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戰前 출생 작가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쏘아올리다 / 정희선

Bawoo 2014. 9. 22. 09:22

쏘아올리다 - 정희선

 

서향으로 난 베란다 창문으로 해가 길게 들어왔다. 아침에만 잠깐 볕이 들던 반지하보다는 나은 환경이다 싶었지만 한여름 늦은 오후까지 들이닥치는 불볕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여름 해는 저물기 직전까지 열기를 내뿜었다. 해가 붉게 닿는 방바닥이 눅진하게 녹는 느낌이었다.

 
 내 방에는 커튼이 없었다. 쓸 만한 것을 사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었고 어설픈 DIY 흉내를 내어 천조각을 걸어 두고 커튼입네 하기는 싫었다. 나는 갖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이미 충분히 갖고 있었다. 초록색 플라스틱 서랍장,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플라스틱 앉은뱅이 책상, 나뭇결 무늬가 찍힌 비닐 장판. 나는 가끔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사는 곳이 가상현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구도, 벽지도, 창 밖의 풍경도-모두 나에게는 내가 속한 현실이 아닌, ‘잠깐만 가질 것’이었다. 임시로 머무는 곳, ‘나중’에 제대로 된 것으로 바꿀 것.

 본격적인 여름이 되면서 나는 얇은 이불을 아침마다 베란다에 널었다. 밤새 덮은 이불을 반 접어 집게 달린 옷걸이로 군데군데 집고 빨래 널듯 널어 두면, 불볕은 이불을 통과해 조금 누그러져 들어왔다. 여름 한낮, 무섭게 올라가는 실내 온도도 좀더 견딜 만해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원룸 건물 5층. 다른 건물들보다 한 층 더 높은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월세가 반지하만큼 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 방에 들어오기로 한 결정적 이유는 싼 월세가 아니라 다른 건물에 가려지지 않은 환한 베란다에 반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물어보았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처음 여길 보러 와 문을 열었을 때, 방을 가득 채우고 넘치는 햇빛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룸의 한 면을 온통 차지하는 베란다 밖으로 크게 껑충 뛰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건물들이 이어졌고, 그 옥상들 너머로 멀리 석양이 빛을 아낌없이 던져 오고 있었다. 저 태양을 매일 볼 수 있다니.

 다른 수식어가 붙지 않는 그냥 ‘5층’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원래 살던 곳은 부동산에서 ‘1층 같은 반지하’라고 소개한 곳이었고 그 전에 살던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층 같은 반지하’라든가 ‘2층 같은 1층’, ‘거의 독채나 마찬가지인 옥탑방’이라는 표현은, 참 빤해서 민망했지만 옮길 집을 알아볼 때마다 나는 그런 문구에 초연하기가 어려웠다. 1층 같다면 얼마나 창이 클까, 환기가 좀 잘 되려나, 밖이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고 찾아가 본 방들은 그냥, 반지하였고 나는 천장 가까이 붙은 좁다란 창을 통해 매일매일 맞은편 집의 벽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을 실컷 보았다. 반지하에서 반지하로 옮겨 다니며 살아온 내게서는 언젠가부터 체취 대신 습한 곰팡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환한 방은, 그냥 5층이었다. 나는 그 날 바로 방을 계약했다. 그 땐 이런 여름을 짐작하지 못했다.

  *

 “감사합니다, 사이버 민방위입니다.”

 몰리는 전화에 똑같은 말을 숨가쁘게 반복하는 동안 팀장은 혼자 뭐가 그리 바쁜지 심각한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서류 작업 같은 게 많은가 보다 했는데 일주일쯤 지나며 보니 꼭 그런 건 아닐 거라는 눈치가 생겼다. 아마 전화를 받기가 싫은 것 같았고, 그래도 전화가 폭주할 땐 같이 나눠 받아야 할 텐데 최대한 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사람을 더 뽑지도 않았다. 점심마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본사 직원과 밥을 먹으면서 보니 팀장은 비용 절감을 효율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꽤 칭찬을 듣는 모양이었다. 지난해 민방위 훈련 시즌에는 전화 받는 알바생이 세 명이었다고 했다. 시급이 낮은 대신 틈틈이 개인적인 일을 해도 된다는 약속은 어디까지나 ‘전화 받는 사이에 만약 틈이 생긴다면’을 전제한다는 것을 나는 차츰 깨달았다.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무실에 갖다 놓은 스케치북은 펴 보지도 못하고 서랍에 들어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컴퓨터를 잘 다룰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 겨우 한 시간짜리 사이버 민방위 교육 절차를 이해 못 해 전화 문의를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뭘 몰랐던 것이었다.
 

