인 나는 참가 조건이 아무 연령대로나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알고서였다.

"우리 조합으로는 단 1승도 어려운데 그래도 괜찮겠어? 괜히 아까운 참가비만 날리고 말텐데."

"그래도 예선 두 게임은 무조건 하잖아요. 그거면 족합니다.

 "대신 이번 한 번만이야. 앞으로는 절대 안 돼. 성격에도 안 맞는 시합을 시간, 돈 들여가며 참가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우리 회원들끼리만 즐기는 선에서만 할테야."

"알겠습니다." 

철강 대리점 사업을 한다는 성격좋은 이 친구는 시합에  나갈 수 있게 된 것만도 좋아 죽겠다는 듯 활짝 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간 시합에서 또 그와 맞붙게 되었다. 관내 그 많은 팀 중에 이리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마치 각본을 미리 짜기라도 한듯 제비뽑기가 그리 된 것이었다.

"이 사람과는 전생에 무슨 질긴 인연이라도 있나. 왜 자꾸 만나지?"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겉으로는 "오랜만입니다."라며 담담하게 인사를 했다. 결과는 이번에도 또 졌다. 질 때마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내용상으론 크게 뒤진 것은 아니었다. 내 파트너가 조금만 더 실력이 있었으면 이길 수도 있는 게임이었다. 대외시합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꼭 이겨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실력이 월등하게 약해서 진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자위를 하고 말았다. 마음 한켠이 좀 씁쓸해지는 것을 어찌하지는 못 하면서.

 

"어떻게 게임을 할 때마다 질수가 있담. 아무리 승패에 크게 연연 안 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이건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거야."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최종 인사를 하기 위해 네트 앞으로 다시 모였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정식으로 인사를 청했다.

"나 우일석이라고 합니다. 테니스를 너무 잘 쳐서 도저히 이겨 볼 방법이 없네요. 기회가 되면 서로 만나서 친선게임 좀 하고 싶군요."

이런 나의 제안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 게임에 이겼다곤 하지만 내가 만만한  실력이 아니란건 그도 알았을테니 마다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염수동이라고 합니다. 시합에서 우리 팀이 이기긴 했지만 노형도 잘 치던데요."

"그럼 우리 연락처를 교환하고 기회가 되면 같이 게임 좀 할까요?"

"아 뭐. 그러십시다. 나도 테니스라면 밥 먹기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허허하고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자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리도 내 맘에 안 들었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사람은 첫 인상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겪어봐야 한다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났었다.

 

그렇게 먼 발치서 봤던 첫 인상의 나쁜 느낌을 직접 접촉하는 과정에서 풀고 헤어진 뒤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실천으로 옮기기기는 쉽지 않았다.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속된 테니스회가 서로 다르다보니 따로 연락해 만나는 자체가 쉽지 않은 때문이었다. 동호인 테니스는 통상 팀당 두 명씩해서 4명이 있어야 게임이 가능한 복식 위주로 시합을 한다.  우리 둘을 제외한 2명이 추가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2명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우선 실력, 나이가 비슷해야 하는데 막상 구하려고 하니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별 수없이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같이 꼭 운동을 안 해도 크게 아쉬울 일이 없는 이유도 한 몫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1 년여전 쯤 연락을 하게 되었다.  연락처를 서로 주고 받은지 족히 5~6년은 흐른 뒤였는데 이때는 연락을 꼭 해야 할 이유가 생겨 있었다.

 

"아! 여보세요?  나 우일석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있지요?"

"아! 오랜만입니다. 뭐 그냥저냥 지냅니다." 

"다름 아니라 관내 테니스 좀 치는 60넘은 사람들 끼리 낮에 모여 테니스 치는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좋지요. 근데 사정이 있어 매일은 곤란하고 주 1~2회 정도는 가능합니다."

"아! 네에. 나도 매일 운동할 생각으로 추진하는 건 아니니 그건 염려 안 해도 됩니다."

그는 한 마디로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예의 바리톤 톤의 점잖은 말투도 여전했다. 그런데 뭔가 모르게 조금 피곤에 지친 느낌이 들게하는 목소리였다.

"이 사람 무슨 일이 있나. 목소리가 왜 이리 힘이 없지?"

좀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이유를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일단 얼굴 한 번 보실까요? 내가 사용하는 코트로 파트너 한 명 데리고 오시지요."

 

내가 관내 테니스 좀 치는 60이 넘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니스 모임을 만들 생각을 한 이유는 전적으로 냉정한 세월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몸 상태 때문이었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버린 몇 년 전부터 세월은, "당신, 젊은 친구들과 테니스 시합을 하는 것은 이제 무리야. 계속 그리 심하게 운동하면 결국 다치고 말꺼야"라는 경고 신호를 몸의 여기저기를 통해서 보내오기 시작했다.

먼저, 바른 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팔목에도 통증이 왔다. 남들 잘 걸리는 테니스 엘보 한 번 안 걸리고 30여년을 잘도 지내왔건만 이제는 팔꿈치도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어깨도 예전 같지않았다. 그러더니 언제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실력이 뛰어난 젊은 친구들 팀과 맞붙은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마 지지않으려고 무리해서 공을 쫓아 다닌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왼쪽 허벅지 뒤쪽의 근육에 뭔가 뜨끔하는 느낌이 들더니 곧바로 뛰는게 불편해졌다. 다행이 병원에 안 가고 버텨도 될 정도였지만  그때 퍼뜩 든 생각이 "이거 계속 이러다간 정말 큰 일 나겠군.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한다고 하다가 되레 상하겠네. 아무래도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겠군." 이었다.

 

테니스를 당장 끊을 수는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워낙 좋아한 운동이라 끊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았다.  좋아한 게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직장에 다니고 있던 40후반까지는 토요일 오후와 공휴일는 아예 테니스장에서 살다싶이 했다. 아내의 눈총을 받아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30 후반 신혼 때는 이런 이런 일도 있었다. 아내나 나나 늦은 결혼이었는데 88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 해였다.  섬머타임제가 실시되었다. 아마 올림픽 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근할 때도 한낮이나 다름없이 환했다.  아무리 낮이 긴 한 여름에도 저녁 8시면 어두워지는데 이때는 밤 9시가 돼도 날이 환했다.  이리 좋은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아침 출근길에 테니스 가방을 챙겨들고 나와 테니스를 치고는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아내는 이런 나를 새댁들이 입는 색동옷을 입고서 화가 난 표정으로 지켜만 보았다. 아내 마음이 어떨지 알기는 했다. 그렇다고 이리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섬머타임제는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틀림없이 없어질 것이고 그리되면 평일에 테니스를 칠 기회는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내로부터 "신혼 때 테니스에 미쳐 집에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을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이를 감수할 각오를 하고서 테니스를 친 것이다.


