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배경
나는 군인이고 (민족이) 나의 명령권자이다.
나는 모든 명령에 아무런 이의 없이 복종한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내 임무를 수행한다.
-괴칼프(Ziya Gokalp. 터키의 정치가, 군인)
지야 괴칼프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 카스피 해, 지중해 사이의 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은 기원후 4세기에 세계 최초로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14세기에 아르메니아 왕국이 무너진 후 아르메니아 영토의 대부분은 터키, 즉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고, 동부의 남은 지역은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그 후 19세기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위치.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이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서 아르메니아인은 정교를 신봉하는 소수로서 공식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이등 시민의 대우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들은 공직에 취임할 수 없었고, 특별세까지 납부해야 했지만,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오스만 제국이 급속도로 쇠퇴했지만,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은 위험이 따르는 분리나 독립을 도모하기보다는, 술탄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함으로써 자율성과 권익의 증진을 얻어내는 소극적 노선을 택했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정치적 자치권을 부여해달라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온건한 요구도 오스만 제국 실권자들의 눈에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젊은 엘리트들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내정 문제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자, 술탄 압둘 하미드(Abdul Hamit) 2세는 통치권의 안정을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학살하는 것도 불사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1895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통치 기간에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1895년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국지적, 간헐적으로 지속되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1908년에 청년 터키당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청년 터키당의 한 분파인 통일진보 위원회(Ittihad ve Terakki Jemiyeti)가 1913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처음에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던 당의 노선은 강경한 민족주의로 완전히 바뀌었다. 3두 지배체제로 정착된 통일진보 위원회는 유럽 국가들의 간섭과 영토 침탈에 저항하고 왕정복고주의자들의 쿠데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배타적 국수주의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술탄 통치 시절과 같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가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새로운 터키 국가를 꿈꾸고 있던 이들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청년 터키당의 지도자 엔베르 파샤(가운데)와 제말 파샤(오른쪽)
통일진보 위원회의 3지도자. 왼쪽부터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내무장관, 수상),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전쟁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해군장관, 시리아 총독)
그 다음 해인 1914년에 일어난 1차 대전은 이런 위협이 현실화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1914년 8월에 독일과 비밀 동맹을 체결한 터키는 영토 확장을 위해 러시아를 공격했고, 연합군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듬해에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에 터키에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 직면한 터키의 극단주의자들은 아르메니아인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이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강경책 채택을 놓고 주저하는 같은 당 동료들을 지금이야말로 터키의 골칫거리인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때라고 설득했다.
갈리폴리에 상륙한 영국군
갈리폴리전투에서 당시 연합군과 맞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터키군의 '케말 무스타파' 대령(왼쪽 네번째 쌍안경을 걸고 있는 사람)
2. 학살의 전개 과정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구의 통계에 따르면, 1914년 11월 2일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1차 대전에 참전할 무렵 제국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모두 210만 명이었다. 이 가운데 15만 명은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동부의 농촌 지역에 살고 있었다. 농촌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인들과는 그런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수세기에 걸쳐 그들을 약탈해온 쿠르드족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러시아에는 17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다. 전운이 감도는 당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인으로서는 터키와 러시아 가운데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인은 중립을 표방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이들에 대한 양국 정부의 불신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특히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해 수세에 몰린 오스만 제국 군대가 전선에게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불신감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몹시 부정적인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거주지역
1915년에 들어와 전세는 오스만 제국에 더욱더 불리해졌다. 2월 이후 줄곧 패전을 예감하고 있던 청년 터키당의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한 뒤 전략적 요충지인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할 태세를 취하자 극심한 초조감에 빠져들었다. 이에 비례해서 터키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의 위기감도 커졌다. 아르메니아인 대주교는 터키 주재 독일 대사에게 아르메니아인들의 안전 보장을 요청했지만, 독일 대사는 확답을 거절했다.
