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 작센 주츠비카우에서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뒤에 작곡과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등 피아니스트가 되려 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서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되었고, 음악 평론가로서도 활약하게 되었다.
슈만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프리드리히 비크에게는 9살된 클라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천재 신동으로 상당히 주목받는 신동이었다. 하지만 슈만에게는 아직 클라라는 너무 어렸는지 논외의 같은 스승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에르네스티 폰 프리켄과 사랑에 빠져서 그녀를 위해서 피아노 작품인 "카니발"과 "교향적 변주곡"을 작곡했다. "카니발"에서는 프리켄의 고향을 음표에 암호식으로 집어넣었을 정도였으니...[4]
하지만 그녀와의 사랑은 깨지고, 슈만은 1834년 창간된 "신음악지(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5]의 편집장으로서 본격적인 음악평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836년에는 주필이 되어 1843년까지 왕성한 음악평론 활동을 해나갔다. 1838년, 빈에서 슈베르트의 "위대한 교향곡 c장조"[6]를 발굴해서 친구 멘델스존에게 가져다 주었고 독일 음악계에서 신음악지의 영향력은 커져갔다.
한편, 이 시점에서 스승 비크의 딸인 클라라가 눈에 들어온 슈만은 이제 14살이 된 클라라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려 했다.철컹철컹 비크에게 클라라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비크는 놀라서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클라라는 상당히 명망있는 신동 피아니스트였고 자신이 모친없이 애지중지 열심히 가르치고 길른 외동딸이지만 슈만은 돈 한푼 없는 빈털털이 작곡가였으니까 말이다. 결국 비크는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로 고소했고슈만도 스승을 결혼을 못하게 한다고 맞고소 해서 희대의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추하다 싶을정도로 법정 다툼을 한 끝에 결국 1840년, 슈만이 승소했고 클라라와의 결혼을 겨우 허락받을수 있었다. 클라라와 결혼한 이 해는 슈만에게는 "가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전까지 피아노곡을 작곡해온 슈만이 중요한 가곡 작품들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 "리더 크라이스", "여자의 생애"가 이 해에 작곡된 가곡집들로 걸작들로 꼽힌다.중학 시절에 바이런·리히터 등의 낭만주의 작품을 애독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인 1841년은 "교향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 해에 교향곡 1번과 교향곡 4번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교향곡 1번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다음 해인 1842년은 "실내악의 해"로서 "피아노 오중주" 같은 실내악곡들이 작곡되었고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는등 다양한 작품들로 작곡의 반경이 넓혀져 갔다.
1844년,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슈만은 피아노 협주곡등을 쓰며 작곡에 몰두했지만 점점 정신이상의 징후가 나타나며 정신의 균형이 무너질 조짐을 보였다. 슈만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바흐를 연구하며 오르간 작품들을 작곡했고 1845년에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다. 1848년에는 유일한 오페라 작품인 "게노베바"를 작곡하기도 했다.
1850년, 슈만은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대의 지휘자겸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었다. 뒤셀도르프의 아름다운 풍경에 슈만은 감명을 받아 교향곡 3번 "라인", 첼로협주곡등을 작곡하게 되었다. 또한 "미사곡 c단조", "레퀴엠" 등도 작곡했다. 하지만 슈만은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그다지 좋다고는 볼수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탓에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1853년 11월, 슈만은 지휘자직을 사임했다. 이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이 작곡되었다.
지휘자를 사임하기 전인 1853년 9월, 슈만은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의 소개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게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능력에 감탄한 슈만은 오랫만에 펜을 들어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서 브람스를 알렸다.
하지만 브람스를 만나고 반년도 못되어, 슈만은 점점 심해지는 우울증과 뒤셀도르프 시절 지휘자로서의 스트레스가 결국 폭발하여 1854년 2월 27일, 뒤셀도르프의 라인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배가 슈만을 건져서 생명은 건졌지만 결국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병상에서도 슈만은 작곡을 시도하고 여러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이것들은 모두 나중에 클라라가 없애버렸다.