이런 정도로 좋아한 테니스를 몸이 안 따라 준다고 당장 그만 두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3개월 정도 테니스를 쉬면서 걷기 운동으로 대체를 하려고 해봤다. 잘 안 되었다.

걷기 운동은 재미가 너무 없었다.  운동이 되는 것 외에 얻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테니스는 다른 사람들과 기량을 겨루는 가운데 얻어지는 즐거움이 있다. 남들과 시합을 해야되니 실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자기 발전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테니스 실력을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꽤 많은 투자를 했었다. 좋아하는 운동이니 투자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도 안 했다. 남들과 기량을 겨루며면 이 정도 투자는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테니스를 그만 둘 경우 사람들을 못 만나게 되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대인관계는 원래 싫어하는 편이다. 하는 일도 혼자서 씨름해야 하는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이고. 그러니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일은 오히려 바람직스럽지 않은 쪽에 속했다. 그러나 운동을 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건강이 잘 유지되는 것은 필수조건인 것이다.

 

60이 넘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떠올랐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어려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쉽게 동의하리라 생각했던 잘 아는 선배는 "전에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 동호회 소속이라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또래는 동의는 하면서도 "매주는 곤란하다"고 그랬다. 그러니 당장 모임이 이루어지기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모임 아이디어를 낸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같이 운동할 사람들을 열성적으로 물색하고 다녔다. 그가 그러는 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도 낮에 운동하는 모임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던 참인 것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뜻이 맞아 같이 운동할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내가 직접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모임 자체에 난색을 표한 나이 많은 선배를 통해 테니스 잘 치는 사람 몇 명에 대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대외 시합을 잘 안 다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반면에 그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하고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와 나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모임의 출발은 처음부터 순탄하질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힘들었다.  영입 대상으로 점 찍어둔 사람들에게 이젠 나이들이 들어서 "밤에 운동하는 것보단 낮에 하는 것이 훨씬 좋고 다들 60이 넘은 사람들끼리니 서로 마음 편하게 운동할 수 있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해봤지만 대부분 소극적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으나 그 중에 가장 큰 이유 한 두가지를 들자면 대충 이랬다.

 

제일 큰 이유는 이미 가입해서 운동하고 있는 모임이 있는데 굳이 또 모임을 만들어 운동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인 것 같았다. 모임을 만들면 따로 회비도 내야 할 터인데 금전적 지출을 추가로 해야된다는 점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다음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뭔가하면, 대외 시합장에서 오며가며 마주쳐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들이긴 했지만 공식적인 모임을 만들어 한 울타리 안에서 계속 어울려 지내는 것은 뭔가 마뜩잖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이었다.

내가 모임 구성원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테니스를 좋아하고 꽤 잘 친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사회생활 경력이 각양각색이었다.  같이 어울려 운동을 하기엔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예를 들면 이랬다. 한 명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교장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동생 회사에서 택배 기사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장까지 하고 은퇴한 사람입장에서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 경력같은 것은 일단 무시하고 밀어 붙이기로 했다. 테니스를 같이 할만한 실력이 되느냐와 나이만 보기로 했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가 바라는 수준의 사람이 없다고 해서 참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임은 4명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 "우선 4명이라도 되면 모임을 시작해보자"는데 그와 나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두 명이 더 합류 의사를 밝혀왔다. 일단  6명으로 모임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명이면 게임에 들어가는 4명을 빼면 2명은 대기 상태가 된다. 두 명씩 교대로 쉬면서 연속 2게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불필요하게 시간 낭비를 안 해도 되는 최적의 운동 조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소문이 나면서 모임에 참가하는 인원은 점차 늘어났지만 사용할 코트가 마땅치 않은 게 문제가 되었다.  모임 출발 초기 참가 인원이 많지 않을 때는 내가 회원으로 있던 동호회가 사용하는 코트를 임시로 이용했지만 임차 문제가 난항을 겪음에 따라 다른 코트를 물색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소속된 동호회가 사용하는 코트를 한 겨울 동안 사용했으나 그곳도 중복 사용 문제로 임차를 거부당하면서 다른 곳을 물색해야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많은 마음 고생을 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한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동호회의 일부 까탈스러운 회원들한테서 "외부 사람들이 왜 남의 코트에 와서 공을 치느냐"고 닥달을 많이 당한 모양이었다. 동호회의 원로 자격으로 "회원들 한테 전혀 피해가 안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버티려고 해봤지만 "임대도 안 되니 다른 코트를 이용하라"고 하는 회장단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이런 사연을 나중에 알게 된  나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많이 갖게 되었다. 비록 본인의 이해관계도 걸린 일이긴 했지만 모임이 깨지지 않도록 애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에 소속돼 있었던 테니스 회에서 나온 뒤 달리 소속 모임이 없이 '이순 모임'만으로 테니스에 대한 갈증을 풀기로 한 나에게는 그의 그런 노력이 안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의 테니스 실력이 예전만 못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60 중반이니 공의 스피드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처음 봤을 때 실력에 비해서 눈에 뜨이게 약해져 있었다. 나도 다리를 다치고 한 3개월 쉬는 바람에 실력이 뚝 떨어져 예전 실력으로 되돌리는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원래 실력으로 되돌아왔는데 그는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 그 막강하던 실력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는 모양이구만. 어떻게 저렇게 실력이 확 줄 수가 있지. 혹 술, 담배를 많이 해서 어디 건강이 안 좋은가?"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세월 탓이야 누구나 다 같이 겪는 일이니 이를 십분 감안하더라도 그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술, 담배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실력이 그리 나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 사람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실력이 줄어들 리가 결코 없어."

그의 테니스 실력에 대한 나의 의문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쉽게 풀렸다. 그러니까 이순 모임을 결성하고 한 3개월 쯤 지났을 때였다. 아직은 모임이 확실하게 자리가 안 잡혀있는 상태이던 때.  그날은 그의 모습이 안 보였다. 모임이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는데 안 나온 것이다.  모임이 아직 제대로 자리가 안 잡힌 때여서 누가 안 나오면  모임에 참여를 안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던 때였다.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모임을 만들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그가 안 나왔으니 말이다. 혹 마음이 변하여 모임에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하여 총무에게 물어봤다. 그가 적극 추천해서 내가 임시로 했던 총무일을 맡아 하고 있는 나이로 몇 년 후배인 총무에게.

 

" 염수동씨 무슨 일 있읍니까. 왜 안 나오죠?"

" 아! 염선배, 오늘은 아들 병간호해야 한답니다. 형수님이 큰 보험 계약 건이 있어서 병간호 당번하는 날을 바꿨답니다."

"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들 병간호라니?" 나는 깜작 놀라서 총무에게 다시 물었다.

