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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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년 6월 11일 ~ 1949년 9월 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바그너 이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독일 후기 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 손꼽힌다. 그의 1896년작 교향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삽입곡으로 유명하다. 젊어서는 리스트의 영향을 받아, 교향시 <돈 후안> <교향곡 2번 알프스>을 쓰고, 그 후 바그너의 영향으로 오페라 <살로메> <장미의 기사> 등을 완성하였다.
[작품 모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빈의 대중적인 왈츠 작곡가였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나 그 자손들과는 연관이 없으며, 까리용 제작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1864년 6월 11일,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뮌헨에서, 뮌헨 왕립 오페라의 수석 호른 주자였던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완벽하지만 보수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6세 때 작곡을 하였다.
소년 시절에 그는 뮌헨 왕립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참석할 수 있는 좋은 행운을 잡았고, 또한 그곳의 보조 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법에 대한 개인 교습을 받았다. 1874년에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탄호이저》, 그리고 《지크프리트》를 들었다. 바그너의 음악이 슈트라우스의 음악 양식에 준 영향은 깊었지만,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그가 바그너의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금했다. 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얻은 것은 16세 때였다. 사실, 슈트라우스 집안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말년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것을 깊게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882년에 그는 뮌헨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예술사를 배웠지만 일년 후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거기에서 그는 자리를 얻기 전에 보조 지휘자로서 한스 폰 뷜로에게서 잠깐 배우고, 뷜로가 1885년에 은퇴했을 때에 뮌헨에서 그의 자리를 이었다. 이 시기 그의 작곡법은 꽤 보수적이어서, 그의 아버지에게 진리였던 로베르트 슈만이나 펠릭스 멘델스존의 양식을 띠었다. 그의 호른 협주곡 1번 (1882–1883)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곡으로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슈트라우스의 양식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조카딸 중 한 명의 남편이었던 알렉산더 리터를 만나고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그의 젊은 시절의 보수적인 양식을 버리고 교향시를 쓰도록 설득했던 것이 리터였다. 그는 또한 슈트라우스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필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소개했다. 슈트라우스는 리터의 오페라 중 하나를 지휘하게 되었고, 나중에 리터는 슈트라우스의 작품인 《죽음과 정화》에 기초한 시를 썼다.
교향곡
교향시
슈트라우스의 성숙한 개성을 보여주는 첫 작품으로 널리 인지되는 곡인 교향시 《돈 후앙》이 1889년에 초연되었을 때에, 청중의 절반은 환호한 반면 나머지 절반은 야유를 보냈다. 슈트라우스는 자신만의 음악적인 목소리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나는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길에 올랐다는 사실, 예술가가 그의 수 천의 동료들에 의해 미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에 편안하다”고 말했다. 슈트라우스는 일련의 다른 교향시를 썼는데, 이 가운데에는 《죽음과 정화》(1888–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돈 키호테》(1897), 《영웅의 생애》(1897–1898), 《가정 교향곡》(1902–1903), 그리고《알프스 교향곡》(1911–1915) 등이 있다.
오페라
19세기의 끝 무렵에, 슈트라우스는 오페라로 관심을 돌렸다. 이 장르에 대한 그의 첫 두 시도인 《군트람》(1894)과 《화재경보》(1901)는 치명적인 실패였다. 1905년에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에 기초한 《살로메》를 만들어 냈고, 반응은 교향시《돈 후안》때처럼 열정적이고 극단적이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이 이루어졌을 때, 대중의 강력한 항의에 공연은 단 한 번만 이루어진 후 끝나 버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런 상황의 상당수는 주제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부정적 반응의 일부는 그 당시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슈트라우스의 불협화음 사용에 있었다. 그럼에도 오페라는 크게 성공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오페라에서 벌어들인 수입만으로 Garmish-Partenkirchen의 그의 집을 마련하는 데에 돈을 댈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의 다음 오페라는 《엘렉트라》였는데, 불협화음을 한층 더 많이 사용했다. 이 곡은 슈트라우스가 시인 휴고 폰 호프만스탈과 협력한 첫 오페라였다. 이 두 명은 수많은 다른 경우에도 같이 일했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그의 화성 언어를 약간 순화시켰고, 그 결과물이었던 《장미의 기사》는 큰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슈트라우스는 1940년까지 주기적인 간격으로 오페라를 계속 만들어 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낙소스의 아리아드네》(1912), 《그림자 없는 여인》(1918), 《간주곡》(1923), 《이집트의 헬레나》(1927), 《아라벨라》(1932) (이상 모두 호프만스탈과의 협력에 의함), 《말 없는 여인》(1934) (대본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본), 《평화의 날》(1936) 과 《다프네》(요제프 그레고르와 츠바이크의 대본), 《다나에의 사랑》(그레고르의 대본), 그리고 《카프리치오》(클레멘스 크라우스의 대본) 등이 있다.
