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산문-고향(故鄕)>

고향(故鄕)

Bawoo 2014. 11. 30. 11:45


고향(故鄕)



1.<지금>

이번이 아마
살아 생전 마지막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나선 고향 나들이 길.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이제 거의 없는 내 고향.
내 어린 시절 8살까지 살았던
어린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 고향.

내 집인줄만 알았던 할아버지 집이
내가 9살이 된 무렵
할아버지의 큰 아들인 내 큰 아버지,
그 큰 아버지 식구들인
내 큰어머니, 내 사촌 누나, 형, 동생들이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오고
나는 당숙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서울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고향을 떠나 온 뒤론
할아버지 살아 계시던 내 사춘기 시절까지만
방학에나 손가락 꼽을 정도로 갔었던
내 고향.
그러나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어
영원한 내 안식처로
남아 있던 내 고향.


이미 40여년 전,
내  군복무 시절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10여년 뒤 할머니마저 불쌍하게 돌아가신 뒤로는
거의 발걸음이 안 향해지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대를 이은
큰 아버지, 할아버지 장손인 사촌 형 대에
비록 많은 전답은 아니었으나
쌀 백 섬은 난다는 논 사십여 마지기 그리고 밭들,
그 중엔 아버지 몫 논 열 마지기도 있었다는데
이 모두를 홀라당,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야금야금 홀라당,
아버지 몫인 논까지 홀라당,
노름으로 생활비로 날려버렸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아예 발걸음을 안 하게 되었다.

더구나
큰 아버지의 자식인 내 사촌들
머리가 나빠 중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진
나하고 동갑내기인 사촌 말고는
할아버지 장손인 사촌 형이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촌 동생이나
모두 고등학교까지 나왔건만
삶의 설계 하나 제대로 못해,
집안을 일으키기는 커녕
자기 앞가림 하기도 힘겨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꼴 보는 것이 너무나 싫어
아예 발걸음을 안 하게 된 내 고향

그래도 고향이고 친척들인지라
그동안 내 삶이 고달프다는 핑계로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고 지낸
작은 할아버지, 할머니
이미 돌아가신
큰 아버지, 큰 어머니
사촌형, 작은 아저씨,
그리고 돌아가신 뒤
성묘 한번, 제사 한번 제대로 안 가
늘 죄송한 마음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이 모든 분들
비록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무덤이라도 한 번은 가 뵈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나선
고향 나들이길,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선 나들이 길.


2. <추억 속으로>


* 느티나무 *

할아버지 집 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지금은 시가 되어 있는 O읍에서 10여리를 힘겹게 걸어들어가
고향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웃마을 언덕에 올라서서
'아! 이제는 고향에 다왔구나'라며 한숨 돌리며
멀리 눈 앞에 보이는 고향 마을을 바라보노라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던 느티나무.
아마 지금도 변함없이 서 있겠지.
고향 마을 사람들이 세대를 바꿔가며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것을,
마을이 시대가 바뀌면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지켜 보면서 .
한 여름 밤이면 부엉이도  날아와
쉬고 가던 커다란 느티나무,
아마 내 어린 시절에도
이미 몇백년은 살았을지도 모르는 느티나무.

여름 밤에는
그 느티나무 밑에 멍석을 깔고
쑥대, 타작하고 난 보릿단을 태워 모깃불 피워 놓고

할머니 무릎을 베개삼아 누워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이 느티나무도
이젠 많이 많이 늙었을테지만
그래도 사람들보다는 훨씬 오래 사니
아직은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고향 마을은 많이도 변했을테고
내 어릴 적 어른들은 아마도
거의 이 세상에 안 계실터이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아직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을 것이다.
한마디 말도 없이 무심한 듯이
그렇지만 내 고향마을의 변화를
다 지켜보며...


* 놀이들*

할아버지 댁에 살던
그 시절 대여섯살 무렵,

봄에는 감꽃 주우러
당숙 할아버지 사시던 집 앞마당에 있는
감나무 밑으로 이른 아침 달려 나가곤 했다.

군것질거리라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삼시 세끼만 거르지 않고 먹었던 시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부자라고 했던 가난했던 시절
감꽃은 참 좋은 군것질거리였었다.
삼시 세끼 거른 적은 없었으나
왕눈깔 사탕 하나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가난했었던 시절.


여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할아버지 집 마당에 널려있는
보릿단 위에 앉아 있는 잠자리들 잡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쌀잠자리
보리잠자리들.

빨간 고추 잠자리는
하늘 위로만 날아다니고 좀처럼 앉지를 않아
한번도 잡아 보지를 못하고
보릿단 위에 잘도 내려 앉던
쌀잠자리, 보리잠자리들만
나의 희생물이었다.
잠자리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댑사리로 만든 빗자루로
냅다 덮치면 쉽게 잡을 수 있었던 쌀잠자리, 보리 잠자리들.

고추 잠자리도
잠자리채만 있었으면
얼마던지 잡을 수 있었을텐데
잠자리채는 내게 없었다.
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할아버지,엄마. 아버지 모두.

**********
* 실개울*

마을 앞으로는 가느다란 실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늘
맑은 물이 흐르던 실개울.
물이 많아지고 차갑지 않은 한 여름엔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밥 때가 되어 엄마가 부를 때까지 거의 매일
이 개울에서 놀았다.

물이 깊지 않고 맑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개울에는
작은 붕어 , 버들 붕어 ,
송사리들이  여유롭게 헤엄치며 돌아 다녔고
개울 물속 바닥엔 모래무지들이
느린 몸짓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녔다.

물가 풀섶에
손을 살금살금 집어 넣으면
고기들은 얼마던지 잡을 수 있었다.
작은 붕어, 버들 붕어, 송사리.

송사리들은 몸집이 너무 작아
잡는 재미도, 잘 잡히지도 않아 재미가 별로 없었지만
붕어는 손 안에 잡히는 촉감이 제법 짜릿해
이 놈 잡힐 때가 제일 신이 났었다.
버들 붕어는 겉이 까칠까칠해 촉감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색갈이 너무 예뻐
잡으면 기분이 좋았었다.

요 녀석들 잡고 노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었는데 .
간혹 험상궂게 생긴 잠자리 유충이나
손에 닿으면 물컹거리는 촉감에
기겁을 하게 만드는 미꾸리라지란 놈 때문에 질색을 한적도 있었지만
워낙 맑은 물이라 그런지 별로 많지도 않았고
어쩌다 있는 이런 일 때문에
물고기 잡는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특히 붕어를 잡는 재미.

맨 손을 살그머니 풀섶으로 집어넣어
붕어를 잡던 그 재미,
자그마한 내 손 안에 잡혀 들어와
파닥거리던 녀석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오무릴 때 느껴지던그 촉감.
그걸 생각하면 6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물방개도 있었지만  
이 놈은 잡으려면 다리에 가시처럼 생긴 것이 있어
손도 따갑고
워낙 빨라 쉽사리 잡을 수도 없었다.


잡은 물고기들은
신고 있던 하얀 고무신에 담아 놓았다가
잡은 고기가 너무 많아지면 개울가에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가두어 놓고
좋아라 했었다.