"아!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염선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인 상태로 있는지가 꽤 오래 됐습니다. 그래서 형수님하고 하루씩 교대해 가면서 병간호를 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라니, 그리고 식물인간이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어 총무에게 다시 물었다.

 

총무는 염수동씨와 절친한 사이다.

나이가 4년이나 차이가 나서 형님, 동생하지만 실상은 친구나 다름이 없이 지낸다. 당사자들이 시큰둥해 해서 없던 일이 되기는 했지만 한 때는 서로 사돈을 맺으려고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런 총무니 염수동씨에 대해서는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 것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의 사이인 것이다.

 

"염선배 요즘 사는게 사는게 아닙니다.  아들 그리되고 나선 테니스 치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데도 포기 안 하고 저리 병간호하며 지내는지가 벌써 여러 해 됐을 겁니다."

총무는 그동안 말 할 기회가 없어 못해서 답답했었다는 듯 그의 아들이 당한 사고에 대해 줄줄 이야기했다.

 "아니 어쩌다 그리 됐대요?"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답니다. 근데 그게 좀 황당한게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리 됐답니다. 무단 횡단을 한 것이 아니고 건널목에서 신호가 떨어진 것을 보고 건너다가요."

"아니.어떻게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해요.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사고를 낸 사람이 염선배 아들 또래의 아가씨였답니다. 술이 만취한 상태였다고 하네요. 염선배 아들은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이 아가씨는 술을 마시며 놀다가 술 취한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낸 거랍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힌 이야기지요. 자신의 장래를 준비하느라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나오는 학생을 술이나 마시며 놀고있던 또래 아가씨가 차로 들이 받은거니 말입니다. 그것도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을 보고 건너는 것을요."

 

더 이상 총무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를 않았다.

가 왜 그리 우울하고 기운이 없는 표정을 하고 테니스장에 나타나는지, 테니스 실력이 왜 급작스럽게 어져 있는지, 이유를  다 알 것 같아서였다. 남의 일이라곤 하지만 더 들어봐야 마음만 아플 것 같았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겪어 본 일이 있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나도 아픔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다 커서 그 힘들다는 대기업 취업까지 해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들을 유년기 시절에 잃어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단 몇 시간만을 잃어버렸다 찿은 사건이었지만 그 단 몇 시간 동안에 얼마나 애가 타고 마음이 아팠는지는 글로 다 표현을 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사는 동안에 그리 놀라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 본 적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전에도 후에도 전혀 없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그때 자식이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었다.

나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사랑이란 걸 전혀 못 받아보고 살았다. 아버지에게 어머니 말고  따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탓이었는데 이때문에 가슴 속에 응어리가 맺힌 성장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내가 이 다음에 커서 자식이 생기면 내가 못 받은 사랑까지 다 자식에게 주겠노라는 생각을 철이 들기 시작하는 중학교 시절부터 줄곧 했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 느꼈던 절망감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오죽했으면  "만약 아들을 못 찾으면 아내하고이혼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까. 그 당시에 아들은 우리 가정을 존재하게해주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이런 역할은 이제 성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취업을 한 후엔 부모인 나와 집사람을 챙겨주려고 마음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식이란 존재가 부모에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그러니 자식이 사고를 당해 병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그의 아픔이 얼마나 클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총무한테 그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난 그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 말 한 마디마디도 조심해서 하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지라 터놓고 반말 비슷하게 지내는 단계까지 이르렀는데 이를 되돌린 것이다.  대신 술, 담배 좀 줄이고 건강 관리에 신경쓰라고 잔소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문병까지 가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었다.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문병을 가보기엔 명분이 너무 없었다. 수년 전부터 안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교유가 있은 건 불과 1년여 전 테니스 모임을 만들면서부터였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아들 문병을 가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난 남의 일에 가급적 무심해하는 성격이었다.  나에게 관련된 일을 될 수 있는 한 남에게  안 알리고 혼자 조용히 처리하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하는 성격이다보니 남의 일에도 될 수 있는 한 무심하게 지내게 된 것이다. 이런 별난 성격은 서운하다는 소리를 듣게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무심하게 지내는 사이다가도 무슨 일만 있으면 온갖 인연을 다 끄집어내어 연락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성격이 변하지 않는 한은.

 

이런 나의 마음이 병문안 한 번 가봐야겠다는 쪽으로 바뀐 건 전적으로 노환으로 쓰러지신 모친 때문이었다. 모친이 노환으로 쓰러지신 건 어느 정도 예견이 되어있던 일이었다. 이미

90줄에 들어선 연세인데 80 중반이 넘어서부터는 눈에 뜨이게 노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음 속으론 한없이 안타까우면서도 별 대책이 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사실만큼 사신 연세이니 그저 큰 탈 없이 조용히 주무시듯이 돌아가시면 당신이나 자식들에게나 얼마나 큰 복일까만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 먹은대로 될 리는 없는 일.

몇 달 전, 모친과 같이 살고 있는 큰 여동생은 한 밤중에 "모친이 걷지를 못하고 옆으로 그냥 쓰러지신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연락을 해왔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도 병간호를 다니고 있지만 만약에 이런 일이 자식한테 생길 경우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해보면 한 마디로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모친이야 사실만큼 사신 연세인 탓에 자연스럽게 노환이 온 것이다. 마음 편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으로서 할 도리만 하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 일이야 어디 그런가. 사람 사는 세상은 늙은 부모가 먼저 세상을 뜨고 젊은 자식은 그런 부모를 보내드리는게 순리이다.  그 뒤에 다시 자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뜨고.  그런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거나 사회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되어 부모의 병간호를 받아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굳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그런 나날을 보내야 되는 삶이 되리라는 것을. 

 

그의 아들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래서 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상태인가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비록 아들 본인이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부모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해놓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마음 상태도 궁금했다. 아들의 회생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인다면 왜 포기 못하고 있는 것인가도 궁금했다. 총무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가는 낙을 잃어버린 나날이라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문병을 가고 싶다는 말을 직접 하기는 많이 조심스러웠다. 총무 말로는 남들이 문병오는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남한테 보여주는 자체가 싫은 것 같더라구요. 전에 친한 사람 몇이서

가보려고 했는데 한사코 마다하더라구요."

그래도 가보고 싶었다. 그도 내가 모친 병간호하러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막무가내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총무에게 "내가 문병을 가려고 한다"고 넌지시 말을 전해보라고 했다.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볼 생각에서였다. 행이도 완강하게 거부는 안한다고 했다. 그래서 날을 잡았다. 그가 병간호 당번하는 날인 테니스 모임이 있는 날 다음 날로. 그러나 그에게 문병을 가겠다고 직접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심스러게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디냐?"고만 물었다.

"J 병원이요."