이런 초긴장 상태에서 4월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 군대가 패퇴를 거듭하던 1915년 4월 11일, 반 주(州)에서 아르메니아인이 봉기를 일으켜 터키 주민을 학살하고 러시아군의 점령을 돕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청년 터키당 수뇌부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터키 군에 대항하여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무장군
오스만 제국 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4월 23일 밤부터 다음 날까지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정치, 종교, 교육 분야의 지도층 인사와 사상적 엘리트 650명을 전격적으로 체포해서 아나톨리아로 강제 이송했다. 이 작전이 일단락된 후에 정부는 ‘아르메니아 혁명 위원회’ 지도자들이 반국가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강제 이송된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은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을 도모하기는커녕, 제국 정부에 대해 적대적 태도조차 취할 줄 몰랐던 인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오히려 청년 터키당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 관계에 있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본격적인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그동안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있어왔지만 그것은 통제되지 않은 폭력에 불과했고, 이제 전면적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1915년 4월 24일 밤 체포되어 처형당한 아르메니아 지도자들
다음 달인 5월에는 내무부 장관 탈라트 파샤(Talat Pasha)가, 아르메니아인들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적들을 이롭게 할 수 있으므로, 정부가 마련한 재정착 지구로 이송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착지로 정해진 곳은 생존이 불가능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사막 지대였다. 이 발표에 이어 외국의 외교관들과 무역업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콘스탄티노플과 스미르나(이즈미르)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 추방 작업이 시작되었다.
1915년 오스만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아르메니아 인들
강제 이송을 주관한 주무 부서는 탈라트 파샤가 이끄는 내무부와 엔베르 파샤(Enver Pasha)가 이끄는 국방부였다. 내무부가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민간인을 책임졌다면, 국방부는 노무부대로 편성된 군인을 맡았다. 오스만 제국 군대에 복무하던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은 무장 해제당하고 노무부대로 재편성되었다가 1915년 4월 8일에 학살되었다. 그러므로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민간인들의 무장 해제를 위해 마을 단위의 수색 작업도 진행되었다. 은닉된 무기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당국은 기준 수량을 미리 정해놓고, 찾아낸 무기가 이보다 적을 경우에는 은닉 혐의로, 찾아낸 무기가 이보다 많을 때에는 반역 혐의로 마을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이로써 저항의 구심점을 제거했다.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강제 이소에 앞선 1915년 5월 말에 강제 이송에 관한 비상 조치법이 발효되어 일선 부대에 하달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직접 명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이 법조문을 읽은 모든 관료들은 ‘전쟁 반대와 간첩 행위의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감지되는 자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달인 6월 초에는 강제 이송 대상자의 재산 처리에 관한 보조 법률이 발효되었다. 이로써 학살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지 않게 되었다.
강제 이송이 진행되는 도중에 성인 남성과 청소년은 청년 터키당의 관료들과 정보원들의 명령에 따라 행렬에서 따로 분리되어 인근의 한적한 장소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헌병대와 산적, 그리고 유목민 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한 피로와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아르메니아인 남성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학살되었다. 행렬 속에 남아 있던 여성과 어린이도 몇 주에 걸쳐 계속된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험한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죽음의 행진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탈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915년 6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아르메니아인 처형
1915년 시리아 사막의 아르메니아인 고아들
1916년 시리아 사막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인 모자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죽은 아이를 앞에 둔 아르메니아 여인
아르메니아인 학살 지도
이렇게 해서 3,000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아르메니아인들은 차례차례 죽어갔다.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기 위해 정교회 건물과 기념비도 철저하게 파괴했다. 매우 어린 아이들은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터키식의 새 이름을 받고 터키인으로 길러졌다.
굶어죽은 아르메니아 어린이들
빵을 미끼로 아르메니아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모습
학살의 거센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전쟁 발발 직전에 210만 명에 달했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60만 명에 불과했다. 동부 지역에서 살해된 사람이 70만 명, 강제 이송 도중 ‘증발’해버린 사람이 6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사망자 수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전체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학살의 희생자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교수형당하는 아르메니아 인들
아르메니아 학살의 현장
학살된 아르메니아 인들
터키 정부가 주도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뒤에 일어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먼저, 학살이 일어난 시점은 유럽 주요 강대국들간의 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외부 세계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간섭할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다음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광신적 성격을 띤 일원적 지배 체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 청년 터키당의 강경파가 고수했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와 배타주의를 조장해서,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일말의 관용마저 아예 없애버렸다. 그 다음, 아르메니아인 학살에는 정규군과 경찰 외에도 비합법적인 무장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했다. 그들의 배후에 국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국가 기구를 장악한 청년 터키당 강경파는 학살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앙과 지방의 여러 부서들과 그 밖의 준 군사 단체들을 통제하면서, 그들 사이에 완벽한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율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료들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일이었다. 청년 터키당 수뇌부는 학살에 가담한 관료들에게는 대대적으로 포상하고 그렇지 않은 관료들에게는 해고와 처벌 같은 불이익을 줌으로써,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내부로부터의 저항 가능성을 봉쇄했다.