1856년 7월 29일 46세에 입원해있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클라라가 와인을 손가락에 찍어 슈만에게 먹여주려 하자, 슈만은 그런 클라라를 붙잡고 "나는 알고있다(Ich weiß)"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두고 슈만이 클라라를 열렬히 사모했던 브람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 밖에도 그의 사인이 매독이라는 주장도 있다. 슈만이 매독에 걸려서 클라라에게 전염되어 클라라가 슈만이 죽고나서 브람스의 청혼을 거부해던 것도 병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
<작품 성향 >
슈만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음악가로서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문학적 재능을 결합해 음악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바그너가 악극을 통해 모든 예술의 통합을 시도했다면 슈만은 문학적 관념 위에 음악을 두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음악으로 쓰여진 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은 우수한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좋은 협력자였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 음악적 재능과 문학적 재능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내면은 그 스스로에 의해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가공의 인물들로 명명되었다. 학자들 중에는 슈만의 정신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두개의 인격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미 예고된게 아니었나라고 보기도 한다.
스타일의 측면에서는 당대 음악가들과 다른 상당히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구사했다. 화성의 측면에서도 참신한 화성을 이끌어 냈고, 특히 개성있는 부분은 바로 리듬으로서 낭만주의 음악가들중 슈만의 리듬에 대한 감각이 최고라고 일컬어도 될 만큼 그의 작품에서 리듬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부점음표나 당김음을 자주 사용하고 강력함이나 마치 떠다니는듯한 느낌을 리듬을 통해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선 아주 작은 동기가 작품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곡 전체가 중심축을 이루는 작은 동기와 관련되게 구성하는 특징을 볼수 있다. 때때로 이런 동기들은 숨겨져 있기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동기들은 지명이나 인명을 음표로 옮겨놓은 것이여서 일종의 암호같은 것이기도 했다. 앞에서도 나온 피아노 작품 "카니발"에서 약혼자의 고향을 음표속에 숨겨두는등의 방식이 그런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음악가는 역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라고 볼수 있고, 음악의 시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자신이 발굴한 음악가였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당시 재조명되고 있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들을 연구해 그의 대위법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 초기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피아노 작품들이다. 작품번호 1번 아베크 변주곡부터 23번까지가 모두 피아노 작품일 정도인데 이는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을 피아노 작품으로 대신 풀려고 한것일수도 있다. 슈만의 피아노 작품들은 정말 어렵다는 평을 듣는데 이유인즉슨, 마치 오케스트라가 울리는 것처럼 슈만의 대곡들은 다른 작곡가들의 대곡에 비해 상당히 스케일이 큰데다가, 표현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다.[8][9] 또한 노벨레테라고 불리는 표제가 있는 피아노 모음곡 장르를 창시하기도 했다.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은 "가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때에 슈만의 대표적인 가곡들이 다수 작곡되었다. 슈만 자신이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시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시와 음악의 결합을 추구한것이 그의 가곡의 특징이라고 볼수 있다. 그가 가곡의 가사로 채용하고 있는 시들은 당시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들로서 슈만은 그들의 시 가운데서 신중하게 텍스트를 골라 곡을 붙였다. 하이네, 괴테,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 등이 슈만의 가곡에 채용된 시를 쓴 시인들이다. 또한 그의 가곡은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가 단순히 반주를 하는것을 넘어서서 솔로 연주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시인의 사랑"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1842년에 집중적으로 작곡된 실내악곡에서도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현악 4중주곡도 쓰긴 했지만 역시 그의 실내악곡에서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피아노 4중주와 피아노 5중주로 피아노 5중주에서는 현악4중주에 피아노가 결합되어 마치 피아노가 협주곡처럼 쓰여지고 있다. 이런 실내악에서의 피아노 활용은 브람스가 계승해서 더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관현악에 있어서는 슈만의 능력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어린 슈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같은 명교향곡을 남기고 싶어했고 이런 야심은 1841년에 교향곡 1번과 4번이 완성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슈만의 교향곡중 제일 특이한 것은 역시 4번으로, 4번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치 곡 전체가 하나의 소나타 형식으로 쓰여진 곡을 연상시킬 만큼 구조적으로 주제의 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교향곡 4번의 또다른 특징은 각각의 악기들의 솔로 연주가 거의 없고,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는[10] 부분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는 개정후에 이뤄진 것이다. 이를 두고 당대의 음악가들은 별로 좋지 않은 개정이라고 혹평했다. "오케스트라가 마치 피아노 같다"라거나, "생기가 없이 뻥뻥 울리기만 하네"라는 식의 평이 당대의 평이었고 그래서 성에 안찬 음악가들은 아예 직접 슈만의 교향곡을 뜯어고치기도 했다.
