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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고야 〈1808년 5월 2일〉

Bawoo 2015. 5. 30. 00:02

 

프란시스코 데 고야

(1746~1828/스페인) 

 

고야 Francisco Jos de Goya y Lucientes 1746∼ 1828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먼저 〈1808년 5월 2일〉을 보자.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한다.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고야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 리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것이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자.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른다. 희번덕거리는 눈에는 광기가 보인다. 흰 점 하나, 검은 점 하나로 광기 어린 눈을 완벽하게 그린 고야의 기법은 훌륭하다.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1808년 5월 3일(EI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하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춘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한다.

 

 

고야는 용감한 마드리드 시민의 투쟁을 기리는, 그리고 페르난도 7세의 복귀를 기리는 의미의 역사화를 주문받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제작했다. 그러나 고야는 일개 평범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늘 인간의 이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성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되는지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과 광기, 야수성에 늘 촉각을 곤두세웠던 화가였다. 그는 다시 시작된 스페인 왕조를 역사화라는 형태를 통해 기리면서도 동시에 전쟁 통에 인간들이 어떤 모습인지도 표현했다.

마네, 피카소 같은 후대의 화가들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 영향을 받아 일렬로 선 처형자들을 한편에, 다른 한편에는 곧 죽게 될 사람들을 배치하는 구도로 처형 장면을 그렸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The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

1867-68, 유화, 252-305cm.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209.5 x 109.5cm, 국립파리 피카소미술관

 

이 대표적이다. 특히 피카소는 훗날 〈게르니카(Guernica)〉를 그릴 때 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쓴 바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말, 거꾸로 쓰러지는 사람, 혼란한 와중에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칼을 들고 있는 손 등 고야의 작품에 영향 받은 모티프가 많다. 마네와 피카소 외에도 낭만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고야가 서양의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는 19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화가이지만 19세기 후반, 20세기 미술이 갖고 있던 특징을 이미 다 보여 준 화가였다. 색채를 쓰는 방법,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센스, 날카로운 사실주의, 이성과 거리가 먼 야성의 세계에도 눈을 돌린 점, 현대적인 화가상을 정립했다는 점, 상상력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점 등이 그렇다. 그래서 고야는 현대미술의 스승이면서 아버지다. <다음 백과 - 스페인 미술관 산책>

 

<참고>

 

음악사 측면으로 보면 1808년은 베토벤의 나이 38세이던 해입니다.  (슈베르트는 겨우 11살이네요.^^)

교향곡 5번 다 단조 "운명" Op. 67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Op. 68 이 작곡되었군요.

 

우리나라는 다산 정약용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옵니다.(다산선생이 베토벤보다 9살이 많군요.^^)

"1808년(순조 8년) 3월, 47세이던 다산은 8년째 살아오던 강진 읍내의 생활을 청산하고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茶山)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호는 본디 사암(俟庵)이었으나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많이 호칭되지는 않았으나, 다산이라는 곳으로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다산초당이라는 아름답고 그윽한 산속의 정자에 귀양살이 봇짐을 풀자, 다산은 본격적으로 학문연구에 몰두하면서 방대한 실학관계 저서를 남기게 된다. 그 당시까지 유행하던 유학(儒學)에 대한 모든 이론에 새로운 해석을 내리면서 독특한 다산 경학(經學)을 수립하였고 정치ㆍ경제ㆍ역사에 대한 개혁안을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논리로 전개한 학문을 그곳 다산에서 완성하였기에 뒷세상에서 다산의 학문을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기에 이른다."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 그 속에 전개되는 독창적인 학설,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여길 학문이 바로

‘다산학’이 아닐까 한다. <다산연구소 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