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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발트해 주도권을 놓고 스웨덴과 러시아간 벌인 전쟁- 대북방 전쟁

Bawoo 2015. 6. 8. 22:23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jpg
날짜 1700년 - 1721년 2월
장소 북유럽
결과 러시아 발트해 지배권 확보 및 리보니아 획득. 프로이센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획득. 하노버 브레멘-베르덴 획득.
교전국
Naval Ensign of Sweden.svg스웨덴 제국
Flag of the Ottoman Empire (1453-1517).svg오스만 제국(1710년1714년)
Chorągiew królewska króla Zygmunta III Wazy.svg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1704년-1709년)
Flag of the Cossack Hetmanat.svg자포로제 코사크
마다가스카르 해적(1718년)
Flag of Russia.svg러시아
Flag of Denmark.svg덴마크-노르웨이
Flag of Electoral Saxony.svg작센 선제후국
Chorągiew królewska króla Zygmunta III Wazy.svg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1701년-1704년, 1704년-1709년, 1709년-1719년)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프로이센(1718년)
하노버 하노버(1718년)
지휘관
Naval Ensign of Sweden.svg칼 12세
Chorągiew królewska króla Zygmunta III Wazy.svg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Flag of the Ottoman Empire (1453-1517).svg아흐메드 3세
Flag of the Cossack Hetmanat.svg이반 마제파
Flag of Russia.svg표트르 대제
Flag of Denmark.svg프레데리크 4세
Chorągiew królewska króla Zygmunta III Wazy.svg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하노버 게오르크 1세
병력
77,000-393,400명
77,000-135,000명 스웨덴 군대
(각각 1700년과 1707년)
100,000-200,000명 오스만 제국(전투 지원시)
8,000-40,000명 코사크.
16,000명 폴란드 군대(1708년)
1,400명 해적
310,000명
170,000명 러시아
+40,000명 덴마크-노르웨이
+100,000명 폴란드와 작센(대략적인 숫자)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프로이센과 하노버의 독일 군대
피해 규모
약 25,000명 스웨덴인이 전투에서 죽었고, 합계 약 175,000명이 전쟁 중 죽거나, 기아, 질병에 희생되었다[1] 대충 75,000명 러시아군과 14,000-20,000명 폴란드, 작센과 추가적으로 8,000명의 덴마크군이 큰 전투에서 죽었다. 또한 합계 60,000명 덴마크군이 1709년-1719년 사이에 죽었다.[2]

거의 100,000명에 달하는 각국 시민들이 죽었다(러시아가 가장 많이 죽었고, 덴마크의 피해 숫자는 1709-1719년 사이의 피해를 더한 것이다), 대부분 기아와 질병, 소모전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대북방 전쟁(大北方戰爭, 1700년 ~ 1721년)은 러시아스웨덴발트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러시아는 덴마크 및  작센과 전쟁을 위한 동맹, 소위 북방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적대적인 교전이 발발한 후 (각 동맹이 격파당해) 동맹은 붕괴되었다가, 1709년에 다시 성립되었다. 다양한 전장에서 다양한 세력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러시아측으로는 잉글랜드(1707년에 영국), 하노버, 네덜란드, 프로이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1701년-1704년, 1704년-1709년, 1709년-1719년)이 참여했고, 스웨덴 측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1704년-1709년), 오스만 제국, 우크라이나가 참여하였다.(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동맹상대를 바꾸는 나라들이 있었다.)

 

전쟁은 1721년 스웨덴의 패배로 끝났고, 러시아로 하여금 발트해의 지배자이자 유럽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게 하였다. 전쟁은 동맹군이 스웨덴을 선제공격함으로서  1700년에 시작되었으며, 뉘스타드 조약, 스톡홀름 조약으로 1721년에 종결되었다.