그는 생각보단 순순히 아들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알려주었다. 테니스 모임을 만들려고 같이 애쓰고 난 뒤부터 매주 두 번씩 1년여를 만나다보니 많이 친해진 게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나이 차이가 거의 없는 것도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J병원은 두 곳이 있다. 옆 B시와 맞닿아 있는 곳에 있는 대형 산재병원, 그리고 동네 근처에 있는 중급 규모의 병원. 나는 이 중에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중급 규모의 병원으로 갔다가 보기 좋게 헛탕을 쳤다. 당연히 집에서 가까운데 있는 병원에  있겠거니 내 마음대로 짐작하고 무작정 찾아간 것인데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입원실들이 있는 곳을 찾아 올라가 병실 문패를 들여다 봤지만 어디에도 염씨 성을 가진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물으니 그런 환자는 없단다. 별수 없이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나 우일석인데 아들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디요?'

"지금 어디에 있소?"

"동네 J병원에 왔더니 암만 찿아도 안 보입니다."

"거기가 아니고 옆 B시와 경계에 있는 산재병원이요."


그가 알려준 병원은 친한 고교동창 모친 문상 때문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40후반 까지 다녔던 직장의 친했던 동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병원 아래 쪽 큰 도로를 경유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오며가며 많이 봐 온 곳이기도 했다.

 "제길, 진작 제대로 알았으면 승용차로 움직이면 아까운 시간 낭비 안해도 됐을 텐데. 별 수 없지. 어차피 오늘 오후 한나절은 없는 시간으로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니 빨리 가보기나 하자."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래봤자 결론은 하나였다. 전철은 무조건 타야 했다. 한번 갈아타야 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전부 합쳐봐야 겨우 세 정거장. 다행히 헛걸음한 병원 바로 앞에 전철역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시간이 절약될 수 있었다. 병원은 전철역서 내리면 걸어서 15~20분 정도면 충분할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어림 잡아도

1시간 이내면 충분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용차를 이용했다면 이미 도착하여 만나 보고 있을 시간이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요량으로 병원을 내 마음대로 대충 짐작하고 움직인 경솔함이 소중한 시간을 길거리에서 허비하게 된 것이다. 하고픈 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시간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 요즈음인지라 시간은 늘 아까웠다. 모친 병간호하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있는 요즈음은 더욱 그랬다. 나이는 점점 더 노년으로 향해가고 있어 시간은 자꾸 줄어들고만 있는 것이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책 읽어야 하는 시간.

 

전철을 타려면 꼭 계단을 내려가야 된다. 근데 요즘은 이 계단 오르내리는 게 상당히 부담스럽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승강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이용하기에는 아직은 눈치가 보인다. 아직 무릎이 성한데 나보다 늙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타기도 싫었다. 그래도 계단을 내려갈 때는 조심하는 버릇이 생겨있었다. 불과 한 해 사이였다. 작년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단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이거 아차해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는 날이면 대형 사고를 각오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몸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든다. 젊은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겅중겅중 뛰다시피 내려가는 계단을 나는 조심조심 내려가야 하는 나이가, 몸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부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젊다는 것은 살아내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니 그만큼 세파에 시달릴 나날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니까. 젊음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혹 모든 여건을 다 마련해 놓고 있는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타고 난다면 또 모른다.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갖고 태어나는 행운. 이럴 경우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되돌아가겠지만 지금의 부모들과 다시 만나는 조건이라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성장기를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부모를 둔 사람들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 힘든 고생을 다시 해야하는 조건으로 젊음을 되돌려 받는다면 그것이 좋을 일이 뭐 있겠는가.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도 기왕에 태어난 목숨이면 늙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사고없이 살아내야 한다. 젊은 나이에 큰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거나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다. 한 세상 살아낼 자신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모양새의 삶을 살건 자기 의지와 관계없는 불행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오만가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젊은이들을 바라보노라니 새삼 모친과 함께 해 온 지난 힘들었던 성장기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참 지긋지긋하게도 힘들었던 시절. 그 시절이 그나마 풀린 건 아마 20년을 다녔던 제법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 되면서부터였겠지만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과  내 꿈을 맞바꾼 것이기에 꼭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 부모를 잘 만나는 행운을 타고 나야 된다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말은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고생하며 살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뛰어봤자 부모를 잘 만난 행운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평일 낮이라 그런지 전철 안은 한산했다.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눈에 뜨였지만 내릴 역까지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터라 그냥 서서 가기로 했다. 아직은 다리가 튼튼하게 버티어 주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 다리가 과연 언제까지 잘 버티어 줄 것인가도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요즈음임을 생각도 하면서.

 

그러고 보니 모친은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서 걷지를 못하게 되어 쓰러지신 것이다. 다리에 힘이 없어진 이유가 연세가 많은데 따른 노화가 가장 큰 원인이기는 할 거다. 그렇지만 평소에 운동을 너무 안 한 것도 많이 작용했을 듯싶다. 모친은 바깥 나들이를 전혀 안 하셨다. 특별히 나갈 곳이 없다는 이유를 댔지만 그래도 건강을 챙기는 기본 걷기운동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전혀 안 한 것이다.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으면서 집안 일 하는 외에는 티브이만 보는 생활을 하셨다. 그 이유가 모친과 같이 살고 있는 여동생의 유별난 성격도 한 몫 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당신 스스로 바깥 나들이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이 아들인 내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닥달을 해서라도 운동을 하라고 그랬어야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뵈러가서 하는 말이 무슨 힘을 발휘할 것인가. 그러나 모친은 당신 건강은  당신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임에도 불고하고 병원 가는 자체를 마다하는 별난 병원 기피증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때문에 몸을 더 망가뜨린 것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모친이 거동을 전혀 못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데 대한 책임을 자식으로서 안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모친 병간호하러 다니는 일이 그 책임의 일부를 감당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자식으로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으로 하는 행동. 만약 자식이라면 의무감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있을 것인데.