독주 작품
슈트라우스는 상당히 많은 독주 작품을 썼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두 개의 호른 협주곡으로, 총 2개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에도 독주 호른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연주하는 표준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바이올린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바순과 클라리넷을 위한 이중 협주곡 등이 있다. 바순과 클라리넷을 위한 이중 협주곡에는 음악외적 구도가 있는데, 클라리넷이 공주를, 바순이 그녀와 춤추려 하는 곰을 상징한다. 결국 그들은 춤을 추고 곰은 왕자로 변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슈트라우스와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이 실권을 잡은 후의 슈트라우스의 역할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계속 비정치적이었으며 전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는 제3제국의 공직자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1933년 11월에, 슈트라우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요제프 괴벨스는 그를 '제국음악원(Reichsmusikkammer)'의 장으로 지목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공직을 유지하지만 비정치적으로 남기로 결정했는데, 순진한 것으로 비판받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했을 때 가장 현명한 것으로 보이는 결정이었다. 이 위치에 있는 동안 그는 1936년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 송가를 작곡하고 지휘했으며, 또한 몇몇 고위 나치당원과 친분을 맺었다. 명백히 그의 의도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태인이었던 앨리스를 학살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35년에, 슈트라우스는 《Die schweigsame Frau》의 광고 전단으로부터 유태인 대본작가였던 그의 친구 Stefan Zweig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한 후에, 그의 '제국음악부' 지위로부터 은퇴하도록 강요받았다. 1935년 6월 17일, 스트라우스는 Stefan Zweig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Zweig에게 쓴 이 편지는 게슈타포가 가로챘고, 게슈타포는 이를 히틀러에게 보냈다. 나치는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제국음악원 회장(Reichsmusikkammer-Präsident)를 사임하도록 강요하여 그는 사임을 하게된다. 슈트라우스는 1936년 베르린 하계올림픽에서 Robert Lubahn의 가사에 곡을 부친 올림픽 개막음악(세계인이여! 우리 국민의 손님 /Völker! Seid des Volkes Gäste)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38년, 나라 전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근본적으로 평화에 대한 송가이자 제3제국에 대한 얇게 가린 비평에 다름 아니었던 《평화의 날》(30년 전쟁 때 포위된 요새 안을 배경으로 한 단막 오페라) 을 제작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뜻밖으로 용감해 보였다. 작품 내의 자유와 종속, 전쟁과 평화, 빛과 어둠의 대비로,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다른 어떤 최근 오페라보다도 《피델리오》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페라 제작은 1939년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의 유태인 며느리인 앨리스가 1938년에 Garmisch에서 가택 연금되어 있을 때에 슈트라우스는 그녀와 손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베를린과의 연결(가령 베를린의 장이었던 Heinz Tietjen)을 이용했다. 게다가 그가 그의 공직을 다른 유태인 친구와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려 했다는 제안도 있다. 불행히도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반유태주의에 대한 그의 느낌을 다룬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언을 남기고 있지 않아서, 그 기간의 그의 행적에 대한 재구성은 추측에 불과하다. 1930년대 대부분의 그의 행동이 단순한 협력과 반항의 중간이었던 데에 반해, 그의 음악만은 되돌아보건대 평화주의자 드라마 《평화의 날》과 같이 반항적인 행로가 명백했다.
1942년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빈으로 돌아왔으며, 거기에서 앨리스와 그녀의 아이들은 비엔나의 수장이었던 Baldur von Schirach에 의해 보호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조차도 슈트라우스의 유태인 친척을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어서 1944년 초에 슈트라우스가 나가 있는 동안에 앨리스와 작곡가의 아들이 게슈타포에 의해 유괴되어 이틀 밤을 갇혀 있었다. 이 시점에서 오직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개입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는 그 두 명을 Garmisch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만년
1948년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썼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가곡을 썼지만, 이것들이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곡일 것이다. 그보다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에 슈트라우스의 화성적, 선율적 언어는 이 시대에 비해 조금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곡은 항상 청중과 연주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에 독일의 Garmisch-Partenkirchen에서 나이 여든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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