 

 

 

배경

1560년부터 1658년 사이, 스웨덴핀란드 만을 중심으로 카렐리아(Karelia), 잉그리아(Ingria), 에스토니아(Estonia), 리보니아를 포함하는 발트해 제국을 건설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 중  독일 포메라니아 서부와 비스마르(Wismar), 브레멘 공국(Duchy of Bremen)과 베르덴(Verden)을 포함하는 지역을 획득하였다. 같은 기간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략하여 외레순 해협의 북부를 1645년과 1658년에 점령하였다. 이러한 승리의 요인은  대륙의 군세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좀 더 전문적이고 잘 훈련된 군대 덕분이었다. 특히, 적절한 훈련과 높은 소화기 장비율이 계속적인 승리를 이끄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국력은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 및 전쟁물자를 국가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난의 시절동안 벌어진 러시아에 대한 외국의 간섭은, 스웨덴으로 하여금 스톨보보 조약을 획득하게 했다. 이 조약은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는 직접적인 루트를 차단하였고, 이는 러시아가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뜻했다.

러시아의 국운은 17세기 후반에 융성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이전에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고 발트해 지방을 탈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던 표트르 대제가 즉위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1690년대 후반, 요한 파트쿨(Johann Patkul)은 덴마크와 작센이 프레오브라첸스코예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91700년), 세 국가가 힘을 합쳐 스웨덴을 공격하는 것에 합의했다.

군사력

스웨덴의 칼 12세는 연례적인  훈련을 위한 군사들을 진영에 남겨두고, 1700년에 77,000명의 군대를 모집하였으나, 1707년에는 사상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12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았다. 스웨덴군은  근대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은 군대였으나, 가장 큰 규모는 아니었다. 오스만의 대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사기가 낮았다.

러시아는  17만명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병력 모두가  같은 장소에서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이동 시스템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고, 병력으로 하여금 광대한 제국 곳곳을 다 지키게 하여 수비병들에 대한 보급과 급료 문제로  많은 재정적 부담을 떠안았다. 또한 많은 군대가 광활한 영토를 넘어 대규모 이동을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는 그의 군대가 스웨덴군과 같이 높은 사기를 지니길 원했다.

덴마크군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략에 20,000명의 지원병을 보냈고, 다른 곳을 공략할 때에도 지원군을 보냈다. 폴란드와 작센은 두 군대를 합쳐 적어도 10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운용했다.

스웨덴의 승리

1700년 나르바에서의 스웨덴의 승리 by Gustaf Cederström, 1910년작품.

 

스웨덴군은 대북방 전쟁  초기에는 국왕 칼 12세가 전장을 대국적인 상황으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사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바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단순히 적에게 복수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다른 많은 의견들을 무시하였다. 18년의 전쟁기간 동안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게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었으나, 칼12세는 도덕적 믿음에 따라 이러한 상황에 반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폴란드의 왕위를 마다하고 이를 다른 후보자인 스타니스와프(Stanisław)에게 주었고  또 작센군을 분쇄할 기회를 얻었으나, 국왕으로서의 말은 고귀한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그들을 그냥 통과시켜주는 선택을 하였다. 전쟁 초기는 칼 12세가 지휘하는 스웨덴군의 계속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덴마크는 1700년 여름에 패했는데, 이것이 대북방전쟁에서 벌어진 최초의 주요 전역이었었다. 패한 덴마크는 수년 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11월에 벌어진  나르바 전투(Battle of Narva)에서 완패하였다.

나르바에서의  스웨덴의 승리로 체결된 트라벤달 조약(peace of Travendal)으로 첫 번째 동맹이 와해된 이후, 스웨덴의 장관 베네딕트 옥센셰르나(Benedict Oxenstjerna)는 스웨덴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전야에 있던 프랑스와 해양 강대국들 사이를 전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고, 이는 전쟁을 끝내고, 칼12세가  유럽의 조정자가 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었다.

 

이때 폴란드-리투아니아(Poland-Lithuania;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 대스웨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중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의 대표가 스웨덴 왕 칼12세와 작센의 군주아우구스트(Augustus)의 중재역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칼12세는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를 폴란드 왕위에서 끌어내릴 생각으로 폴란드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중립은 종결되었다. 5년 후인, 1706년 9월 24일 칼 12세는 알트란슈타트 조약(treaty of Altranstadt)을 맺고 폴란드 전쟁을 종결지었으나, 이 조약은 스웨덴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았다. 심지어 6년의 전쟁기간 동안 발생한   전비의 배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12세는 아우구스트 2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여 그의 동맹자 스타니스와프를 왕위에 올렸다. 칼12세는  폴란드 사람들을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실수로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쫒겨난 아우구스트 2세는 왕위를 손쉽게 탈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승리

 

1700년에서 1707년 동안 스웨덴의 발트해 연안의 두 지방, 에스토니아잉그리아(Ingria)가 러시아 차르포트르에 의해 공격당했고,  리보니아 역시 완파당했다. 1703년, 표트르대제는 점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잉그리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를 건설했고, 해군기지를  설치하는 한편 화기를 사용하는 보병 훈련에 힘을 기울여  근대식 군제를 편성했다.