 

모친이 노환으로 쓰러진 이후 내 일상생활에는 큰 변화가 왔다. 이는 아래 두 여동생도 마찬가지여서 모친 때문에 우리 삼남매의 일상 생활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모친 병간호하는데 시간을 들이느라 그동안 늘 해왔던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시간이 대폭 줄어든 일일 것이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여동생들과 역할을 분담하여 주 이틀만을 병간호하는데 보내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힘이 들었다.  병간호하는 일 중 가장 힘든 일인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모친이 "아들에게 맨 몸을 보여 줄 수 없다"고 한사코 반대를 하셔서  큰 여동생이 대신해 주고 나는 단지 곁에서 지키고만 있는데도 그랬다. 여동생 사는 집이 내가 사는 집하고는 지역을 달리해서 멀리 떨어져 있느 탓에 이틀을 왔다갔다 하는 자체가 워낙 힘들었다. 궁여지책으로 여동생 집에서 하루를 자는 것으로 방식을 바꿔봤지만 힘드는게 크게 덜어지지도 않았다. 러니 두 여동생은 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 것이다. 가장 힘든 일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인데 이 일을 하려면 모친의 몸을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노쇠한 몸이라도 몇십 킬로는 나가니 말이다. 거기다가 성인의 몸에서 나오는 변이라 아기들 변과는 달리 악취도 엄청 심했다. 이를 참아내면서 뒷처리를 해야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여동생들이  "어릴 때 키워 줬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보답을 해야 할 때" 라며 힘든 것을 마다않고 열심히 병간호를 하고 있는 점이다.  막내 여동생의 경우 사는 집이 나보다 훨씬 먼 곳인데도 3일을 모친 병간호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두 여동생도 지쳐서 "더 이상 힘들어 못하겠으니 요양원으로 모십시다"라고 말하게 될까 봐 은근히 걱정되지만 아직은 잘들 견뎌내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친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황이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  퇴원해서, 쓰러지기 전 원래 살던 큰 여동생 집에 다시 돌아와 계신 것이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누워 있는 상태인 것만 달라진 셈이다.  자식인 우리 삼남매가 교대로 모친 간병 일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우리 자식들에겐 큰 변화가 생긴 일이고. 

모친이 처음 쓰러져 한 달여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우리 삼남매 모두 우왕좌왕하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병간호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니 원래 살고 있던 여동생 집에서 누워 계시는 지금은 병석에 있는 모친이나 모친을 간병하는 우리 삼남매나 한결 편한 상황인 것이다.

 

병원이라는 곳은 아픈 사람이야 아픈 탓에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그 아픈 사람을 간호해야 하는 건강한 가족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곳이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은 온통 아픈 사람들 뿐이니 건강한 사람까지 어디 아픈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병으로 입원해 있는 병실은 살아서 나간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이기에 참고 견딜만 하다. 그러나 노환으로 쓰러진 모친이 입원한 병동은 입원해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노인들 뿐이었다. 거기에는 한 평생을 누구의 남편, 아내, 엄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할아버지로 잘 살아왔을 사람들이 냉혹한 세월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만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정확히 언제가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머지않아 똑 같은 모습일 나를 절로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몸서리쳐지게 싫은 일이었다. 결국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문턱. 그 문턱에 나도 머지않아 서 있어야 된다는 연상을 하게 되는 것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피하려고 애를 써도 피해지지 않는 불행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저 담담히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싫지만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일.

모친의 경우도 사실만큼 사신 뒤에 찾아 온 노환이기에 굳이 불행이라고 생각할 일은 아니다. 병간호하는 우리 삼남매가 힘들고 누워서 꼼작 못 하는 상태인 모친도 힘들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저, 살아가면서 부모를 먼저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자식으로서 응당 겪어야 할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게 안될 것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될 나이인 아들이 졸지에 큰 사고를 당해 거의 식물인간인 상태에 있어 병간호를 해야 하는 자체가 믿기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하긴 부모의 입장이라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굳이 자식 덕을 보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아주면 그것으로 부모 마음은 흡족한 법이다. 그런데 그런 복을 누리기는 커녕 늙으막에 자식 병간호 그것도 회복 가능성도 거의 없는 병간호 일에 매달려야 하는 삶이라니. 정말이지 사는 낙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 절로 짐작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총무 말로는 "의사가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포기하라는 걸 거절하고 병간호에 매달려 살려놨다"는 것이다.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리 살려놓고 병원을 전전하며 간병을 하는 것이 벌써 10년도 더 됐을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10년이 아니고 5년이라는 말을 그한테 직접 듣기는 했지만 5년도 짧은 세월이 아니니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할까는 직접 겪어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병원을 전전하는 이유는 워낙 장기간 요양 급여를 받은 탓에 한 병원에서 3개월 이상은 있을 수 없는 규정 탓이라는데 자세한 내용은 당사자인 염수동 씨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고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전철에서 내려 그가  아들을 입원시켜 놓은 병원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걸어서 가는 방법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마을버스를 타는 방법이다.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겠지만 애시당초 고려 대상에서 뺐다. 굳이 비싼 돈 들여 택시를 탈 필요성은 안 느낀 탓에. 마을버스를 타기로 했다. 걸어가도 충분했지만 일단 빨리가서 만나보는 것이 시급해서였다. 만나 본 뒤엔 어차피 오후 시간을 버리기로 한 일정이었으니 전철역까지 천천히 걸어가도 될 일이었고.

시간은 벌써 해가 서쪽으로 방향을 많이 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서너 시쯤. 계절은 어느새 해가 짧아지는 때로 접어들어 있었다. 마치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내 삶처럼.

"이러다간 저녁 무렵이나 돼서야 병원에서 나올 수 있겠네. 가뜩이나 요즘 그림 그릴 시간도 많이 부족한데 염수동씨 마음 안 상하게 하려고 너무 눈치보다가 귀중한 시간만  헛되이 낭비하고 마는군. 뭐 할 수 없지 . 왕에 엎질러진 물이니 어서 만나보기나 하자."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철역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병원을 갈 수 있는 곳 까지는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기껏해야 5분정도 걸리는 거리.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다시 10여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병원이 마을 버스에서 내려 다시 큰 길을 건너야 되는 맞은 편 산 중턱에 있어서이다. 병원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아마  300미터가 채 안 될 것이다. 그래도 산인지라 경사가 제법 있다. 심장이 약한 편인 나는 조금은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된다.

 

병원에 가는 일은 언제나 싫다. 병원에 간다는 것은 나나 가족이 아프거나 아니면 친한 지인이 아파서 입원을 했거나 지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서 조문을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병원 가는 일에는  즐거울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 가는 일만 해도 그렇다. 한창 사회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다 싶이 된 한 젊은이를 보러 가는 길이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일인 것이다. 명목이야 같이 테니스 운동을 하는 회원 위로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의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보러 가는 것이다.

총무의 말을 들은 뒤로 언제인가 기억은 안 나지만  "병원에서 포기하라는 걸 말 안 듣고 살렸다면서요?" 라고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물었더니 그때 그는 말했다.

 "만약에 부모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겁니다. 자식 새끼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지요"라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만약에 부모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생 노력을 포기했을거라는 말로 이해했었다. 부모야 어차피 사실만큼 사신 나이이니 의사가 포기하라는 말을 하는데도 포기를 안 하기엔 자기의 희생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내가 그런 상황에 부딛치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의사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늙으신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식물인간 상태라면 의사가 회생을 단념하라고 했을 때 포기를 안 하고 언제까지나 병간호를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에 자식이라면?"