고기잡기 놀이가 심드렁해지면
개울 둑에 심어져 있는
호박잎을 하나 따서는
잎파리는 잘라내 버리고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줄기만 남겨
이 놈을 물이 흘러 내리는
대롱으로 삼아
개울가 좀 높은 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가득 담아 놓고는
그 물들이 호박 줄기로 만든 대롱을 통해
아래로 흘러 내리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며
신나게 놀았다.

이도 싫증이 나면,
맑은 개울 물 속 바닥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색돌들을 찾아 넙적한 돌맹이 위에다 쓱쓱 갈아대면
노랑,빨강, 보라색등 색색의 물감들이 만들어져
개울물 속으로 서로 뒤엉켜 가늘게 퍼져 나가는 모양을 보며
'참! 곱기도 하구나'하며 감탄을 하곤 했었다.

이도 또 싫증이 나면
개울가에 널려있던 차돌들을 집어다가
공기돌을 만들겠다고
큰 차돌로 작은 차돌을 마구 때리기도 했었다.
손가락 다칠까 무섭고
너무 어린 나이라 그런지 힘에 부쳐
제대로 깨보지도 못한 단단한 차돌
그 차돌로 만든 공기돌로
공기놀이를 할 때면
공기알끼리 부닫치는 소리가
어찌나 맑았던지...

****************************

*도토리 구슬치기 놀이 *

가을에는 도토리 로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유리구슬이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도토리는 먼 조상님을 모셔놓고
해마다 가을이면 시제를 모시던
마을 바로 뒤에 있는 나즈막한 종산엘 가면
커다란 도토리 나무들이이  많이 있어서
얼마던지 줏을 수 있었다.
어떤게 가장 잘 굴러가는
둥근 모양으로 생겼나만 보면 되었다.
또래들 몇이 서로 많이 줏으려고 경쟁을 하기는 했어야 했지만...

이 참나무들에는 사슴벌레,  하늘소 

금풍뎅이들참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던지 잡을 수 있었다. 

 

도토리 구슬치기 놀이는 주로,

 종가집 할아버지의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종가집이라서 그런지 자손이 번창하여

내 아버지뻘이면서도 항렬은 나하고 같았던

종가집 작은 아들이 사는 집 마당에서

마을에서 제일 친했던  동무 재홍이랑

또 다른 동무 몇이

같이 신나게 놀았다.

 

종가집 자손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거드름을 피우던 이 아저씨

같은 성씨여서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친척인데도

나이 어린 나에게도

위압감을 주던 이 아저씨

내가 또래들과

도토리를 가지고 구슬치기 하는 모습을 보면

거만한 모습으로 나와

혹 마당에 구멍을 파지 않았나 보고는

구멍을 판 것을 보면 혼줄을 내곤 했었다.

 

*  내 동무 재홍이 *

 

종가집 아저씨한테

마당에 구멍을 팠다고 혼줄이 나면

 우리들은 줄행랑을 쳐 이 아저씨 집 뒤에 있는

내 동무 재홍이 할아버지네 집 마당으로 가서

다시 구멍을 파고

도토리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종가집 할아버지의 동생인

재홍이 할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꽤 무서운 인상이었으나

우리들이 마당에 구멍을 파고 놀아도

아무 말도 안하셨고

 인자한 모습이시던 재홍이 할머니는

우리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미소를 뜨며 웃으시며 간혹

소다를 넣어 부풀린 보리로 만든 빵을  먹으라고

 내어다 주시곤 했었다.

 

밀가루가 귀해서인지  하얀 색깔이 나는

밀가루 찐빵은 구경도 못해 본 시절

누런 보리 찐빵은 색깔이 너무도 싫었지만

이도 자주 먹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

속에는 아무 것도 안 든 그냥 보리 가루만으로 만든 빵

그래서 별로 맛이 없었던 보리 찐빵.

그래도 쉽사리 자주 먹을 수는 없었던 빵.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속에 팥이 든 보리 찐빵을 먹게 되는

할아버지 댁이나 작은 할아버지 댁에

무슨 귀한 일이 있는 날이면

얼마나 신이 났던지.

이도  또 배터지도록 먹을 수는 없었지만...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재홍이 아버지

농사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마을에서

드물게 공부를 하신 한 분이시던 재홍이 아버지

 

6.25전쟁때 징집을 피하려고 도망다닌 탓에

기피자가 되어 다시는 선생 노릇 못한다고

동네에 소문났던 재홍이 아버지

 몇 명 안 되던 동네 또래들 중 나를 제일 귀여워 해

재홍이하고 노는 걸 좋아 하셨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큰 삼촌한테

삼촌 겨울 방학 동안

혼쭐을 나며 한글을 배운 덕분에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줄을 알게되어

동네 그리고 학교에서

똑똑하다고 소문이 난 탓에

아저씨 아들인 내 동무  재홍이와 놀기에

적격이라고 생각을 하신 것인지.

 

그 재홍이

 어릴 적 내 동무 재홍이

내가 서울로 이사간 뒤에 그만

미친개에게 물려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삶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엄마,아빠인 아주머니, 아저씨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해 놓고,

 

내게는

재홍이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큰개울로

고기잡으러 갔다가

재홍이 아버지가

재홍이가 아닌 재홍이 동무인 내게 떠맡긴

잡은 물고기 담긴 깡통이 너무 무거워,

손잡이가 안 달려 있어

깡통 한 귀퉁이를 잡고 들어야 했던

무게가 너무 힘에 겨워,

어느 순간 깡통을 놓쳐버려

애써 잡은 물고기들 중 꽤 많은 물고기들을

다시 물로 되돌려 보내고 말아

재홍이 아버지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나는 속으로

'아저씨 깡통에 구멍을 뚫어 손잡이를 만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요. 그리고 왜 재홍이에게는 안 들리고

나에게 들렸어요?' 하는 무언의 항변을 한 

그런 추억을 남겨 준 채

미친 개에게 물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60여년이 다 된 지금도

 내 추억 속에 아련히 자리하고 있는

어릴 적 내 동무 재홍이.

눈망울이 유난히도 컸던 내 동무 재홍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가를 촉촉하게 젖어오게 만드는

내 동무 재홍이,

 그 재홍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

같이 늙어가고 있다면

내가 고향을 찾는 발걸음이,

아무리 큰집인 사촌네가 몰락을 해버리고,

고향마을이

흘러버린 세월 만큼이나 너무나 변해버려

만정이 다 떨어지는 모습으로 남아 있어도

고향을 찾는  발걸음을 이리 뜸하게 하지는

결코  않았을텐데...

 

 

 

* 종가집 이야기*

 

종가집은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보면

산쪽으로  마주 보이는 조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향 마을이

작은 언덕을 기준으로

 15여호씩 두 곳으로 나뉘어 있기는 했지만

같은 성씨들만 모여 살고 있는

30여호 남짓한 작은 동네여서

조금 멀고 가까운 차이는 있으나

따지고 보면 다 친척들인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있는 고향 동네,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기와집인 모습으로.