 첫 출근한 날, 젊은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자는 화를 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동생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훈련을 받을 수가 없어요.”

 “아, 예.”

 나는 팀장이 준 전화 상담 매뉴얼을 서둘러 눈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시면 그 사항을…동사무소에 신고해 주시면 됩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쨍, 높아졌다.

 “저기요, 신고했거든요? 교통사고 당해서 혼수상태로 누워 있은 지 일 년이 넘었어요. 작년에도 신고했는데 왜 또 통지서가 날아오는 거예요? 신고를 지금, 매년 하라는 거예요?”

 옆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지켜보던 팀장이 전화를 뺏듯이 끌어당겨 받았다.

 “예, 죄송합니다. 예,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뇨, 신고는 되신 거구요, 그 쪽 지역대에서 올해 처음 사이버 교육이 시작되다 보니까, 처음이라서, 예, 서류상 문제가 생긴 거 같네요.”

 전화를 끊고 팀장은 에잇, 소리를 뱉으며 의자에 기대 앉았다.

 “안됐어요…. 혼수상태라니.”

 아직도 조금 콩닥대는 가슴으로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데 팀장이 피식 웃었다.

 “일일이 그런 생각 하시면 이 일 못 해요. 사정 있는 사람이 한두 명인 줄 아세요?”

 “이런 일이, 많아요?”

 “어우, 별 사람 다 있어요. 아마 살면서 평생 한 번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도 여기서 다 만나게 될 걸요.”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듯 팀장이 던져 놓은 말은 하루하루 전화를 받을수록 들어맞았다.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예상을 뛰어넘는 이유로 전화를 걸어 왔다. 아무래도 이 일은 그저 사이트 이용 상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밖의 전화 업무’에 더 가까웠다.

 어떤 남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민방위 교육 영상이 ‘심히 마음에 안 든다’며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영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으나 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했다. 남자는 영상을 다시 찍으라고, 그래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가 하면 사이버 민방위 교육 사이트 검색을 왜 특정 검색창에서 하라고 안내하느냐며, 이 세상 포털이 그것 하나밖에 없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멋대로 우리를 공무원으로 단정하고는, 국가 기관에서 특정 사기업 선전을 해주는 이 상황에 대해 몹시 야무진 말투로 시정을 요구했다. 음모론 신봉자인가 싶은 어떤 사람은, “당신들 뭐 하는 사기집단이야?”로 통화를 시작해 “내가 다 알아, 누굴 속이려고”를 끊을 때까지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토록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내게 화를 내거나 큰 소리로 뭔가를 요구하거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참, 이상하고 버거운 경험이었다. 전화를 받는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몰랐으나 그들이 나 ‘개인’과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가, 번번이 생채기 나지 않도록 감정에 가림막을 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르바이트를 계속 할 수 있을까를 회의하게 했던 것은 그렇게 소리를 치고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순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 똑같이 나를 공무원으로 오인하고는 그 때문에 미리부터 기가 죽어 조심조심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손주가 가막소 가 있소”, “이거 안 하믄 또 가막소 가야 되는 거 아니오?” 물어 오던 할머니. 주소창에 입력할 주소를 불러 주자, 공중전화에서 다시 PC방으로 돌아가 볼펜을 빌려 가지고 와서는 한 글자 한 글자씩 받아 적던 남자. 그는, 접속에 휴대전화 인증이 필요하다고 하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내 설명이 그에게 더 깊은 시름만 안겨 준 모양이었다.

 - 이거는 일하다가 잠깐 피씨방에서 듣기에는 무리가 있겄어요.

 - 아, 네, 좀….

 - 알겠습니다. 쉬는 날이…나중에 쉬는 날이 되면 그때 해 볼게요.

 그들은 하나같이 빼먹지도 않고 고맙다는 인사를 꼬박꼬박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인사를 놓치면 큰일이라고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감사합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별로 도와 준 것도 없이 거듭 감사 인사를 듣고 앉아 있는 건 힘들었다. 불쑥, 뭐가 그렇게 감사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가장 많이 나를 놀라게 했던 건, 만 40세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인터넷이 뭔지, 인증이 뭔지, 주소창이나 검색어가 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단순한 설명을 알아듣지 못해 전화기 저편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얼마나 얕고 좁은 곳을 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인가 망연해졌다. 때로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있는 공간, 그들이 살아온 세계, 그런 것들을 그려 보려 애쓰곤 했으나…이 깊고 거대한 세계가, 내가 알 수 있는 크기가 아닌 것 같았다.
 
 *
 
 원룸 건물을 나와 골목 끝까지 가면 골목과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편의점이 있다. 나는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다. 버스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이 내가 주로 장을 보는 곳이었다. 편의점에 종종 들르게 된 건, 편의점 앞 공중전화를 이용하려고 동전을 바꾸면서였다.