나는 사실 그의 아들이 과연 어떤 상태이기에 포기를 안 하고 저리 고생을 하며 병간호를 하는가가 궁금했었다. 그의 말로는 부부가 교대로 병원 보호자용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며 간병을 한 것이 5년은 더 되었다고 했다.  말이 쉬워 5년이지 젊은 나이도 아닌데 병원 잠을 하루를 걸러가며 자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병원에서 잠을 자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든 일인가는 직접 겪어 본 일이 있어 잘 알고 있다. 집사람이 몇 차례 병원에 입원을 하는 바람에 많게는 일주일을 내리 병원에서 자 본 적도 있어서이다. 최근에는 모친 때문에 병원 잠을 자야했고.  그때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무엇하나 편할게 없는 그런 생활은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마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보호자 입장으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 5년여라니?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내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닥쳐봐야 알 일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잠시 숨을 돌릴 겸 벤치에 앉았다. 병원 맞은 편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산을 바라보면서. 그 산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서해 바다가 자리잡고 있다. 저 산 위에 올라가면 서해바다가 보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 입구에 와 있는데 병실이 몇 층에 있습니까?"

"2층 000호입니다."

해는 서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 저녁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해는 머지않아 저 산너머 서해바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 날 다시 떠오를 것이다. 사람의 삶은 한번 기울면 끝이지만 해는 또 다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병석에 누워 있는 모친, 같은 길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는 나와 염수동씨 그리고 염수동씨의 아들이. 모친이나 나와 염수동씨는 지금 죽는다해도 그리 크게 아쉬울 것까지는 없는 나이다. 나만해도 할아버지 돌아가신 연세보다 몇 년을 더 산  60 중반을 넘어서 있는 나이이니. 그렇지만 염수동씨의 아들은 그렇지가 않다. 세상을 한창 살아가야 할 나이인 것이다. 그런 나이에 죽음이나 기다리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라니.

엉덩이가 잘 안 들렸다. 무거운 마음이 엉덩이를 짓누르고 있어서였다. 힘겹게 일어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병실로 향했다. 마음먹고 온 이상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병원 안은 조용했다. 산재병원이다보니 외래환자보다는 입원환자, 그것도 장기치료를 요하는 환자들이 많아 문병객이 많지 않은 때문인 것 같았다. 조용해서 좋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무거운 마음을 같이 실어 터벅터벅. 병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운동을 하러 나간 것인지 6인실 넓은 병실에 환자들도 별로 안 보였다. 그는 침대에 걸터 앉아 휠체어에 타고 있는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표정이 지금까지 내가 줄곧 봐 온 지치고 우울한 표정이 아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눈빛에는 자애로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아이구 사랑스러운 내 새끼"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감명은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테니스장에서는 늘 우울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식을 마주하고 있을 때는 180도 달라진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자식이란 존재가 부모에게 뭐길래 평소와는저리도 다른 표정의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에 병간호 대상이 자식이 아닌 부모라도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 모친이 쓰러진 뒤부터 일주일에 이틀을 의무적으로 병간호를 하러 다니고 있지만 그것이 모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남다른 효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자식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하는 일이었다. 기회만 된다면 병간호 의무에서 빠지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모친과 같이 살고 있는 큰 여동생은 생업인 장사와 병간호 일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이 들 때가 있는 것 같았다.  "며칠간 장사를 쉴테니 병간호하러 안 와도 된다"는 연락이 오는 적이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병간호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모친 입장에서는 어차피 세 자식 중 한 명이 병간호 일을 해주면 되는 일이다. 그게 내가 아니라고해서 문제가 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병간호를 안해도 되는 것이니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업을 하면서 병간호를 해야하는 큰 여동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당시 마음은 그랬다. 지금 다시 그런 연락이 와도 똑같이 기분 좋아할 터이고. 그러나 간병을 해야 할 대상이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라면? 그때는 의무감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 아닐까?

 

그에게 왔다는 신호로 한 손을 들며 눈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의 아들을 쳐다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아들이기에 그토록 애정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오! 한눈에 보아도 잘 생겼다.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만 하겠다는 느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리고 머리도 엄청 좋을 것 같은 느낌. 언젠가 운동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그가 자랑스럽게 "잘 생기고 머리도 수재"라고 한 말이 절로 떠올랐다. 아직 젊은 나이라 그런지 환자라는 느낌도 별로 안 들었다.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 겉모습만 봐서는 아주 건강한 정상인으로 보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만 아니면 우리 늙다리들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그려. 허허."

나는 그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하며 농담 비슷하게 말을 건넸다.

돌아 온 그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아주 충격적인 말.

"식사를 못해서 코로 영양제를 넣고 있는 형편이요. 음식을 씹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뇌가 손상돼서 명령을 전달 못 해서 그렇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아들을 다시 보니 과연 그랬다. 코 한 쪽에 무슨 줄을 꼽고 있었다. 아마도 이 줄을 통하여 식사대용 영양제를 맞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도 초점이 잘 안 맞아 있었다. 말도 거의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아버지와 같이 운동하는 아저씨야. 인사드려."라고 말하자 알아듣고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긴 했으나 고개를 잘 숙이지도 못했다.

 

잠시 지켜본 것이지만 정상인 곳은 하나도 없었다. 말을 알아듣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데도 불고하고 너무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라서 그리 보이는 걸꺼요. 일종의 착시현상이랍디다. 젊은 나이라 외모가 건강해 보여 별로아픈데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

과연 그랬다. 노환으로  쓰러져 좌측 팔 다리가 마비된 모친에 비하면 그의 아들은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아마도 이제 겨우 30이 갓 된 젊은 나이인 탓이겠지만 모친이 거동을 전혀 못 하고 하루하루 수척해져 가는 모습과 비교하면 금방이라도 회복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염사장! 너무 힘들어서 어찌하오. 어떻게 회생 가능성은 있는거요?'

"현재로선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그럽디다. 뇌를 다친 것이 치명적이라 정상으로 돌아오긴 어렵다고 해요." 그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세월 간병을 하며 지내다보니 이젠 마음을 비운 것 같았다. 말투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그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내 말을 받아줬다. 아마도 내가 문병을 간 것이 내심 많이 고마웠던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문병 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총무에게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갖고 문병을 가는 자체를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할 터이긴 했다. 60이 넘어 테니스를 좋아한다는 인연으로 만나 테니스 모임 만든다고 같이 고생하고

1년 여를 매주 만나는 사이가 되다보니 마음도 많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뭐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별도리가 있겠소. 자식 놈이 몸이 정상은 아니지만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저리 살아있는데 애비로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간병 할 수 있는 한은 끝까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요."