1915년 아르메니아인 희생자들의 머리
1915년 터키 군인들에 희생된 아르메니아인 유해
아르메니아 여성들을 학살하는 터키군
아르메니아 희생자들의 머리
터키 정부의 학살 행위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자, 서유럽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인도주의자들은 터키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다. 터키 정부를 앞장서서 비난한 사람들 중에는 모겐소(Henry Morgenthau), 토인비(Arnold J. Toynbee),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학살의 본질적인 원인은 터키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르메니아인들의 배신과 반역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 터키당의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있다고 반박하며 터키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헨리 모겐소
아놀드 토인비
아나톨 프랑스
특히 터키 주재 미국 대사였던 모겐소는 “과거에 발생한 거대한 학살과 박해들도 1915년에 아르메니아인이 겪은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국제 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모겐소는 외교적으로 항의하는 수준을 넘어서, 연이은 진상 폭로를 통해 미국 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자극받은 미국 의회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구하기 위해 ‘근동 구조 위원회(Near East Relief)의 설립을 승인했으며, 그 덕분에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근동 구조 위원회
수용소에서 아사 직전에 구출된 아르메니아 아동들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
3. 학살의 동기 : 청년 터키당의 배타적 민족주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자신들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청년 터키당의 핵심 구성원들이 굳이 학살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또한 배타적 민족주의 사고가 터키의 엘리트 집단뿐만 아니라 터키인 일반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청년 터키당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발생한 시점이다. 이 시점은 바로 국민국가 건설과 근대화 작업을 마친 서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여러모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서유럽 국가들은 먼저 오스만 제국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위협함으로써, 제국의 엘리트들이 서유럽 모델에 따른 대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서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던 아랍인, 쿠르드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에게 자유주의 사상과 민족 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그 결과 터키인은 소수 민족들의 분리주의 운동 때문에 제국 자체가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해서 터키의 신흥 엘리트들은 국민들 사이의 일체감에 뿌리를 둔 정치 권력을 창출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들은 구래의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터키 국민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위로부터 국민들을 동질화하는 작업을 시도해야 했다.
발칸 전쟁에서 터키를 공격하는 러시아군
밖으로는 서구 국가들과 충돌하고 안으로는 전통 세력과 대결해야 했던 청년 터키당의 엘리트들이 결국 선택한 길은 모든 소수 민족을 포용하는 최대 강령이아니라, 터키 민족을 기반으로 삼아 강력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최소 강령이었다. 국민적 일체감은 혈연과 문화, 그리고 종교의 동질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최소 강령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고, 이 배타적 민족주의는 다시 인종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었다.
1902년에 파리에서 모인 청년 터키당 당원들
이런 상황에서 종교부터 이질적인 아르메니아인은 터키인에게 적대적 대상으로 비쳤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내부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분리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터키인이 갖고 있던 의구심에 불을 질렀다. 1914년경에는 이미 구체화된 국민국가 건설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을 대신해 수도와 지방의 행정을 장악한 청년 터키당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 대신에 국가에 대한 국민의 복종 의무를 강조했다. 동시에 청년 터키당은 사회적 다원주의에 입각해, 터키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소수 민족에 대한 국가의 폭력 행사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터키인 사이에 유포시켰다. 이데올로기 구축, 확산 작업과 병행해 행정적 측면에서도 학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해주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곧 행정 조직의 이원화를 의미했다. 이 시기의 정부 기구는 공식적인 조직과, 중요 사안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청년 터키당의 핵심 세력에게 장악된 비선(秘線)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살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힘은 바로 이 비선 조직에서 나왔다.