 두어 달 전 휴대전화가 끊기기 전에는 공중전화라는 게 아직 남아 있는지 어떤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전화가 끊기고 나자 가끔 공중전화가 필요해졌고, 그 때서야 시야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부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표지석처럼, 완전히 멸종된 줄 알았던 공중전화 부스는 의외로 꿋꿋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 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동안에도 공중전화는 나름 진화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용카드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공중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어쩌면 공중전화가 나보다도 더 재빨리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는 신용카드도 없었다.
 

 일주일, 혹은 열흘에 한 번씩 나는 편의점에서 동전을 바꾸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어이구, 우리 딸, 아빠 보고 싶어 전화했어?”

 아빠의 말투는 전화를 걸 때마다 너무 다정해서 ‘보고 싶긴 뭐가, 그냥 했지’, 괜히 어깃장을 놓아 보고 싶어지는 데가 있었다. 직접 만나면 아빠는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지, 그럼 안 보고 싶나?”

 “맞네, 당근이네. 흐흐흐. 그 뭐 준비한다는 건 잘 돼 가? 아픈 데는 없고?”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두려움의 몸피는 좀 더 단단해졌다

[그림=화가 김태헌]

“아픈 데 없어, 잘 지내. 걱정 마요, 그냥 해 본 거야.”

 “그래, 우리 딸. 밥 잘 챙겨 먹고 다니고. 일 안 된다고 추욱 처져 다니지 말고. 알았지? 아빠는 우리 딸 믿는다.”

 “네에, 아빠나 밥 잘 챙겨 드세요. 라면 같은 거 드시지 말고….”

나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방에서 쓰러졌다가 한 달, 혹은 그 이상이 지난 후에야 냄새를 피우며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와 독립하면서부터 생겨난 그 공포는 언제나 가슴 속 가장 그늘진 곳에 고여 있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인간관계에 그다지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졸업 직후 엄마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두려움의 몸피는 좀 더 크고 단단해졌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궁금해하고 가장 자주 안부를 물어오던 사람, 그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 무게는 내 감당의 임계치에서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두세 달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 했던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늘 비슷비슷한 소리만 하다 끝나는 통화.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생존 확인이었고 때때로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여기서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 당신도, 아직 거기 있느냐는 것.

 그렇게 전화를 걸고 나면, 난파선에 홀로 남은 조난자 같던 내가 그래도 뭍으로 향하는 노젓기를 그만두지는 않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하우스 웨딩에 가 본 적이 없다. 얼핏 듣기로는 호텔 결혼식과는 또다른 고급스러운 결혼식이라는 것 같았고, 규모가 크지 않을 듯한 막연한 느낌이 이름에서 풍겼다. 다른 결혼식보다 좀더 단정한 옷을 입고 가야 할 것 같은데 2단 행어를 샅샅이 뒤집어도 쓸 만한 옷이라고는 대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빨간 원피스는 계절에 맞지 않게 너무 두꺼웠고, 학교 다닐 때 입었던 주름치마는 지나치게 귀엽고 짧았다. 나는 사계절 옷이 죄다 걸린 행어를 갈피갈피 뒤지다가 졸업식 때 입었던 까만 정장을 찾아냈다. 그 옷은 태어나 사 본 옷 중 가장 값비싼 옷이었다. 긴팔 쓰리피스 정장이라 여름 결혼식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별로 두껍지는 않아서 재킷을 빼고 입으면 어찌어찌 원래 그렇게 나온 민소매 정장처럼 보일 것도 같았다. 조끼에 앉은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고 팔을 꿰어 보았다. 졸업할 때보다 살이 조금 붙어서 가슴께가 벌어졌다. 나는 옷 안쪽에 손을 넣어 옷핀을 꽂고 거울 앞에서 허리를 숙여, 핀이 밖으로 보이는지 점검해 보았다.

 
 “오, 오늘 멋있으시네요. 어디 가세요?”

 웬일로 사무실에 먼저 나와 있던 팀장이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아, 네. 동기 결혼식이 있어서요.”

 “그러시구나아.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합시다!”

 의자를 빙글 돌려 돌아앉으며 귀에 이어폰을 꽂는 팀장의 어깨 너머로, 정지되어 있는 아침 드라마의 장면이 보였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토요일엔 ‘만약을 위해’ 나와 있는 거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분명 전화 안내 업무가 금요일까지라고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의자에 비스듬히 뒤로 기댄 팀장을 흘끔 쳐다보고 전화를 받았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르면서 실내 온도가 치솟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팀장은 비용을 아껴야 한다며 있는 에어컨은 틀지 않고 이동식 에어컨이라는 걸 사다 놓았다. 그러나 찬바람이 나오는지 마는지 몹시 의심스러운 그 물건은 그나마 항상 팀장 쪽으로 향해 있어 내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화를 받다 보면 등 쪽에서 열기가 훅 끼쳐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나는 물을 평소보다 많이 마시고, 화장실은 별로 가지 않았다.