그는 피곤에 지쳐 힘이 없는 듯 하면서도 아들을 끝까지 간병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병원비도 장난이 아닐텐데 경제적인 문제는 없는거요?"

"집 사람이 보험회사를 다니는 관계로 사고 나기 전에 아들 이름으로 보험을 들어논 게 있었어요. 그 덕분에 병원비는 보험회사에서 다 나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그려."

 "그까짓게 다 무슨 소용이요 아들이 저러고 있는데. 그런 보험 혜택 안 받아도 좋으니 아들이나 회복됐으면 좋겠소. 그리고 보험처리가 안 되는 것들이 소소하게 많아서 그 비용도 만만치가 않아요. 아들 저리되고 나서부터는 병간호하기 위해서 운영하던 공장도 임대 해서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 수입으로 다 해결하는 중이요."

 "사고 낸 아가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이 잘생긴 남의 집 귀한 아들 신세를 망쳐놓고 그 부모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해놓은 아가씨 행적이 궁금해서 다시 물어봤다.

"그게 좀 이상하게 됐는데 사고 낸 직후 일시 구속됐다가 내가 합의를 해주니 풀려난 모양입디다."

"그럼 만나는 봤어요?"

"웬걸요. 사고 친 아가씨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언니라는 여자가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싹싹 빌기에 합의를 해줬더니 그 이후론 두번 다시 발 그림자도 안 합디다."

"그럼 합의금은 얼마나 받았어요. 남의 집 귀한 아들 신세를 망쳐놨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도리일 것 같은데."

그는 나의 이번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안 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금전적인 문제라 아무래도 얘기하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돈 얘기라 정확히 말하기는 그렇고 다만 너무 적은 금액을 받고 합의를 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다오."

자세히 말하고 싶어하지 않아 그가 얼마나 받고 합의해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 표정이 뭔가 많이 후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보여 충분치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사실, 합의금이 얼마인가가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전도양양하던 한 젊은이의 삶은 이미 망가졌고 그의 가족들도 같이 고통을 받고 있는 마당에.  상황은 이미 벌어진 것이니 기왕이면 금전적인 부담없이 병간호라도 가능할 수 있게 보탬이 될 정도는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더구나 사고를 낸 아가씨는 너무 죄스러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얼굴 한번 내 비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다. 이유가 어찌됐건 찾아와서 사고 당한 젊은이와 그 부모 앞에 무릎꿇고 백배 사죄를 해도 부족한 짓을 저지른 것 아닌가? 

자신은 일시적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신 뒤 잔뜩 취한상태로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서 한 젊은이 그리고 그 가족의 삶을 망가뜨려 놓은 것인데 그 피해자와 가족  앞에 얼굴 한 번 안 내밀고 돈 몇 푼 합의금 조로 내놓곤 그만이다?  만약에 그리 행동을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안 돼서 그리 한 것이라면 법제도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았는데 어떻게 그래도 된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원하지 않은 사고를 언제든지 당할 수도 있고 낼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고를 낸 입장이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피해를 당한 사람과 그 가족에게 백배 사죄를 해야 하는 일 아닐까? 단순한 차량 파손 사고도 아니고 사람이 다쳤고 그것도 회생이 어려운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이라면  금전적 보상 이전에 인간적인 사과가 먼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니. 나는 내가 당한 일이 아닌데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주의 말이 저절로 퍼부어졌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는 민망한 그런 말들.

 

"그래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요?"

나는 그의 계획이 궁금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아들을 적지 않은 나이에 언제까지 병수발을 들며 지낼 것인지가.

"계획이랄게 뭐 있겠소. 지금처럼 집사람과 하루걸러 병원 잠을 자면서 병간호하며 사는 거지.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지면 퇴원해서 집으로 데리고 가 병간호를 하는 거고. 그러면 나도 몸이 조금 편해지니 그것만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밖에 별 도리가 있겠소. 어차피 회생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내 복이고 팔자다 생각하며 힘이 닿는 데까지 병간호하며 같이 살아가는 거요. 비록 거의 식물인간 상태지만 저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내 장담하건대 아마 우형이 내 입장이 돼도 똑같이 행동할거요. 그게 바로 자식을 대하는 모든 부모의 마음일 테니까."

 

그랬다.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내가 그와 같은 상황이 돼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하며 가슴 속으로 땅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멀쩡하게 눈뜨고 살아있는 자식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게 있는데 아들이 만 45세가 되면 일단 보험급 지급 유효기간이 끝납니다. 그리되면  재심사를 해서 추가 지급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들 지금 나이가 30이라며 45세라면 15년뒤인데 그때 염사장 나이가 몇인지 알기나 하쇼?  80이요 80. 그럼 그때까지 지금처럼 병간호하며 살겠다는 거요?"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제 정신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쩌겠소. 아들이 살아있는 한 그리 살 수밖에 없는 거 아니요? 그리고 병간호하느라 몸이 고달프고 힘들긴 하지만 아들을 먼저 보낼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지금 이대로라도 아들이 오래오래 살아줬으면 하는 생각이라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맞은 편에 있는 빈 침대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운동 나가고 없는데 저 침대에 있는 환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 상태요. 나이가 60정도 됐는데 병간호를 누가 하는 줄 아쇼. 80이 넘은 아버지가 하고 있다오."

 

그 말을 들은 나는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60이 다 된 아들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연령대인 80이 넘은 아버지가 병간호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가 이 말을 한 이유가 자기도 그리 병간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 염사장 그럴 각오라면 우선 술,담배부터 끊으쇼. 특히 담배부터. 아무리 장수 시대라곤 하지만 60이 넘은 나이부턴 누구도 건강을 장담 못 한다는 건 잘 알잖소. 지금처럼 술 ,담배를 많이 하면 80까지 산다는 보장이 있겠소?

 그는 나의 이 말에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근데 그게 잘 안 되니 난들 어쩌겠소. 금쪽 같은 자식 놈 저리 되어노니 사는 재미도 없고. 유일한 낙이 테니스 치는 것 하고 소주 한 잔에 담배 피우는 일이니.  사실 요즘은 소주는 마실 시간 자체가 없고 담배도 줄이긴 많이 줄였다오."

 

"담배는 줄일게 아니라 아주 끊어야 합니다. 담배가 얼마나 해로운가는, 나보다 댓 살 위인 사촌 형님과 아저씨뻘되는 양반이 다 폐암으로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사촌 형님은 고등학교 시절 나하고 같이 자취를 했었는데 그때 이미 골초여서 근 50여년을 그리 담배를 피워댔으니 폐가 성할 리가 있었겠소?  아저씨뻘 되는 양반도 집안이 어려워 젊어서부터 힘든 일을 많이하다 보니 술, 담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고요. 아무튼 담배는 무조건 끊어야 합니다."