마치 ,

'내가 이 마을에선 먼 조상님들의

유일한  적통이야 라 그러니 함부로 까불지마'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은 모습으로

초가집이던 할아버지 집을

거만하게 내려다 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앞

실개울을 끼고 마을을 벗어나  먼 거리까지 펼쳐진

제법 넓은 들판의 꽤 많은 논들이

종가집의 소유일만큼

마을의 유일한 부농이었던 종가집

 

자손들도 번성해서

내 아버지와 같은 나이 또래의 후손들이

나하고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종가집 할아버지의 동생이던

재홍이 할아버지네와 돌아가신 재정이 할아버지 

그리고 또 다른 할아버지 집까지 계산하면

작은 고개로 나뉘어진 마을의

종가집이 있는 쪽 15여호 중

종가집과 직접적인 친척 관계인 집이

5집이나 되었다. 종가집까지 합치면 모두 여섯집. 

큰 아들은 할아버지와,

작은 아들 둘은 종가집 옆 그리고 다른 한 집,

이 집에 사시던 할아버지 소에 받쳐 돌아가시고 

가족들 모두  서울로 떠나 버린

큰 삼촌 친구 호길이 아저씨네 집 바로 옆에 집,

내가 도토리로 구슬치기하던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그래도 여자 아이들은 상급학교를 안 보냈다.

대여섯 살 무렵

나한테 코를 맞고 코피를 흘리며 울던

종가집 할아버지 큰 아들의 딸인 내 또래 여자애 재분이

'시집가서 아이낳고 잘 살면 되지

공부는 무슨 쓸 데 없이 무슨'그러던 시절 탓에

국민학교만 나오고는

집에서 살림살이를 배우다가 커서 시집을 갔다.

누구한테 갔는지는 모른다.

그 때는 이미 고향을 떠나 온 뒤여서...

 

 

* 작은 할아버지  둘째 아들 *

 

나보다는 댓 살 정도 나이가 적은데도

작은 할아버지 아들이어서

항렬로는 내겐 아저씨뻘인 탓에

나이 많은 내가 존대를 할 수밖에 없는  아저씨.

 

집안이 여유롭지 못해

형님인 작은 할아버지 큰 아들인 아저씨는 

시험 조차도 못봐 본

고향에서 10리 밖인  O읍에 있던

유일한 상급학교의  입학 시험에 떨어졌다고 했었다.

그래서 최종 학력은 국졸인 이 아저씨.

조카뻘인 나보다 나이가 어린  이 아저씨,

고향에 눌러앉아 농사 지으면서

소를 기르기 시작하더니

제법 규모가 커져

10여년전 고향에 들렀을 때는

소를 30여마리씩이나 기르면서

옆 마을 근처에 있던 초등학교 가는 길 옆

나즈막한 야산에

제법 큰  2층짜리 양옥을  짓고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래봤자 머리나빠 중학교도 못 간 탓에

별 수 없어서 택한 농사길 그리고 축산길이

잘 풀린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했고,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나와서

변변한 직장 하나 못잡고

사는게 힘들어 쩔쩔매는

못난 사촌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대견해 했었다.

 

내 이번 고향길에도

유일하게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친척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까운 친척분들 산소를 안내해 줄 수 있는

이 아저씨,

작은 할아버지의 아들이어서

나보다 나이가 적은데도

존대를 할 수밖에 없는  아저씨.

아마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머리는 없지만

세상을 궤뚫어 보는 능력은 뛰어나

공부 많이 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있는

나보다 나이는 어린 아저씨

학력은 국졸뿐이 안되는 아저씨.

 

 

 개울가 재정이네 >

 

내 또래 여자아이 재정이가 살던  집

아니 할머니 집은

내가 여름이면 즐겨 놀았던

개울 바로 윗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개울 양쪽으로 나 있는 언덕 중

한쪽은 논들이 질펀하게 널려있는 벌판이고

다른 한편 산자락 나즈막한 곳 일부에

고향 마을이 들어서 있는 것인데 

 재정이 할머니네 집이 바로 마을 첫째 집이었다.

내가 물놀이를 하려고 딴 호박잎도

개울 뚝에 재정이 할머니가 심어 논 것이었다.

 

재정이네는 할머니, 엄마가 모두 혼자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언제 혼자 되신지는 모르겠으나

재정이 어머니는 내 어머니 또래셨으니

아직 30이 안 된 젊은 나이셨는데

국민학교 선생이셨던 재정이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미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재정이 어머니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 탓에

욕정을 억누르기가 너무도 힘에 겨워서

단지 육욕을  해소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지만

집에 일꾼으로 들인 머슴과

한밤중에 정분을 나누던 현장을 할머니에게 들켜

그 길로 바로 집에서 쫒겨 났다고 했다.

재정이 아버지가 국민학교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고향 마을에서 드물게 미인이셨던 재정이 어머니

나를 볼 때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늘 환한 웃을을 지어주시곤 했는데

그 놈의 젊음이 앵겨다 준

참을 수 없는 성욕을 참지 못하다가

시어머니인 재정이 할머니에게 들키고 쫒겨나

서울에서 재정이하고 사신다는

소문까지만 들었다.

 

 재정이 어머니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를 일.

모양새는 좋지 않았지만

한창 성욕을 주체못할 젊은 나이에,

스스로 집을 나갈 수 있던 그런 시대도 아니고

게다가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문중 조상님을 마을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셔 놓고

해마다 시제를 지낼 정도로 유교를 숭상하는 집성촌인 고향에서

더구나 종가집 방계 집안 며느리였으니

재정이 할머니가 이 꼴을 보고 눈감아 줄 리는 없었고

속으로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며느리인 재정이 어머니를 청상으로 늙게 할 수도 없었을테고

그렇다고 머슴과 정분이 난 걸 모르는체 눈 감고 있으면

그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모양새는 안 좋지만 이 참에

내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신건 아닐까?

재정이 어머니 입장에서도 

재산 하나도 못 물려받은 아쉬움은 있겠지만

결국은 할머니 손주인 

딸 재정이에게  돌아갈 재산이었을테니...

 

그 뒤의 소식은 모른다.

서울에서 딸 재정이하고

삯바느질 하며 사신다는 이야기만

얼핏 들었을 뿐.

큰 집이 꽤 잘 산다고 들었으니

아마 뒤를 돌보아 주지 않았을까?

 

재혼은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만약 재혼을 안하고 그냥 사신 것이라면

어머니 또래셨던 당숙 할머니

나에겐 아저씨, 아주머니 뻘인

두 남매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혼자 사셨던,

내가 감꽃을 줏으러 다녔던 집에 사셨던 당숙 할머니처럼

그냥 혼자 평생을 사셨다면

일시적인 성욕을 참지 못해 저지른 단 한번의 실수  때문에

시댁에서 쫒겨난 셈이니

이처럼 속 상할 일도 없었겠지만.

 

당숙 할머니 이야기*

 

어머니와 같은 또래셨다.

30이 채 안 된 젊은 나이

내가 고향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이 할머니의 시아버지, 시어머니인

두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살아 계셨고

나에겐 아저씨뻘인 할머니의 아들이 한명

그리고  아주머니뻘인 동갑내기 딸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사셨다.

늙으신 시부모님 모시면서

 나이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할아버지는 육이오때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와 세살 밑의 여동생을 데리고

밤만 되면 이 할머니 댁으로 마실을 갔다.

달이 없는 그믐밤에는

마을이 칠흑같이 어두워

재홍이네 집 뒤에 있는 할머니 집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을

오로지 엄마 손에 매달려 다녔다.