1714년 항코에서의 러시아의 승리 by Maurice Baquoi, etched 1724년

 

스위덴군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잃었던 지역 대부분을 을 탈환하였다. 1707년 표트르대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네바 강의 방어선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포기할 준비를 하였고,  칼12세는  발트해 지역 대부분을 공고히 장악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하였다. 다음 해, 칼12세는  러시아를 공략하였으나, 사령관 멘시코프가 방어를 담당한 스몰렌스크에서 고난을 겪었고 겨울동안 우크라이나로 진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은  추운 겨울 날씨와  표트르대제가 사용한   초토화 전술 때문에 급격히 약화되었다.  1709년 봄에 전역이 재개되었을때 , 칼 12세는  군대의 3분의 1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스웨덴군은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러시아 군에게 궤멸당했고 칼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가 추방 상태로 5년을 지내야 했다. 표트르대제의  승리 소식은  전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러시아는  단 하루 만에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웨덴군의 패배 전투긴 했지만, 전쟁 자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덴마크와 작센이 다시 전쟁에 참여하였고, 아우구스트는 보리스 쿠란킨의 교묘한 정략에 따라 폴란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표트르는 발트해에서 전역을 계속하여, 결과적으로 강력한 해군을 구성할 수 있었다. 1710년 러시아는 탈린비푸리(Viipuri)를 점령하였다. 1714년 표트르의 해군은 스웨덴 해군의 소규모 분견대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항코 반도(Hanko peninsula)에서 최초로 러시아 해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1713년에서 1714년 사이에 핀란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비푸리는 이미 1710년에 함락되었다. 1714년 오스트로보트니아(Ostrobothnia)의 이소퀴레(Isokyrö)에서 벌어진 나푸에 전투(battle of Napue)에서 최종적인 격돌이 이루어졌다. 1714년에서 1721년간의 핀란드 정복기간은 거대한 분노(Greater Wrath; 핀란드 어: isoviha)로 알려져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기간동안 많은 핀란드 인들이 살해당하거나 러시아로 끌려갔다.

결과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돌아와 전쟁 지휘통솔권을 회복하고, 노르웨이 전역을 시작했으나  1718년 죽을 때까지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단지, 스웨덴의 장관 아르비드 호른 백작(Count Arvid Horn)의 노력으로, 칼이 오스만 제국을 빠져나와 1714년 11월 발트해 남부 해안에 있는 슈트랄준트(Stralsund)를 통해 스웨덴으로 돌아 올 때까지, 스웨덴을 지켜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칼 12세는 전 북유럽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슈트랄준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칼은 여기에 1715년 12월까지 머물렀으며, 슈트랄준트가 함락되기 하루 전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스웨덴의 전비 지출은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희망이 없을 정도로 막대했기 때문에,  그대까지도  평화를 생각하지 않고 있던 칼12세의 생각은 많은 이들에게 제 정신이 아니라고 간주될 정도였다. 스웨덴은  발트해 지방과 독일 지방의 영토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다음 몇 년 동안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나,  스웨덴은 스스로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고,  프로이센하노버, 그리고 많은 독일 소제후국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질 즈음, 조금이라도 영토를 넓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최후로 덴마크와 러시아 해군의 스웨덴 본토에 대한 강력한 해상 공격이 이루어졌다.

 

1721년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에서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뉘스타드 조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해안 지방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러시아는  발트해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으며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조약을 맺기 전 스웨덴과 강화조약을 맺은 프로이센과 하노버는 스웨덴의 독일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 결과에 불만을 품은 스웨덴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하타르당의 러시아 전쟁(Hats' Russian War), 구스타브 3세의 러시아 전쟁(Gustav III's Russian War)을 일으켰다.

 

* 출처: 위키백과 - 문맥이 잘  맞지 않는 내용은 임의로 수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