그는 나의 이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아들 운동시킬 시간이니 병실 밖으로 나가자"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의 아들은 혼자서 휠체어를 움직일 수가 있었다. 말도 잘 못 하고 걷지도 못 하지만 한쪽 팔로 휠체어 퀴를 굴려 재활 운동하는 곳으로 스스로 찿아갈 수는 있었다. 이 점이 정신도 또렷하고 말도 잘 하지만  거동을 전혀 못 하는 모친하고는 달랐다. 모친은 살 큼 사신 뒤에 찿아 온 노환인 탓에 치료를 해서 나을 병이 아니었다. 100%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설사 회복이 돼서 다시 걸어 다니실 수가 있게 돼도 앞으로 사실 날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다르다. 이제 겨우 30이니 기적적으로 회복만 된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이인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인 그의 입장에선 절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가 않을 것이다. 설사 정상인으로 돌아 올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노환이신  모친을 대하는 내 마음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없는 차이. 사랑하는 마음과 의무감이란 차이. 내가 낳은 자식이고 나를 낳아 준 부모란 차이.

그의 아들과 나의 모친 사이에는 이런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부모라면 진작에 포기했을꺼라는 말을 한 건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살아 갈 날이 자식은 부모보다 많은 것이, 부모는 자식보다 적은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세상을 뜬다면 부모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는 것이고 부모가 천수를 다 하고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뜰 때가 되면 이를 담담하게 받아 들일 수가 있다. 반면 어떤 이유에서건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뜰 일이 생긴다면 이는 부모 가슴에 피멍이 드는 일인 거고. 


내가 문병을 간 가장 큰 이유- "도대체 의사가 포기하라고 한 것을 왜 포기 안 하고 살려내 저리도 고생을 하며 병간호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은 병실 입구에서 그의 아들을 볼 때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해도 절대 포기 못 한다."는 쪽으로.

 

아들을 재활치료실에 데려다 준 그는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이곳에 데려다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한참 운동을 한다는 이었다. 재활치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재활을 꿈꾸며 운동에 열심인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떤 사유에서건 모두 사고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나이가 든데 따른 노쇠함은 있을지언정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는 건강한 사람에 속했고. 측은한 마음과 빠른 회복을 비는 마음을 함께 담아 치료실 안의 모든 사람들을 휘 둘러본 나는 그와 함께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도심을 벗어난 곳의 산자락에 병원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건물 밖 공기는 상쾌했다. 시간은 내가 엉뚱한 병원을 찾아가면서 많이 낭비한 탓으로 이미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병원 앞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서해 바다가 있는 쪽 산에는 하루 소임을 다한 해가  조금씩 조금씩 산 뒤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면서. 와 나는 그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자세로 , 나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기지개를 펴는 자세로. 그리고 나는 그의 담배 피는 모습을 흘깃흘깃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그가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아픔은 세상의 그 어떤 아픔보다 크기가 클 것이다. 사랑하는

금쪽같은 자식이 겪고 있는 고통을 지켜보며 견뎌내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에. 내가 노환 중인 모친을 병간호하는데 따른 힘듬은 육신의 힘듬은 있을지언정 마음의 아픔은 아니다. 이미 사실만큼 산 뒤에 찾아 온 노환이기에 마음을 비울 수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가 아들 때문에 겪는 고통은 병간호를 하는데 따른 육신의 힘듬에다 부모로서 자식의 아픔을 보고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추가로 뒤따르는 아픔인 것이다.  그는 이 아픔을 "부모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참고 견뎌내며 아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삶을 앞으로도 계속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부모도 자식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그 고통을 인내하고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을 터. 그것을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노라니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스러워 보였다. 그가 담배를 거의 다 피운 것을 확인한 나는 "아직 담배를 못 끊고 있나 봅니다"라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는 나의 이 말에 대답은 않고 마지막으로 빨아들인 듯 싶은 담배연기를 서산 너머로 지고 있는 해 쪽을 향해 온 힘을 다 해 뿜어 내었다. 그리곤 담배 꽁초를 근처에 있던 휴지통에 넣었다.

"담배를 끊기는 해야겠는데 쉽지가 않구려. 조금씩 줄여가고 있으니 뭐 끊게 되기는 할겁니다. 아들보다 먼저 가지 않으려면 건강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니까요."

그는 이리 말하면서 멋적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쉽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일부러 문병을 와 줘서 너무 고맙소. 정문까지 배웅할테니 가십시다."라고 말하며  먼저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디뎠다. 나는 그런 그를 황급히 제지하며 "염사장, 그러지말고 아들도 걱정될텐데 여기서 헤어지십시다. 나는 알아서 갈랍니다. 여기서 전철역까지 그리 멀지않으니 운동삼아 천천히 걸어가려고 해요."

"그러면 그리 할까요? 그럼 조심해 잘 가고 다음 주에 테니스 장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힘있게 꼭 싸안아 잡으며 "염사장 너무 힘들어서 어찌하오?  내가 무슨 위로의 말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리라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힘내라고 말하고 싶구려. 부디 힘내시오." 라고 말하고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서 들어가 보시오"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는 "그럼 먼저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물리치료실에 두고 온 아들이 걱정되는 듯 병원 건물을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병원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어깨가 축 늘어져 보이는 힘없는 모습이었으나 발걸음은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힘차고 빨랐다. 그것은 마치 "금쪽같은 내 새끼 빨리 돌보러 가야 된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멀리 맞은 편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던 저녁 해의 고운 햇살이 따사롭게 비쳐주고 있었다. (끝)                       

                

                                           

 

2014. 2. 27 : 쓰기 시작

2014. 5. 11 : 1차 마침

2014. 5. 12~13; 1차 수정 후 끝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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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

 

30 초반부터 테니스를 친 저는 요즈음은 60이 넘은 사람들만 따로 모임을 만들어 테니스를 주 2회 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을 처음 만들 때 위 얘기의 주인공인 같은 나이 또래-실제로는 1년 선배이나 개월수로는 몇 개월 선배-인 염수동(가명)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때문에 많이 친해졌는데 이 사람 놀랍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아들을 간병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IQ가 150이 넘고

키도 180에 육박하는 잘 생긴 아들이 같은 나이 또래의 음주운전한 아가씨 차에 들이받혀 순식간에

식물인간이 된 불행한 삶을 살게되면서 아버지인 그도 즐거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인데 이를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안스러워 글로 옮겨 볼 생각을 했습니다. 

때 마침 노환으로 쓰러지신 모친을 간병하러 다니게 되면서 글쓰는 작업을 구체화 시키기 시작했는데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근 두달 보름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손봐야 할 곳이 많은 관계로 완전 탈고하기

까지는 좀 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우선 1차 탈고를 하고 이 글을 적어봅니다. (2014.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