컹컹 개 우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

엄마 치마자락을 꼬옥 잡고서.

 

어머니는 남편인  아버지가 계시기는 했으나

객지로 돈 벌러 나가셔 집에 안계셨고

이 할머니는 아예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

한창 젊은 나이여서

남정네의 품이 한없이 그리운 마음을

도저히 풀을 수 없는 마음을

두 분 같이 앉아 바느질하며 달래는 것으로

푸시던 것 은 아니었을지...

 

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차례로 돌아가신 뒤에

전답을 다 정리하여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아저씨뻘인 아들 

공부 뒷바라지 한다고

보따리 행상까지 하신다고 했다. 

나하고 동갑내기인 딸은

국민학교 마친 것으로만 끝내고

평생을 혼자 사시면서

아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이 아저씨 ,

어머니인 할머니 뒷바라지 덕분에

평생 자기 하나 잘 키우겠다고

청상으로 지내면서

고향 전답 정리하여 서울로 가

보따리 장사해가며 뒷바라지 해 준 덕분에

서울에 있는 교육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고 결혼을 하더니

할머니, 뒷방 신세가 되게 만들었다.

 

평생을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보면서

 희생한 삶을 살았는데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오더니

그 고생 도로아미 타불이 되어

내가 직장을 다니던 30대 시절에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내 어머니를 가끔씩 보러 집에 들르시더니

내가 한창 직장을 다니던 20여년 전

70이 채 안 된 연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친구인 내 어머니는

비록 몸을 못쓰는 채 누워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 살아계시는데

 이할머니 이미 20여년전에

돌아가셨다.

 

가까운 친척의 연락을 받고 문상을 가보니

 중학교 교감이 되어 있는 아들

내겐 아저씨뻘인 하나 뿐인 할머니 아들

할머니 청상으로 지내면서

보따리 행상으로 뒷바라지 해가며 키운 그 아들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집에다 빈소를 차려 놓고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을까?

아니면 조문객을 많이 안 받으려고 일부러 그랬을까?

내게는 '참 인색한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게 했을 뿐인.

'자기를 어떻게 뒷바라지해 키웠는데

이리도 초라하게'라는 생각을 들게 한....

 

 

3. <다시 지금>

 

향을 가는 길은 마음이 무거웠다.

돌아가신 친척 분들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마지막 방문 길이다 생각하고 나선 길이지만

이미 큰 집이 몰락해버려

찾아갈 집이라곤

이미 돌아가셨을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나보다 나이 어린 아저씨인 둘째 아들만이

유일하게 편히 찾아볼 수 있는

친척으로 남아 있을 내 고향

마당에 느티나무가 있는

할아버지 집은 그나마 남아 있을 것인지

남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는지

그렇지는 않더라도 사는 사람없는

 폐가가 되어있기 십상이겠지만...

 

 

 고향은

10여년 전 갔을 때하고는

또 다르게 변해 있을 것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었다

정나미가 확 떨어지게 변해  있을 것임을.

 

이 조짐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네비양이 안내해주는대로

운전을 하면서

'길은 여기저기 참 많이도 만드는구나'

덕분에 편해서 좋기는 하다만

이 길들이 과연 다

적정한 통행량 계산이 나와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토건세력과 관련 공무원들이 결탁을 하여

세금에서 자기들 이익을 빼내기 위해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은 편하게 잘 다닐 수 있어서 좋구나.

그리고 토건 세력들에게도 딸린 식구들이 있어

그들도 먹여 살려야 할테니

제발 부실공사를 해서 나라 돈인 세금이 헛되이 쓰이게만 하지 말아다오'라고

생각을 하면서 달리던 고속도로를 벗어나 

고향에서 십리 쯤 떨어진

면사무소가 있는 J읍내를 벗어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읍내는 내 어린 시절에도 이미 형성이 되어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건물들 외관이 변했을 뿐 거리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읍내를 벗어나서부터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농촌 풍경이 아니었다.

이맘때 쯤이면 누렇게 익은 모습으로

황금벌판을 이루던 들판은 

온데간데 없이 보이지 않고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주위 모습은

공장과 음식점들이 논밭 사이로 들어서 있어

이제는 시골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어버린

흉물스러운  모습.

계획화 되어 만들어진 도시는 깨끗하기나 한데

그렇지 않고 개인들이 편의에 따라 농경지를 사고 팔아

거기에다 공장을 짓고 들어서 있는 시골 모습은

더 이상 시골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고 싶은 나에게는

추억거리는  찾아 볼 수도 없고

시골도 도시도 아닌 기형아 같은 모습

그래서 정이 확 떨어지는 모습.

 

그래도 고향 마을까지 가는 길은 

하나뿐이 없었던 기억을 되살려

무조건 큰길로 차를 몰았다.

20여리 떨어진 O시까지 연결된 신작로,

 내 어린 시절에도 이미 나 있었던 길.

흙먼지 펄펄 날리는 비포장 길이었고

다니는 대중교통도 없어

중학생 시절 어느 때인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향 할아버지 댁에 다니러 갔었던 때

면내 국민학교에서 마을 대항 체육대회가 열리는 8월 15일에

터덜터덜 비포장 길을 따라 1시간여를 걸어와

체육대회를 구경하던

추억이 있는 J읍

 

 

그래도 내 고향마을은

옛적 신작로로 불리던 길에서

차들이 다닐 수 있다고는 하지만 농로로 쓰인던 길로

얼마간은 들어가야 되니 뭐 큰 변화가 없겠지 하며

차를 몰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우선 ,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 입구부터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신작로에서 유일하게 마을로 통하는

실개울을 따라 난 길.

실개울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고향 마을 앞개울에서 이곳까지 개울따라 올라가면

물도 별로 많지 않아 고기들도 별로 없던 곳

그래서 재미가 없어

신작로 위에 있던  펑퍼짐한 야산 밑자락 풀밭에 들어가

방아개비, 여치, 풀무치를 잡고 놀았던 곳

 

이곳도 이미 내 나이 30이 채 되기도 전인 30여년 전에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교회가 들어서버려

내 어릴 적 추억을 깡그리 없이해 버린 곳,

그 교회 앞으로 나 있는 신작로 길

아직도 읍인 J읍과 이제는 시인 O시를 이어주는 길과 

고향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만나는 곳.

그래서 차로 고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옛적엔 할아버지 그리고 동네 어른들이

직접 농사지으신 쌀등 농산물을 마차에 같이 실어

지금은 시가 되어있는

O읍 5일장에 내다 팔 때에만 이용하던 길

그 길조차 쉽사리 눈에 뜨이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 주변이라 짐작되는 곳은 

 이미 공장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어

'도대체 입구가 어디야' 하며

여긴가 저긴가 두리번 거리다가

급기야는 차에서 내려 확인을 하고서야

겨우 찾을 수가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긴 했으나

내 어릴적  고기 잡으며 놀던 실개울,

그 위로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놓인지는  꽤 오래 되었으나

내 기억 속의 마을 풍경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리상으로는 분명 눈 앞에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마을이 눈 앞에 들어와야 되는데

그렇지를 않았다.

할아버지댁 마당에 서 있을

느티나무를 찾으려고 해봤지만

이도 보이지 않았다.