구스타프 말러가 대표적인 슈만 교향곡의 개정을 시도[11]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에도 말러가 개정한 슈만의 교향곡의 연주가 이뤄지고 있다.현대에 와서는 슈만이 무능해서 그런 관현악법을 구사했다기 보다는 의도적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그래서 슈만의 원래 의도에 충실한다는 차원에서 지휘자가 재량껏 오케스트라 각 파트별로 음량을 조절하거나 하는 식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
하지만 교향곡 3번 "라인"을 살펴보면 금관악기의 연주가 좀 엉성한것으로 볼때 슈만이 본래부터 오케스트라 개별 악기들의 활용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이런 슈만의 관현악법은 파울 하인리히 메르첸이 연구하여 1975년에 발표했고, 현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꼽히는 루이지 노노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에 슈만의 관현악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음악 비평가로서의 슈만>
슈만은 "신음악지"를 통해서 당대 음악가들의 음악을 평가하고 비평하는 일도 했다. 특히 슈만이 초기에 감탄한 음악가는 쇼팽으로 1831년, "작품2"라는 제목의 비평에서 "모두들 모자를 벗어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어!"라고 말하며 쇼팽에게 엄청난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쇼팽은 슈만의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찬사에 되려 왜 이러세요 부담스럽게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젊은 브람스를 발굴하고, 프랑스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베를리오즈를 독일에 소개하는등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재능있는 음악가들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다.
슈만이 음악 평론을 하는 방식은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 단체에서 단체의 멤버들이 가상의 좌담회를 한다는 형식으로 글이 쓰여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다비드 동맹의 멤버중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의견을 드러내는 분신의 역할을 했다. 플로레스탄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면모라면, 오이제비우스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면모를 보였다.
비록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음악가라도 좋은 부분은 높게 평가할 만큼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로시니나 마이어베어의 오페라에 대한 평가는 좀 박했고, 쇼팽이나 브람스는 높게 평가했지만 당대에 그들에 비견될만한 피아노 음악을 쓴 알캉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비평을 쓰는등 공정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2]
그밖에 슈베르트를 세상에 알리고, 멘델스존과 마찬가지로 바흐의 음악을 재평가하여 바흐 전집을 출판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 대부분의 책에서는 '기계 장치'정도로 기술되어 있다, 혹은 '너무 연습을 많이 한 나머지 손가락에 이상이 생겻다' 정도로도 써있다.
[2] 다만 현대에 와서 학자들은 슈만이 모래주머니를 달고 무리하게 연습을 해서 부상을 당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손가락에 장애가 있지 않았나라고 보고 있다. 약지의 관절에 종양이 생겨서 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게 된것이 진짜 이유가 아닌가 라는것.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무리한 연습끝에 생긴 부상으로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4] 여담이지만 솔직히 공개된 몇몇 사진들만 클라라랑 비교해보면 에르네스티는 클라라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5] 오늘날까지도 발간되고 있다. 지금은 독일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쇼트 뮤직의 후원을 받고있다. 하여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다.
[6]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더 그레이트를 말한다. 같은해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축소된 형태로 초연했다.
[7] 여기서 2악장 맨 마지막 부분이 그 악명높은 8~90년대 공익광고협의회 사운드로고다.
[8] 언뜻 보면 슈만 피아노 소나타 2번 같은 곡이나 그의 소곡은 '뭐야 ㅈ밥이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그의 곡들은 대충 쳐보면 리스트처럼 별로 화려하지도, 쇼팽만큼 별로 시적으로 들리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안듣고 대충 연주한다면 '애매모호한 스타일의 곡'이라고 속단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쉬운 곡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표현적인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곡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려해 질 수도, 시적으로 들릴 수도, 심오하게 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테크닉이 좋은 피아니스트들만이 잘 살려 낼 수 있는 곡들이 대곡뿐만이 아니라 소곡에까지 포함된다. 이유는 아티큘레이션(이음줄)이나 외성,내성이 너무 섬세하게 쓰였기 때문,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뭣도 모르고 슈만 받은 작곡 전공생들이 몇개월 하고 피토하는 일이 상당히 있다.
[9]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서 어떤 예고생이 슈만의 피아노곡의 특징을 문장에 비유한바 있다. 다른 작곡가들의 피아노곡이 "나는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식이라면, 슈만의 피아노곡은 "나는 학교에 갔는데 학교에 가는길에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무척 푸르르고, 길가를 보니까 풀들이 싱그럽고~"이런식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