 전화벨은 숨을 돌릴 만하면 한 번씩, 얄밉게도 그 정도 간격으로 울려댔다. 돌아보니 팀장은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더 더워졌다. 수화기를 잡고 엉거주춤 일어나서 발끝으로 이동식 에어컨을 내 쪽으로 살짝 돌려 놓았다. 약한 찬바람이 건너왔다.

소설 부문 당선작

쏘아올리다 - 정희선 -


“메모, 불가능하세요?” “저, 제가 손이 없어서 … 미안해요

“네, 대원님. 그렇게 하시면 되구요. 다른 궁금증 있으시면 다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팀장이 부스스 일어나 끈끈한 이마를 문질렀다. 이마가 벌겋게 눌려 있었다.

 “어, 피곤하다. 전화 많이 왔어요?”

 “네, 아뇨. 그냥 적당히 왔어요.”

 팀장은 하품을 하고 뒷목을 벅벅 긁었다.

 “오늘 친구 결혼식이랬죠? 전화 많이 안 오면 한 시간 먼저 퇴근하세요.”

 고맙다는 말을 채 하기 전에 벨이 울렸다. 팀장은 전화를 받더니, 네? 네? 여보세요?를 반복하다 전화를 끊었다.

 “뭔…, 아줌마가 말을 하려다 말어…?”

 다시 전화가 왔다.

 “아, 제가 받을게요, 팀장님.”

 “감사합니다, 사이버 민방위입니다.”

 수화기 속 멀리서,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저하는 것도 같고 뭔가를 호소하는 것도 같은 묘한 목소리였다.

 “네? 조금만 더 크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기, 우리 아들이….”

 수화기에 귀를 더 바싹 붙였다.

 “네, 아드님이요?”

 “우리 아들이 김정규인데요…, 실종이 됐어요….”

 일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 웬만해선 놀라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대꾸했다.

 “아, 네에.”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근데, 무슨 통지서가 나와서요…, 연락도 되지 않구…. 연락 안 된 지 되게 오래 됐어요….”

 전화기 속 여자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예에, 그런데 그 부분은 저희가 처리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동사무소로 전화를 먼저 주셔야 됩니다. 신고를 해 주셔야 돼요.”

 “아….”

 “주민등록 말소를 하든지, 실종 신고를 내든지 하시면 되거든요. 전화번호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메모 가능하세요?”

관할 공공기관의 전화번호 안내는 우리 업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은 거기가 동사무소 아니에요? 그럼 동사무소 번호가 뭔데요? 라고 묻거나, 거 다 똑같은 공무원이면서 대신 좀 알아서 처리해 주면 안 되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상대방의 태도와 그때 그때 내 기분에 따라, 친절하게 번호를 안내해 주거나 그런 건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냉랭하게 대답하는 재주를 조금씩 익혀 가는 중이었다.

 “아…, 제가 그런데….”

 여자는 더욱 맥없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나의 친절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메모, 불가능하세요?”

 “네…, 저, 제가 손이 없어서….”

 손에 뭘 들고 있다는 말인가 하는 다음 순간. 뭔가가 머리를 쿵, 때렸다.

 “손이 없어서…, 못 써요…, 미안해요….”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몹시 미안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울컥, 아니 그런 건 미안해 하실 일 아닌데, 저한테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마구 지껄일 뻔했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생각지도 않은 말을 뱉어 버린 건.

 “그러시면, 저, 외우시면 안 되나요? 되게 간단해요, 간단하거든요. 쉬워요.”

 빠르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나는 그걸 고스란히 주워담고 싶었다. 이게 아닌데.

 “….”

 “지금 바로 말씀 드릴게요, 따라서 한 번 외워 보세요. 02-2260-OOOO.”

 “02-2260-OOOO, 02-2260-OOOO…, …고맙습니다….”

 여자는 내가 불러 준 번호를 중얼거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안 가요? 오늘 일찍 가도 되는데?”

 팀장이 툭, 말을 건네는 걸 듣고서야 나는 수화기를 부서져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손아귀가 얼얼하게 아파 왔다.