'이쯤이면 고향 마을이 있어야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차를 잠시 세우고 차창 밖을 내다봤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고향마을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10여년 전 왔을 때 보지 못했던

음식점,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실개울을 따라 내려가며 있는

나즈막한 야산 위에들어서 있는 모습만 보일 뿐

고향 마을은 찾을 수 없었다.

 

마을이 하나 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내 기억 속의 고향 모습은 전혀 보이지를 않아

긴가민가 하면서 일단 그냥 지나쳤다.

왔다간지 오래 됐다고는 하지만

고향 마을을 못찾는 내 눈을 의심하며

고향 마을이 있을 거리를 한참 벗어나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나보다 나이어린 아저씨 집을 먼저 찾으려 했으나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서 있어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 앞 실개울도 제법 넓어져 있던 곳

이쯤은 물총새가 살던 황토흙으로 된

절벽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 보았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야산에는 오디를 따먹던 뽕밭이 있었고

그 뽕밭 실개울 쪽은 황토흙으로 이루어진 절벽이어서

이곳에  물총새가 구멍을 뚫어 집을 짓고 살았었다.

 

방학때 할아버지 댁에 내려가 있을 적엔

이 개울을 따라 내려가며 고기를 잡곤 했는데

그 때 이곳에 다다르면 늘 물총새를 볼 수 있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감탄하며,

어떻게 저리 높은 곳에 구멍을 뚫고 살지 하며,

한번 잡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물총새.

그 물총새 이제 있을리도 없지만

물총새가 살았던 황토 절벽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물총새는 커녕 절벽 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실개울을 따라 개울이 점점 넓어지는 밑으로 내려 가면서도

마을이라곤 내가 살던 고향 마을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렇다면 처음 눈에 보였던 마을

도저히 내 고향 마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 마을이 맞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차를 돌려 무작정 마을로 들어서보기로 했다.

내가 살던 할아버지 댁이 있는

뒷동네인 것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그 어느 하나 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모습은

안보이는 곳으로.

 

들어서 보니

고향 마을이 맞기는 했다.

믿을 수 없게 변해는 있었지만

할아버지 집이 있는 곳 언덕 너머에 있던

같은 마을.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어릴 적 학교 다니느라 수도 없이 걸었던 길.

큰 댁 제사 있을 때마다 넘나들었던 나즈막한 언덕 길.

고등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들르면

 낮 동안은 농사일을 거들던 동네 내 또래 사내 아이들

그리고 아직은 변변한 직장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고향에 그냥 눌러 앉아 있던 여자 아이들

모두가 같은 성씨여서 다 친척인 아이들

지금은 흔해빠져 집마다 몇대씩 있는 TV조차 없어

오락거리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  가난한 시골이기에

마을 뒤 종산 위 자락에 있는 동산에 모이는 것으로

젊음의 혈기를 달랬던 아이들

그 내 또래 아이들이 동산에 오르기  위해 거쳐간 길

그 곳을 벗어나 조심조심 차를 잠시 몰고 가니

할아버지 그리고 큰 집 식구가 살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느티나무가 먼저였다.

집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폐가가 되어 있었으나

느티나무는 많이 늙은 모습이기는 했으나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릴 적 잠자리 잡으며 뛰어 놀던

그리도 넓어보이던 마당이 손바닥만하게 작아 보이고

할아버지 집,

옛적 내가 살던 때의 정겹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변해버린

흉물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광경에 놀라며

망연자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작은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을 찾아 내려갔다.

작은 할아버지 이미 돌아가셨겠으니

자칫하면 빈집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는 길에 할아버지 집 아래에 있는 집

그  집 사시던 할아버지 소에 받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집 큰 아들이면서 외아들이던 아저씨,

 공부도 제법 잘해서 나중에 공무원이 된 아저씨,

내 큰 삼촌 또래여서 이제는 70 중반은 되었을 아저씨

논밭 다 정리하여

어머니인 할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 데리고  서울로 이사 가버리고

집만 남겨두었었는데

내려가는 길에 집 문패를 흘깃 보니

성이 다른 성씨였다.

우리 성씨인 우씨가 아닌 최씨.

내 어릴 적엔 타성받이라곤

6.25전쟁때 이북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차씨, 안씨 두가구가 전부였었는데...

 

도토리 구슬치기를 하며 놀다

마당에 땅을 팠다고 혼줄이 나 도망치던

종가집 할아버지 작은 아들이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작은 할머니네와 그 옆의 몇 집이 이용하던 우물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우물가 옆에 있던 종가집 할아버지  작은 아들네 텃밭,

한 여름엔 토마토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고

그 위로 잠자리, 나비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던 텃밭,

몰래 한 개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게했던 그 텃밭도

잡초만 무성해져 있어 이제는 밭도 아니었다.

 

그 집 사이로 재홍이 살던 재홍이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나 있고

그 아래 실개울 바로 윗쪽에 있던 재정이 할머니가 사시던 집도

집은 남아 있으나 집의 쇄락한 모습을 보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작은 할아버지 집도 쇄락해 있긴 마찬가지여서

혹 빈집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으나

다행이 누가 살고 있었다.

말을 들어보니 세들어 살고 있는 것이라고.

 

세입자는 내 나이어린 아저씨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집을 도저히 못찾겠다'고 했더니

'지금 나가려는 중인데

시간이 조금 남으니모셔다 드리겠다'고.

이 집 주인 친척이라고 했더니 깍듯이 예의를 차리면서.

 

잠깐 같이 가는 사이 세입자는

내가 궁금해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이 어린 아저씨 이제는 소를 안 기르고

그 자리에 공장을 지어 임대를 주고 있다고.

그 수입이 한달에 1200만원이나 되는 알부자고

지역유지가 되어 있다고.

 

작은 아저씨 집은

언제인지 모르게 들어서 있는 공장들 사이로 난 길

그 길로 들어가서야 눈에 뜨이는  곳,

나 혼자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에 있었다.

10여년전 왔을 때는 개울쪽 길에서 올려다 보며

차를 몰고 가면 아저씨 집 외에는

다 야산 그대로인 상태여서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아저씨 모습 옛날 그대로였다.

물질적으로 여유로워졌다고

평생 시골에서 땅파고 소기르며 산 사람이

도회지 사람 냄새를 풍길 수는 없는 모양

그래도 평생 고향을 지키며

한 우물을 판 덕에

이제는 누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

 

그동안 발길을 끊고 지내

이제는 남이라고 생각하고 지냈을

생각지도 않던 나이많은 조카인 나의 출현에

아저씨는 저으기 놀란 모양.

그런 아저씨를 보고

'마지막 고향길이다 생각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작은 아저씨 산소 좀

둘러보려고 왔다고' 그랬다.

 

산소 자리들은 대충 위치는 알고 있었으나

나 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고향 마을을   따라 더듬어 가면

작은 아저씨 산소 정도는 찾을 수  있겠으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10여년 들렀을 때도 실패했었으니

지금에야 말해 무엇하랴.

 

산소 찾아 가는 길에도

예전에 논밭이었던 곳은 이제 예전 그대로가 아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변해 버린 모습.

집들도 간간히 눈에 뜨였지만 그보다는 공장들이 더 많았다.

어릴 적 내 살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O읍-지금은 시-까지

한시간은 족히 걸어나가야만 했던 벽촌이었던 내고향.