4. 가해자의 기억, 희생자의 기억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식이 알려지자 연합국은 1915년 5월 24일, “이와 같은 반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범죄”에 관련된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오스만 제국에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평화 조약에는 학살 책임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국제 법정이 열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이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묘사한 그림
터키 국내에서는 1919년 1월부터 시작해서 400명에 가까운 통일진보 위원회 관련 인사들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군사법정은 통일진보 위원회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 세 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 인물 중 일부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학살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세 명의 최고 책임자는 이미 해외로 도주한 상태였다. 또한 강경한 성향의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법정의 판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 보복성의 학살을 자행하기까지 했다. 3두 지배 체제의 핵심 인물로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주도했던 탈라트 파샤는 독일의 베를린에 숨어 지내다가 1921년에 암살되었지만,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버젓이 케말(Mustafa Kemal)이 주도하는 터키 신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법망을 피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때까지, 터키 땅에서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3,000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적 터전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은 아예 ‘아르메니아인 없는 지역’이 되어버렸다.
무스타파 케말
탈라트 파샤와 그를 암살한 아르메니아인 소고몬 테흘리리안
오늘날에도 매년 4월 24일이 되면 전 세계 20여 개 국가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선조들의 비극을 추념하고 있지만, 터키 정부는 이 비극을 학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오스만 제국 영토 안에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 관료, 군대, 헌병대, 준 군사 조직, 일반 시민과 쿠르드 유목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생자의 수, 강제 이송의 동기, 사전 계획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첫째, 희생자는, 아르메니아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150만 내지 200만 명이 아니라 30만 명 정도였다. 둘째, 강제 이송은 절멸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시아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는 상황에서 이적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을 후방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군사적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은 사전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아무도 예기치 못한 불상사였다. 터키 정부의 대응은 이와 같이 방어적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터키인 학살 사례들을 지적하는 가운데 일종의 양비론(兩非論)으로까지 발전했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선전 선동가들이 불가피했던 과거의 참사를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그들이 터키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테러 행위를 변명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1984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영원한 인민법정(Permanent People’s Tribunal)은 몇 가지의 핵심 쟁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① 반 주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봉기는 청년 터키당에게 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 ② 1915년 4월 24일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엘리트 650명의 강제 이송과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시발점이었다. 이날을 시작으로 오스만 제국 정부는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일정표에 따라 이미 러시아군에 점령된 반 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부 지역의 아르메니아인을 강제 이송시켰다. ③ 강제 이송 과정에서 범죄자들로 구성된 ‘특수 조직(Teshkilati Mahsusa)’이 청년 터키당 핵심부의 지휘 감독 아래 국가 기구의 지원을 받으며 아르메니아인을 대량 학살했다. 이 조직은 1914년 8월에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의 명령에 따라 통일진보 위원회에 예속된 부대로서, 이 부대의 본래 임무는 방첩과 국경 수비였다. 그 뒤 학살 임무를 전담하면서부터 이 부대에는 사면을 약속받은 범죄자들이 대량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예산뿐만 아니라 조직과 무기 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는 ‘국가 안의 국가’였다. ④ 헌병과 일반 관료 조직도 학살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아르메니아인 피난민
아르메니아인 학살 특수 조직
영원한 인민 법정
이와 같은 사실 확인에 근거해서 ‘영원한 인민법정’은 터키 정부가 주도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 범죄라고 판결했다. 이 법정의 판결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제노사이드 협약이 제정되기 훨씬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그 협약에 제시된 구성요건에 부합하는 행위를 당시의 국제법과 관습법도 명확하게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제노사이드로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민법정은 터키 정부에,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학살의 책임을 승계할 것을 권고했다. 민간 법정에 불과한 이 법정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 판결은 제3자적 입장에서 사건의 추이와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계속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던 가해자와 희생자의 소모적 논쟁을 일단락 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검은 리본으로 학살을 추모하는 아르메니아 어린이들
* 자료 출처: http://blog.daum.net/bluros/663014 (푸른장미님: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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