 
 결혼식장은 은은한 갈색과 금빛이 섞인 석재로 외벽이 치장된 단층 건물이었다. 미리 알고 가지 않았다면 무슨 갤러리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 앞에서 고개를 젖히고 우아하게 끝이 휜 글씨체로 적힌 작은 간판을 구경하는데, 제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약간 무안해서 얼른 문을 들어섰다.

 “어머, J선배 진짜 좋은 데서 결혼한다, 나도 여기서 해야겠다.”

 “야, 너 여기 밥값만 얼만 줄 알아? 일 인당 십만 원도 넘는댄다.”

 “진짜? 음식 뭐 나오는데 그래? 오, 나 기대돼.”

 J의 회사 후배쯤 되는 것 같은 여자들이 넓은 로비에 전시된 예비 부부의 사진을 둘러보며 까르르 웃었다. 나는 구석으로 가서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준비해 온 축의금은 오만 원. 아껴 쓰면 2주일도 넘게 버틸 수 있는 식비였다. 망설이다, 지갑에서 이만 원을 더 꺼내 봉투에 넣었다.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언니도 오셨네요?”

 전공 수업을 몇 번 같이 들으면서 공동 작업도 종종 함께 했던 후배였다. 나는 으응, 대답하며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후배에게서 자신만만함, 환함 같은 것이 물리적인 입자처럼 낯설게 뿜어져 나왔다. 이쪽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디자인 전문 잡지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과연 그 아이에게서는 이 시대의 메이저 대열에 성공적으로 들어선 사람다운 당당함이 풍겼다. 아니, 원래부터도 메이저가 아니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혼자 오셨어요?”

 “응? 으응, 뭐 딱히 같이 올 애들이 없더라고.”

 “잘됐네요, 저도 혼자 왔는데. 우리 이따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요.”

 후배는 혼자 밥 먹기 싫었는데 잘됐다며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후배에게 어색하게 이끌려 식장으로 향했다.

 
 식장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꽤 넓었다. 내 착각인지 정말 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 약한 향기가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에 섞여 떠돌았다. 번잡스러운 외부와는 차단된 다른 세상, 다른 차원에 스며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결혼식은 느긋하고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주례는 없었고, 말솜씨 뛰어난 사회자가 매끄럽게 분위기를 이끌며 식을 진행했다. 신랑 신부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자신들의 파티를 즐겼다. 테이블마다 둘러앉은 하객들 앞에, 말쑥한 제복을 갖춘 직원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음식을 차례차례 날라다 놓았다.

 J에게서 결핍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이런 세계에 속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내가 둔했거나, 그녀가 겸손했거나. 아니면 내가 지금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감탄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학창 시절에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새삼 떠올리려 해 봐도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녀와 나는 절친까지는 아니고 안 친한 것도 아닌, 그런 정도의 동기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내 작업을 하는 데 골몰한 대학 생활을 했고, 틈이 나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 바빴다. 나로서는 청첩장을 받는 일이 자주 있는 게 아니어서 기꺼이 참석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정말 청첩장을 맞게 보낸 걸까 하는 의문이 생뚱맞게 고개를 들었다.


“명함 없는데 전화번호 알려 줄게”?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는 게 생각났다

그 모든 것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놀이동산에 입장료를 내지 않고 슬쩍 섞여들어온 듯한 이물감이 어쩐지 불편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 나를 알아볼 것 같은 불안함. 나는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앞에 놓인 접시를 보자 ‘7만 원짜리 밥’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일부러 천천히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핏물이 붉게 배어나오는 스테이크에 칼날을 찔러넣는데, 후배가 물었다.

 “언니는 요즘 뭐 하세요?”

 “나? 아…, 나 웹툰 준비해.”

 “아아…, 네.”

 후배는 눈썹을 치켜뜨더니 아무 말 없이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나는 괜히 사실대로 말했나, 에이, 거짓말은 해서 뭐할 건데, 따위를 생각하며 고기를 씹었다. 고기는 연하고 향긋해서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종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얇은 크리스털 그릇에 딱 한 스푼 든 레몬 셔벗이 디저트로 나왔다. 새끼손톱만 한 푸른 잎이 장식으로 얹혀 있었다. 후배는 길다란 스푼으로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도 없이 가볍게 셔벗을 떴다.

 “그럼 언니, 지금 매일 나가는 회사는 없는 거예요?”

 “응, 그렇지, 뭐. 집에서 그림 그리니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지 싶었다.

 “언니, 시간 되시면 알바 하나 안 해 보실래요?”

 “알바?”

 “네,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코너 하나 준비하는데, 좀 감각 있는 일러스트가 들어가야 되거든요. 지금 그거 맡을 일러스트레이터 구하고 있는데 맞는 사람을 아직 못 찾았어요. 제 생각엔 언니 예전에 하시던 스타일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일러스트…. 너희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거야?”