그곳은 이제 벽촌도 아니었고 시골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래도 넓다랐던 농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이웃 마을과 연결된 농로는 그대로 남아 있어

차는 이곳을 통해 산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이게 다 어디야' 하며 낯설어 하기만 하는 나에게

지금 차가 가는 이 길이 예전 여기 방죽 뚝이고

길 옆  공장들은 바로 방죽을 메우고

어선 것이라고 아저씨는 알려줬다.

어린 시절 너무도 크고 물도 깊어

근처를 지나다닐 때면 늘 무서워 했던 방죽,

여름 방학때 놀러왔던 서울살던 종가집 할아버지 손자 하나가

멱 감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방죽

그 방죽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작은 공장들이 여러 곳 들어서 있었다.

어느 인색한 사람이

차가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 만큼

길을 내어주곤

자기 집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그 길을 경계로 하고.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시절에

할아버지 소유이던 논밭이 있던 자리에도

공장들은 어김없이 들어서 있었다.

이웃 마을과 연결되어 있던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었던 길

그래서 가을이면 추수한 벼 실어나르고

O읍에 5일장 서는 날이면

이웃 마을 사람들 하얀 무명 옷 차려입고

머리에 보따리 이고 등에 봇짐 메고

내 고향 마을을 통해 장보러 가기도 한 그 길

'이따가는  이 길로 넘어 갑시다'나의 말에

" 그 길은 이제 차는 못다닌다는" 아저씨의 말

'왜 그러냐'는 나의 되물음에

종가집  할아버지 장손인

나도 잘 아는 큰 삼촌 또래이던  장손이

을 막아버려

끊긴 길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 못된 짓 하더니

몹쓸 병에 걸려 얼마전에 죽었다고 하는

악담 비슷한 말을 하면서.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나도

'참 못됐네. 종가집  대를 잇더니 사람이 변했나 '하고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세상이 살기 좋아져,

옛적엔 고작 장날에나 어쩌다

우마차 한두대 지나 다니던 종가집 앞마당,

 이웃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O시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에

이용하던 것을,

지금은 시골도 집집마다 차가 있어

하루에도 몇번씩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온갖 차들이 지나다녔을테니

나라도 그리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부득이한 조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종가집 할아버지 손자를

원망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사람들은 자기 아쉬운 것 먼저 생각하며

남의 말을 하는 법이니...

 

< 무덤들 >

 

전에 내가 왔었던 10여년전만 해도

비록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와는 달리

할아버지 소유였던 논밭들 남의 손에

넘어가기는 했어도

그냥 온전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그 논밭들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공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어

진절머리가 나기는 했으나

그 논밭들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야산은

아직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엔 상여집이 있어서

무서워서 근처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산,

봄이면 뻐꾸기  울고

어떤 때는 솔개란 놈이

이 산 위를 늠름한 모습으로 유유히 날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있는 산 ,

그 산으로 나보다 나이 적은 아저씨는 안내를 했다.

10여년전 왔을 때는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할아버지 죄송해요'하면서

멀리서 할아버지 산소 있을 곳을 향해 절만 올리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그 산으로...

 

 

<종가집 장손 무덤>

 

할아버지 산소를 가는 길에

새로이 생긴 무덤이 하나 있었다.

정갈하게 상석, 비석까지 세운 잘 만들어 진 무덤

 누구 무덤인가 보니 종가집 장손이다.

큰 삼촌 또래여서 나보다 10여년 정도 위였으니

75세 정도 됐을텐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얼마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작은 아저씨의 말

'종가집 제일 어른이 되더니 못할 짓 많이해 일찍 죽었다는 악담.

나보다 대여섯살 위인 그 밑의 내 사촌형 또래도 이미 죽었고

나보다 몇살 아래인 사촌 동생 또래인 또 다른 동생도

죽을 날이 오늘 내일 한단다 '

종가집도 이젠 거의 망하다 싶이 됐다면서

아주 잘 된 일이다 싶다는 뜻을 담아

'이제는 고향 마을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제일 잘 된 사람이여'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담긴 말투로.

 

하긴 100세 장수 시대라곤 하지만

60세가 넘으면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게 자기 건강이니

75세까지 살았다면

나는  앞으로도 10년은 더 살아야 다다르는 나이이니

'오히려 부러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생각을 하며 그냥 스쳐 지나간다.

절을 하기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자그마한 비석에 새겨있는

문희공파 몇대손 누구라는 명기를 흘깃쳐다 보면서

역동 우탁 선생이 우리들 시조이고

종가집 손자는 선생의 직계이고

'아저씨와 나는  방계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

 

초라했다.

그렇지만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상석, 비석 하나도 없는 평범한 무덤

당신들 그리고 자식들 끼니는 굶지 않았으나

결코 여유로울 수는  없었던 그런 삶

평생을 논밭에서 김매고 풀 뽑으며

허리가 휘어져라 힘들게 일하며 고되게 사신 삶

일제 시대에 태어나 육이오 전쟁까지 겪으며

나라 잘 살게 된 것 보기도 전에

억척스레 일궈낸 전답들

당신들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남의 손에 흔적도 없이 넘어가 버린,

그래서 이제는 당신들 누워 계신 그 무덤 자리하고

당신들 살아 계실 때 사시던 집

이제는 폐가가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어 버린 집,

당신 장손인 사촌형 담배연기에  찌들어

겨우 60된 나이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탓에

그 밑의 나하고 동갑내기 사촌이 물려받아

매물로 내놨다는

내 어릴 적 추억이 남아있는 집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계시다.

직계 자손인 큰 집 내 사촌들이 잘 되어 있다면

번듯하게 상석, 비석은 마련해 드렸을텐데,

방계인 나는 방계라서 무심한 탓에

제사 한번 챙겨드리지 않았고

이제 나도 늙어가면서

마음은 비석, 상석이라도 만들어 놓고 싶으나

그럴 능력이 안되니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인 건  

나 고향 할아버지 댁 떠난 9살무렵부터

고향 할아버지댁에서 산

큰 집 내 사촌들 

명절이면 지극 정성으로 벌초도 하고

다녀 간단다.

그에 비해 방계인 탓에무관심하고,

여유롭지 않은  삶 탓이라고 핑계대며

계들인 사촌들 변변치 않게 살고 있다고

원망만 하고 지내던 나

정작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손자인 나.

 

새삼 죄송스러운 마음임을 깨닫고

종이 컵에 소주 한 잔 딸아놓고

하얀 은박지에 과자 몇개 담아 놓고

큰 절 올리며

'죄송해요 할아버지, 할머니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지하에서나마 편안히 잘 계세요'라며

마음 속으로 말씀드리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음 산소로 가십시다' 라고 

작은 아저씨에게 말을 건넨다. 

'아마 살아 생전에 다시 오기는 어렵겠지 

혹 자꾸 늙어가면서

마음이 변하게 되면 몰라도'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큰 아버지 무덤>

 

절하기 싫었다.

그냥 지나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별 수없이 큰 절은 했다.

그렇지만 술을 안 딸아 올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지못해 큰 절만 하면서

집안 망친 양반이란

원망하는 마음만 담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작은 아저씨에게

'큰 어머니는 화장했겠군요'라고만

물었다.

