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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그림 값

Bawoo 2015. 1. 16. 22:38

화가 박성남은 자신의 나이 열아홉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 박수근 화백에게 아버지 그림이 너무 좋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게 한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살아생전 아버지 그림을 인정한 사람은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그림 경기가 나쁜 요즘, 국전에 떨어져 몇날 며칠 술 마시며 불행해 했던 위대한 화가 박수근을 생각한다.

내 그림을 제일 처음 사준 분은 지금은 고인이 된 진화랑 유위진 대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누군가 돈을 주고 산 첫 경험은 화가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경험이리라.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일인데, 그때는 철이 없어 고마운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어떤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가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실은 나는 비싼 그림이 꼭 훌륭한 그림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작가의 운과 시장의 흐름이 만나 매겨지는 그림 값. 박수근과 고흐는 가난하게 살다 죽었으나 사후 그들의 그림은 만질 수도 없는 고가의 그림이 되었다. 몇백 년 뒤 누구의 그림이 비싸질지 누가 알랴.

재능 기부차 페루 여행을 가서 그림을 가르치며 만난 한 소녀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걸 맘대로 그려보라 했더니 한 소녀가 내 얼굴을 그렸다. 잘 그렸다 싶어 10달러를 주고 그림을 샀다. 내 초상을 그린 페루 소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집이 가난해서 돈을 주느냐고 물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처음 그림을 팔았지만, 너는 열두 살에 처음 그림을 파는 거라고 답해주었다. 그 애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도 커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황주리 화가 그림 사진
황주리 그림

그 애가 화가가 될지 아닐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 얼굴을 그린 페루 소녀는 한국에서 온 나를 기억해줄까? 내가 그림을 처음 사 준 그분을 늘 기억하듯이. 문득 그림이란 고마운 사람을 위해 그린 아름다운 선물이던 스무 살이 그리워진다.

나는 가끔 악몽을 꾼다. 전쟁이 나서 세상이 잿더미가 되면 화가나 그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싼 그림 값보다 너무 싼 세상 모든 곳의 억울한 목숨 값 때문에 더욱 추운 겨울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