“아뇨, 시안만 제 때 보내 주시면 어디서 하셔도 상관은 없어요. 출근해서 저희 책상 하나 쓰셔도 되고, 아니면 집에서 하셔도 되고. 출근이 더 좋으세요?”

 일을 맡으면 써야 하는 시간과, 들어올 돈을 어림해 보고 있던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어, 뭐…, 집에서 하는 게 편하긴 하지. 그럼 내가 한다고 하면, 바로 맡는 거야?”

“아, 보고 올리긴 해야 되는데, 어차피 저희 팀 일이고 제가 사람 뽑는 거라서요. 별일 없으면 하게 되실 거예요. 할 생각 있으세요?”

 후배가 제안하는 아르바이트를 덥석 물기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일이, 아니, 돈이 사실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학교 다닐 땐 늘 등 뒤에서 내 그림을 바라보며 서성이던 후배였는데. 나는 짐짓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면 하지 뭐. 나 안 그래도 잡지 쪽 일, 해 보고 싶었거든. 한번 생각해 보고 답 줘도 되지?”

 “그럼요. 언니 연락처 하나 주세요.”

 후배는 핸드백에서 금속 재질의 날렵한 명함집을 꺼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후배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뒤늦게 깨닫고 허둥거렸다.

 “나, 명함은 없는데. 전화번호 알려 줄게.”

 말하는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는 게 생각났다.

 “근데 내가 바빠서 전화 못 받을 수도 있거든. 이메일로 연락 주는 게 제일 확실해.”

 후배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입력하는 손가락이 자꾸 틀린 키를 눌렀다.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거짓말 비슷한 것, 어쩌다 그런 거나 하고 있는 인간이 되었을까.

 

 새로 탄생한 커플은 하얀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리무진 곳곳에 세팅된 꽃의 색상과 위치까지,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나는 하객들 틈에 끼어 차의 꽁무니에 대고 열심히 손을 흔들다가, 나만 너무 열심인 것 같아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언니, 그럼, 연락 드릴게요.”

 선명한 굽 소리를 내며 후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어깨에 먼지….”

 “응?”

 후배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털어 주다가, 곧 손을 내렸다.

 “아, 고마워.”

 “다음 주 초쯤 연락 드릴게요, 생각해 보세요. 페이는 괜찮을 거예요.”

 “그래, 고마워. 연락 줘, 잘 가구.”

 “네에.”

 후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살짝 웃고는 뒤돌아 총총 걸어갔다. 나는 주차 관리 직원에게 차 번호를 불러 주는 후배를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지하철 역을 향해 걸었다. 날씨는 습하고 무더웠다. 가슴골로 땀방울이 조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끈적한 몸에 척척 감겼다.
 

 안감이 땀에 젖어 옷은 쉽게 벗어지지 않았다. 들러붙는 치마를 껍질을 벗겨내듯 벗고 가슴팍의 옷핀을 풀고 나니 숨이 크게 쉬어졌다. 나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옷을 행어에 걸려다 말고 멈칫했다.


베란다에 널어 놓은 이불은 마치 내가 벗어 걸어 둔 나 같았다

[그림=화가 김태헌]

“아, 이게….”

 조끼의 한쪽 어깨가 흐리게 바래 있었다. 얼핏 봐서는 먼지가 보얗게 앉은 것 같이도 보였다. 그러나 손으로 문질러도 묻어나지 않는 먼지-. 조끼는, 베란다에서 빛이 비쳐 드는 각도 그대로 비스듬하게 바랜 자국이 어깨 뒤까지 이어져 있었다. 후배는 그러니까, 이걸 털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새삼 행어에 걸린 옷들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런 색이 되었을까? 잘 보니 바랜 것은 그 옷만이 아니었다. 나란히 걸려 있는 겨울 코트, 카키색 패딩, 아끼던 원피스, 셔츠들이 모두 같은 쪽이 똑같이 바래 있었다. 나는 옷을 하나하나 행어에서 들어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 보이던 바랜 자국은 햇빛을 등지고 그늘진 곳에서 살펴보니 이상할 정도로 잘 보였다. 왜 몰랐을까, 지금까지는. 나가기 전에는.

 바래 버린 옷을 골라내자 바닥에는 금세 옷의 작은 산이 쌓였다. 행어는 얇은 여름 티셔츠, 청바지 따위만 몇 벌 남기고 텅 비었다. 옷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옷을 들어낸 행어는 가운데가 조금 휘어 있었다. 앙상한 모습이, 등짐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는 지친 짐승 같았다. 나는 행어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옷더미를 내려다 보았다.