 

 

<당숙 할머니 무덤>

 

이곳에 누워 계시리라곤 생각을 못했다.

돌아가신 가까운 친척들 산소가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당숙 할머니가 이곳에 계시리란 생각을 미처  못했다.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생업에 지친 몸을 이끌고

문상을 가 새벽 2시경까지 빈소를 지키다

다음 날 출근해야 돼서

새벽 발인을 못봐서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당숙 아저씨에게 건네고

빈소가 차려져 있는 당숙아저씨 집을 나섰던  것이 

벌써  20여년전,

늘 불쌍한 할머니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당숙 아저씨

할머니  묘소는 고향에다 모셔다 놓았다.

안내하던 작은 아저씨

'이게 당숙 할머니 산소'라고 알려주며

할머니 아들인 당숙아저씨,

이장을 해서 좀 위에 모시고

그 자리엔 자기 묘자리를 만드는 중이란다.

당숙 아저씨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면서

할머니 산소에 대해 지극정성으로 묻는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돌아가신 다음에 그리 신경쓰면 뭐하나? 

그리 힘들게 자식 뒷바라지 하며 사셨는데

살아계실 때 좀 잘 모시지.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또래 친척분들 중

제일 먼저 돌아가시게 해놓고는'

투덜거리는 나의 말에

작은 아저씨 왈

'묘자리 옮기는 것도 자기 아들 성묘 다니기 편하게 하려고'란다.

'헐~ 그러면 그렇지'하고 끌끌 혀를 차며

다음 산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소자리도 어수선한데 큰 절 올리는 것은 생략합시다'라고 말하면서...

 

 

<작은 할아버지네 일가 무덤들>

 

정갈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자식들이 잘 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부모 잘못 만나 뼈빠지게 고생만 하다

먹고 살만해지니까 덜컥 죽을 병에 걸려

60이 겨우 넘은 나이에 세상을 뜬,

작은 할아버지 두 분 중

큰 작은 할아버지의 장자인 아저씨가

정말이지 낳아 준 것밖에 해 준 것이 없는

아저씨 아버지인 내 큰 작은 할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놓은 산소 자리 땅.

 

제일 윗 자리에 증조할머니

그 밑으로 작은 할아버지 두분 내외 산소가 옆으로 나란히,

또 그 밑으로 60이 조금 넘어 세상을 뜬 작은 아저씨 무덤.

 

산소 안내해주는 작은 아저씨, 나에게

 '증조할머니 산소부터 절을 올리란다.'

이 아저씨 아니었으면 몰랐을 증조할머니 무덤

내 어릴 적 서울로 이사할 때인

9살 무렵에도 살아계셨던 증조할머니,

앞을 못보셔서

변소를 갈 때면 늘 담벽에 손을 잡고 다니시던 증조 할머니

난 그것이 무슨 재미난 구경꺼리인 양,

증조할머니 손 잡아드릴 생각은 안하고

변소까지 졸래쫄래 따라가

증조할머니 변소에 안 빠지는 것을 신기해하며 구경 하던

철부지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죄송해요 .증조할머니'라는 마음을 담아 큰 절을 올렸다.

증조 할머니 앞을 못보게 되신 것이

요즈음은 병축에도 안드는

백내장 때문일 것이라고

의술이 형편없었던 60년대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가난한 농촌 살림살이여서

속수무책 놔둘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던 기억도 떠올리면서...

 

큰 작은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무능력자셨다.

고향에 물려받은 땅도 얼마 없었지만 그보다는

작은 할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재혼으로 결혼한 작은 할머니 농사일을 싫어하셔서

얼마되지 않는 전답, 아우인 내 막내 작은 할아버지에게 맡기시고

내 아버지의 사촌 누이인 나에게는 고모뻘인

딸이 시집가 사는 곳인 파주 기지촌이 있는 동네에서 사셨다.

이미 연세가 많으신 나이기도 했지만

작은 할머니가 미제물건 장사로

양색시들 뚜쟁이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국민학교 5,6학년부터중학교 1학년 까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본 큰 작은 할아버지 댁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 거지꼴, 그런데도 두 노인네 금슬이 좋아

나보다 나이 어린  아저씨 아주머니뻘인 자식들이

줄줄이 다섯이나 되었다.

그러곤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으면서 내 국민학교 동창이 되어버린

제일 큰 아저씨가 이 동생들 뒷바라지

그것도 다 이복인 동생들

뒷바라지 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 국민학교만 나와 어린 나이부터 공사판으로 떠돌며

뼈 빠지게 고생해 번 돈으로...

 

둘째 작은 할아버지는

나를 산소 안내하는 아저씨의 아버지,

평생 고향 마을에 사시면서 작은 할머니와 금슬도 좋아

나보다 나이 많은 큰아저씨 ,

일찌감치 스스로 삶을 마감한 아저씨 말고는

그 밑으로 나보다 나이 어린 아저씨 아주머니를

둘씩, 넷이나 더 낳아

제일 막내 아들은 대학까지 보내고

두 아주머니들 모두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해

모두들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

가방 끈은 제일 짧으나 고향을 지키고 살아오며

제법 알부자가 되어 있는 나에게 산소 안내하는

이 아저씨까지 포함해서

모두들 잘 살고 있다.

맏아들임에도 집안 형편이 어렵던 시절에 태어나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하다

아내인  아주머니 등쌀에 못이겨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가

가방 끈이 짧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힘으로 할 수 있는 막노동 뿐이어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사는 것이 고달파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뿐.

 

 

내 국민학교 동창인 작은 아저씨

사실 이번 고향 방문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 이 아저씨

 평생을 힘든 노동일하느라 힘들어

술 , 담배로 그 힘듬을 달래며 지낸  것이

급기야는 건강을 해쳐

이제 겨우 두 발 뻗고 먹고 살만해지니까

긴장이 풀려 그런 것인지 덜컥 암에 걸려

60이 겨우 넘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림 공부하겠다고 조기 퇴직해

초심대로 그림 공부만 열심히 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있는 내 돈이라고,

 좀 더 불려보겠다고 무리한 욕심에 빠져

스로를 자책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아 있었던 힘든 때여서

아저씨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문상을 안가고

'아저씨 미안해요. 아저씨 누워있을 곳 내 알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면 고향 다녀올 겸 해서

아저씨 산소에 찾아가 소주 한잔 , 담배 한가치

꼭 올려주고 큰 절 하리다' 한 것이 벌써

5~6년은 족히 지난 듯 싶다.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제서야 겨우 찾아온 발걸음.

미리 준비해 온 술 한잔 딸아 놓고

담배 한가치에도 불 붙여 올리고

큰 절을 올린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찾아와서. 어디 그곳에서는 마음 편히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마음 속으로 물으며

'잘 지내고 있어요. 만약에  저승이라는 곳이 있어 죽은 사람들

다 만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거기서 만납시다. 내 삶도 뭐 얼마나 남았겠어요.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이제 돌아가신 친척분들에 대한 마음의 빚은

다 갚았다 싶어

' 잠시 한 숨 돌리고 내려가십시다'라고 말하는데

아저씨 무덤이 아닌 돌기둥 비슷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에도 절 한번 해달란다'

의아스런 눈빛으로 '누구냐'고 묻자

'형님 모신 자리란다'

아저씨의 형님인 내게 큰 아저씨인 아저씨를 모신 곳,

아마도 아저씨 스스로 목숨 끊은 뒤

화장해서 수습해놓았던  분골들을

작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최근에

산소를 쓰면서 이때 모셔다 놓은 모양이다.

