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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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무렵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 |
출생 | 1892년 12월 4일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페롤 |
사망 | 1975년 11월 20일(82세) 스페인 마드리드 |
사인 | 병사 |
거주지 | 마드리드 |
국적 | 스페인 |
별칭 | 엘 카우디요 |
직업 | 군인, 정치가 |
종교 | 천주교 |
자녀 | 딸 카르멘 프랑코 |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스페인어: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1892년 ~ 1975년)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스페인의 총통(국가원수 겸 수상)을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스페인의 군사독재자였으며, 왕정을 타도하였으나 그 자신은 군사독재, 전제 정치를 수행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수장, 지도자라는 의미의 엘 카우디요(El Caudillo)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생애
파시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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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 지방에서 출생하여,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차차 세력을 강화하였다. 1931년의 공화 혁명 때 공화 정부 쪽에 가담하였으나, 얼마 후 거기서 터전을 닦아, 1936년 총선거에 인민 전선파가 승리하자 중앙의 정치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사회주의 정부인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내전에서 그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일·이탈리아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 1937년 스스로 팔랑헤당의 당수가 되었다.
가톨릭국의 수호자
인민전선파들이 스페인 내전을 "군사쿠데타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려는 투쟁"으로 본 데 반해, 프랑코는 자신을 "무신론 공산주의에 맞선 로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수호자"로 생각하였다. 내전에서 승리한 뒤 프랑코는 "나는 오직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만 책임을 질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제3공화국을 수립하여 막강한 독재체재를 구축하였다.
나치 협력과 유대인 학살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페인 내란 때 프랑코를 지원해 준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하였고 여러 수용소를 짓고 반대파 뿐만 아니라 망명 온 유대인들까지 학살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유리하게 되자, 동맹을 끊고 연합군 쪽으로 전향하게 된다. 따라서 프랑코는 나치 협력자이면서 나치 협력자들과 달리 처벌받지 않았다. 실제로는 여러가지로 측면 지원하였으며, 전세가 변함에 따라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출처 필요].
민주주의의 파괴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그는 모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분쇄했다. 그에게는 군대, 팔랑헤당의 지지가 있었고 무었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민주주의를 말살시키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씨를 말렸다. 정치 단체나 노동조합 등 일체의 조직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는 문을 닫았으며 바른 말을 하는 언론인은 모두 투옥되었다. 이런 억압을 피해 1950 - 60년대에 25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스페인을 떠나 인근의 프랑스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1]
유아 납치
프랑코는 또 철저하게 반대파에게 보복하기 위해 좌파 인사들의 유아 납치를 저질렀다. 이 납치에는 가톨릭 교회 수녀들까지 가담했다.스페인 내전 당시 자행된 학살과 고문 등 반인도적 범죄 수사로 명성을 얻었던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2008년 프랑코가 자신의 정적을 지지한 여성으로부터 수천 명의 아기를 빼앗도록 명령했는지를 조사하려고 프랑코 독재 기간에 대한 조사를 확대했었다. 가르손 판사는 2008년 작성된 조사보고서에서 프랑코 정권 당시 자행된 유아 납치건수가 약 3만건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했다. 유괴된 아이들은 매장되거나 입양 등을 위해 팔렸으며 일부 수녀들은 범죄 조직과의 연계 여부에 대해 암시하지 않았지만, 유아를 매매했다고 고백했다. [2] 유아납치는 프랑코 정권이 끝난 후에도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지난 4월에는 노수녀 마리아 고메스(87)가 무려 30만 명이 넘는 신생아를 매매한 혐의로 기소됐다.[3]
이 유아납치 사건은 2012년 12월30일 MBC '서프라이즈'에 방송돼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4]
2차대전 이후
1947년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명목상 스페인 군주제의 부활이 결정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서방국가에서 가장 미움받는 독재자였으나, 그 이후 서방국과의 관계가 차츰 개선되었고, 말년에는 프랑코는 온건한 정치인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1973년에 수상직을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에게 넘겨주고, 그는 국가원수 직만 맡게 되었다. 1975년에 그가 죽은 뒤, 1969년에 후계자로 지명된 돈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코는 축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스페인의 축구 팀 레알 마드리드를 적극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지원해 준 것은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부지 정도이다.
사후
그의 사후 그는 전범으로 격하당했으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그의 외동딸 카르멘 프랑코는 뒷날 후안 카를로스 국왕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
가족
- 딸 : 카르멘 프랑코, 정치인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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