 

 헌옷 수거함에 옷을 몽땅 넣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문득, 꾹 누르듯 아파 왔다.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색만 바랜 것이 아니라 보풀도 잔뜩 일어 있어 어차피 버려야 했을 검은색 모직 코트는, 지난 연애에 자주 함께 했던 옷이었다. 코트 깃에 쌓인 눈을 털어 주던 따스한 손길이 아직도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카키색 패딩은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연일 밤을 지새우던 어떤 날, ‘우리 딸 잠도 못 자고 추운데 고생해서 어떡하니’, 엄마의 쪽지와 함께 택배 상자에 담겨 온 것이었다. 난방을 꺼 버린 학교에서 그 패딩을 입고 그림을 그리다 작업실 긴 의자에서 잠이 들면, 이불을 안 덮어도 제법 포근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 주었다. 짧고 굵게 유행하고 가 버려 한 철 입고는 다시 꺼내 입기가 무안해진 옷이었지만 그 포근함의 기억이 차마 옷을 버릴 수 없게 했다. 샀을 땐 아주 선명한 파란색이었던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는 내 평범한 피부색을 꽤 하얗게 보이게 해 주는 것 같아 아껴 입던 것이었고, 앞섶에 무언지 모를 누런 얼룩이 찍힌 하얀 실크 블라우스는 졸업 후 첫 월급을 타 큰맘 먹고 샀던 것이고, 그 작은 얼룩만 아니면 다른 데는 너무 멀쩡해서, 그래도 실큰데, 버릴 수가 없었고, 가장 처참하게 색이 바래 버린 붉은 셔츠는 지난 연애의 그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옷마다 나름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바래는 줄도 모르고 내버려 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옷들을 입을 때마다 일일이 추억을 떠올렸던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 최근에는 꺼내 보지도 않았던 옷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어쩐지 옷이 아니라 다른 것을 버리고 돌아선 것만 같았다. 빈 행어가 내려앉는 소리가 삐그덕, 가슴 속에서 났다.

 

 편의점에서 동전을 바꿔 들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유리 부스는 문이 달려 있지 않았지만 바깥보다 한김 더 쪄진 공기가 텁텁하게 고여 있었다. 동전을 몇 개 전화기에 밀어넣고 뜨거운 수화기를 왼쪽 어깨로 받치고는 손바닥을 폈다.

 “공일공….”

 맥이 탁 풀렸다.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팀장 몰래 손바닥에 급히 메모했던 전화번호가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땀에 지워진 모양이었다. 손바닥을 힘주어 펴면서 지워진 부분을 읽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흐릿한 숫자는 판독이 되지 않았다. 국번, 그리고 끝 번호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가운데에 적어 두었던 숫자들은 이미 형체 모를 푸른색 얼룩으로 번져 있었다.

 갈 곳 모르던 손가락은 습관처럼 아빠의 번호를 눌렀다. 벨이 오래 울리고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동안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전화를 안 받는 걸까. 나는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꼭 받아 줬으면 좋겠는데.

 …망설이다, 몇 년 동안 누르지 않았던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 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며 번호를 누르는 손이 조금 떨렸다. 신호는 가지 않고,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누군가 그 번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그게 지금 내 마음에 다행인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못견디게 엄마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예전처럼, 아무 일 없이 전화해서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또,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었던 때처럼.

 엄마, 엄마, 엄마가 사 준 패딩 있잖아, 나 그거 버렸다. 엄마, 미안해.

 엄마, 엄마, 보고 싶어 걸었어.

 엄마, 엄마 나한테 요즘 전화 안 했지? 나 전화 끊겼는데. 몰랐지?

 엄마, 전화 좀 받아. 엄마….

 나는 수화기를 손에 쥐고 유리에 등을 기댔다. 뜨끈한 기운이 등으로 번져 왔다. 서쪽으로 해가 길게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전화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실종 신고 해 준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동사무소 전화번호 안 외워도 된다고…, 이제 훈련 통지서는 나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멀리, 전화 부스 너머로 내 방 베란다 창문이 올려다 보였다. 햇빛을 반사해 붉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유리창. 열린 틈으로, 널어 놓은 이불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내가 벗어 걸어 둔 나 같았다. 나는, 월급 받으면 두꺼운 커튼을 사서 달아야겠어, 생각하다가, 아니, 이 여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지…, 이사를 가면 이불 같은 건 널어 두지 않을 거야, 그럴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야지, 생각하다가, 내일, 내일은 사무실에 아침 일찍 나가서 그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걸어야지, 두서없이 생각을 하며, 땀이 고이는 손으로 수화기를 그대로 쥐고 있었다. -끝-

소설 당선 소감
문학의 주술에 걸려든 것 같아
아빠 웃음 다시 볼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면, 그쪽도 당연히 나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 못 했다.