 

불쌍한 아저씨,

 그래도 동생이 잘 돼서

죽어서나마 고향 땅 양지바른 곳에

 이리 묻혀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다 싶었다.

삶이 고달파

당신 명을 당신 스스로 끊었을 그 때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오는데

그래도 아저씨

'죽어서나마 이리 편하게 있어서다행입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크게 큰 절을 올렸다.

 

 

<맺는 말>

 

산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어릴 적 수도없이 오가며 놀던 들판

내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모습은  이제 없었다.

할아버지 논밭이 유난히 많이 있었던 곳,

그렇다고 그 논밭이 식구들 여유로운 삶을 보장해 준 정도는  아니었고

그나마도 이미 오래 전 큰 아버지 대에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렸지만

그래도 십여년 전엔  들판 모습 예전 그대로여서

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할아버지 논밭이 있던 자리 여기저기에

 질서없이 들어선 자그마한 공장형 건물들은

내 어릴 적 추억을  깡그리 뺐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 변소에서 퍼담은 두엄통 양어깨에 메고 힘겹게 다니시던 곳

할머니,

 하얀 수건 머리에 쓰고

 짚으로 만든 소쿠리와 호미를 옆구리에 꿰고

새벽부터 김매러 다니시던 곳.

봄이면,

다들 친척인 마을 장정들 한데 모여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또 다시들 모여 벼베기를 하던 곳.

그런 날이면 내 젊은 엄마

30도 채 안된  아름다운 모습의 내 엄마

광주리에 갓 지은 밥하고

맛있는 반찬담아 머리에 이어 나르고,

나는 그 엄마 곁에 막걸리하고 물 담은 주전자

낑낑거리며 힘겹게 들고 뒤따르던

그런 추억이 담겨 있는 곳.

 

서울로 이사간 뒤엔 여름방학 때 가끔 내려오면

할아버지, 밭에 참외 심어놓고 원두막 만들어 놓으셔서

그곳에 올라가 참외 깍아 먹고

낮잠자며 놀던 추억이 있는 곳

그곳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비록 내가 물려받을 땅은 아니고

큰 집 사촌들이 물려받을 땅이었지만

할아버지대에 있었던 논밭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내 사촌들 '저게 우리 땅이여'하며

자랑스럽게 가리킬 수 있는 땅이 남아 있었다면

그나마 자그마한  정이라도 남아 있을텐데

이제는 고향에 정을 줄

아무 것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고향의 모습이 내 어릴 적 옛 시골의 모습을 잃고

도시화란 이름으로 황폐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또 다른 증명이기도 하겠지만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이

내 마음 속의 고향을 뺐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져 있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 고향 마을이,

육이오 전쟁 중에도 피해를 전혀 안입었다는 그런 오지 마을이,

비록 가난들 하기는 했지만

이웃간에 정이 넘쳐 흘럿던 그런 마을이

이제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그런 황량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온 몸으로 쓰리고 아팠다.

만정이 다 떨어지도록.

 

아저씨 집으로 내려와

이제 다시는 안 오리라 마음먹고

고향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면서

'아마 다시는 오기 어려울겁니다. 그러니 사촌들들 오면

나 왔다 갔다는 말 하지말고,

아니 말은 해도 되겠군요.

그냥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라는 정도만

얘기하세요.

아저씨도 잘 지내고 계시고.'

 

나의 이 말에 아저씨는 당혹스러웠는지

'조카님 그러지 말고 내년 여름에 오시게

내 토종닭 잡아 냄세'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 오라고 말한다.

 

아마도 가까운 일가 친척 중에는

그래도 공부도 잘해 명문대학도 다니고

꽤 괜찮은  직장이라는 은행도 다니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척이면서

서로 간에 같이 나눌  자그마한 추억이라도 있다는 것이

그래서 따로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서로 통할 수 있는 사이란 것이

그리 말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저씨 내 속마음 알까?

자기는 평생 고향마을에서 살면서

마을 변해가는 것 지켜보며

그 과정에서 

'시대가 변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변화이니 

이에 잘 적응하여 잘 사는 쪽으로 노력해보자'하여

결과적으로 잘 살게 되어 지내고 있으니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와,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어쩌다 고향마을을 찾을 때면

내 어릴 적 뛰놀았던 고향마을 모습을 그대로 보고 싶은 나에게,

비록 왕사탕 한개 먹어보지 못하고 지냈으나

그것이 가난인 줄 몰랐던 철부지 어린 시절

그래도 하루 세끼 밥 거른 적 없고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엔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그때는 할아버지 밥상머리에 붙어 앉아

소고기 장조림을  먹기도 했던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고 싶으나 ,

이젠 그런 추억을 떠올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오히려 만정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변해버린 고향마을에

무엇을 보자고 또 다시 발걸음을 하겠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 마음을...

 

"잘 지내요. 기회가 되면 또 올께요"라고 아저씨에게

차 안에서 손을 흔들면서 말을 한다.

속으로는

'고향에 무에 볼게 남아있어 다시 오겠어요. 다시는 안 옵니다'라고 다짐하며

차를 고향마을 밖으로 내몰아 나간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아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이런 나의 모습을

황폐해진 고향마을이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러면서

'이보게, 자네. 고향이란 그런 것이 아니여.

자네, 부모가 마음에 안든다고 버릴 수가 있는가.

못하지? 고향이란 그런 것이여. 부모와도 같은.

설사 발걸음을 안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자네 마음 속에 이미 들어있는

고향에 대한 마음은 절대 접을 수 없을 것이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이런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모습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할아버지집 마당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나 태어나기도 전 언제인지도 모를

아득한 시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느티나무

앞으로 나 죽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고향마을의 변해 가는 모습과

  고향마을에서 태어나고 살다 죽어갈 사람들의 모습을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수명이 다할 그날까지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그 느티나무.

 

' 이보게, 잘 가시게 .

자네 비록 지금은 마음이 아파

다시는 안 올듯이 그러고 가지만

그래서 설사 발걸음을 다시는 안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자네 마음 속에 남아있는

고향마을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네.

젊은 시절 그리도 아름답던 아내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주름살 생긴

늙고 병든 모습으로 자네 곁에 머무르고 있어도

추하게 보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듯이

금 자네 눈 앞에 보이는

고향마을의 모습이 많이 실망스럽기는 해도

자네 마음 속에 남아있는

고향마을에 대한 추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네.

자네 목숨이 다하여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는..

 

그러니 집에 돌아가 마음이 추스려지면

다시 한번 고향마을을

떠올려 보게나.

자네 마음 속에 남아있는

고향,

어린 시절 뛰놀았던 그 고향마을을

그리하면 지금의 섭섭한 마음은

다 사라져 없어지고

다시금 고향을 추억하며

그리워하게 될 것이네.

마치 젖먹던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젖가슴처럼 말일세.

고향이란 그런 곳이라네.

어린 시절 엄마 젖가슴 같은

그런......

 

 

2014. 11.30일 두 달여 전 고향에 다녀 온 소감을 2개월에 걸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