 저기 있는 문학은, 멀리서 보면 창에 노란 등불 켠 아담하고 예쁜 집 같다가도 그 불빛에 이끌려 다가서면 어느새 첨탑과 벽이 매끄럽게 솟는 막막한 성채였다. 아무래도 좀 억울하게 이상한 주술에 걸려든 것도 같았으나 나는 아주 떠나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다시 안 올 듯이 먼 나라로 갔던 적도 있었다. 가까이에서도 부러 외면하며 지나쳐 다니곤 했다. 그러고도 결국 터덜터덜 돌아와 담장에 가만히 손끝을 대 보았다. 누가 물어보면 화들짝 ‘아니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대답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는.

 이름들만 자꾸 떠오른다. 박문기·박제천·유임하·이우상·이유기·이원규·임후성·장영우·황종연 선생님. 선생님들의 수업을 선명히 기억한다고, 행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 분들이 가꾸시는 밭에서 나는 건강한 뿌리를 뻗을 수 있었다. 마음 깊이 감사 드린다.

 내 첫 번째 독자이자 외로운 지지자인 나의 언니, 정현선. 언니가 기뻐하니 내가 제법 괜찮은 일을 한 것 같아 즐겁다. 이모부 김태욱 씨. 그분의 턱없이 순수한 기대는 내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었다. 부디 그분이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언어와 글로 된 세계로 이끌고 그 아름다움과 매혹을 가르쳐 주셨던 아빠. 병상의 아빠께 상장을 들고 팔짝팔짝 뛰어가던 열한 살 소녀가 지금, 내 마음에서 똑같이 달려가고 있다. 아, 활짝 웃으시는 얼굴을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담 밖에서 발끝으로 돌부리를 톡톡 차고 있던 나에게 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 드린다. 이것이 아무것도 장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무서운 시선인 것을 안다. 그러나 숨지 않겠다. 도망치거나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진심을 담아 노력하겠다고 전하고 싶다.

◆정희선=1978년 서울 출생. 국문학 전공.


소설 심사평
감정노동, 청춘, 그리고 가난함
구석구석 따뜻한 실핏줄 뻗은 글


본심 심사 중인 권여선(왼쪽)·성석제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앰뷸을 탄다’는 앰뷸런스 차를 이용한 고액 택시영업을 통해 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의 속살을 엿보는 일종의 세태소설이다. 흥미로운 소재를 입담 있게 풀어냈지만 결말이 아쉽다. 내용에서는 너무 나아갔고 미학에서는 조금 덜 나아갔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는 젊은 부부가 무거운 전기장판을 사가지고 물나들이에 살고 있는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방문하러 가는 이야기이다.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데, 그들 부부가 집에 돌아와 부침개를 부치며 나누는 결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아버지의 중독과 가족의 불행을 그리는 대목이 투박하다. 화자의 투박함이 작가의 투박함을 변명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소설, 고맙고 아깝다.

 홍학에 대한 요설로 시작되는 ‘주성치와 이름 없는 자의 플라밍고’는 소설이 결국 산문의 일종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보기 드문 재능의 글쓰기이다. 독특한 소설가적 자질과 능력이 엿보인다. 무한한 애정을 담아 충고한다. 이 소설을 과감히 버려라. 새 소설을 쓰는 순간 당신은 등단과 무관하게 이미 소설가일 것이다.

 당선작인 ‘쏘아올리다’는, 미대를 졸업했지만 전공과 무관하게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며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반지하에서 옥탑방까지 전전하다 겨우 빛이 잘 드는 5층 방에 안착한, 가난한 청춘의 곤경과 고난에 찬 일상을 그렸다. 친구의 결혼식 날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화려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자신이 입었던 가장 좋은 옷이 실은 베란다의 햇볕에 어깨 쪽이 비스듬히 바랜 옷이라는 걸 깨닫는다. ‘한 통의 전화’ 외엔 별 내용이나 사건이 없는데 소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세상이 세상을 지각하는 한 개인에게서 시작되고, 세상을 표상하는 것이 세상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소설이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때, ‘쏘아올리다’는 가히 모범답안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 이보다 개성적이고 강렬한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처럼 구석구석까지 따뜻한 실핏줄이 뻗어 있는 작품은 없었다. 문장과 대사 또한 자연스럽다. 소소한 평범성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힘은 아마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의 숨은 완성도에서 나온 것이리라. 오래 기다리고 의심했을 당선자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낸다

◆본심 심사위원=권여선·성석제(대표집필 권여선)
◆예심 심사위원=박형서·이수형·천운영·편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