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다 폰테(이탈리아어: Lorenzo Da Ponte, 1749년 3월 10일 ~ 1838년 8월 1일)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생애
본명은 에마누엘레 코넬리아노(Emanuele Conegliano)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처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주교에게 입양되어 1763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주교와 같은 이름으로 개명했다.[1] 그는 같은 유대인 출신의 가톨릭 개종자 베츨라 남작의 집에서 모차르트를 처음 만났다.[1] 이후 로렌초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요제프 2세의 궁정극장에서 대본을 쓰게 되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서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을 극으로 만들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고 그 즉시 수락했다.[2] 1786년 발표된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으로 모차르트는 새로운 작품을 주문받았고 모차르트와 로렌초는 1787년 《돈 조반니》, 1790년 《코지 판 투테》에서 함께 작업했다.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빈을 떠난 로렌초는 1805년까지 런던에서 지내다 미국으로 건너갔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쳤다. 말년에는 자신의 회상록을 집필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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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다 폰테는 고전주의 시대의 대본작가다. 모차르트 최고의 오페라 부파(이탈리아식 희가극)는 모두 그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다 폰테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제 출신의 풍운아
= 다 폰테는 174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모친 사망 후 부친이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재혼하자 이에 반발해 교회활동에 전념하다 24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토록 증오했던 부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사제 신분으로 유부녀와 눈이 맞아 사생아까지 얻었다. 이는 베네치아에서 큰 스캔들이 되어 30세의 한창 나이에 추방령을 받는다.
그의 발길은 북쪽을 향해 독일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대본을 번역, 수정하는 친구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 음악가로 일하던 살리에리를 소개받아 빈으로 가게 된다. 마침 뛰어난 대본작가를 찾고 있던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는 창작 경험이 전혀 없다고 고백하는 다 폰테에게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처녀 뮤즈를 손에 넣은 셈이군"이라고 격려하며 재능만 보고 그를 채용했다.
이때부터 다 폰테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외에도 그들의 라이벌이었던 스페인 출신의 솔레르를 위해 대본을 썼다. 덕분에 빈은 본고장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베네치아보다도 활발한 오페라의 중심지로 올라섰다. 그러나 1790년 황제가 서거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다 폰테는 해고되었고 유럽 전역을 전전하다가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겨우 오페라 제작자로 입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다시 일을 크게 벌이다 파산하고 말았다. 도피하듯 신대륙으로 떠난 그는 식료품점, 이탈리아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70세가 되어서야 이탈리아 서적을 취급하는 책방을 뉴욕에 열어 안정을 찾는다. 컬럼비아대학의 이탈리아 문학담당 교수로 임용된 것은 무려 76세 때였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늘그막에 평온해지자 다시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솟아올라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치마로사, 모차르트, 로시니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매달렸다가 완전한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성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으니 보람은 있었으리라.
◆모차르트를 위해 조역에 그친 천재
= 다 폰테의 대본을 보면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 차원이 다르다. 오페라 부파라는 새로운 희가극 양식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으나 이탈리아 전통극 양식을 답습한 교과서적인 틀을 이미 탈피해 웃을 수만은 없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의 행태를 비아냥거리면서도 백작부인 로지나를 통해 쇠락해 가는 귀족사회에 은은한 빛을 비추는데, 그런 가운데 어린 미소년에게 살짝 끌리는 로지나의 모습까지 남긴 것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천재성의 소산이다. '돈 조반니'는 호색한 주인공이 죗값으로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으로 했으니 희극의 범주를 넘어선 작품이다.
원작이 없는 완전한 창작인 '코지 판 투테'는 애인 맞바꾸기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그렇더라도 사회질서 유지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코지 판 투테'의 경우 150년 가까이 부도덕한 오페라라고 방치되었다가 사랑의 본질과 그 갈등을 꿰뚫은 혜안을 뒤늦게 인정받아 지금은 현대적 애정 드라마의 규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무리 모차르트가 천재였더라도 인간에 대한 다 폰테의 통찰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처럼 극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선율을 술술 써 내려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들 오페라의 잘 짜인 구성과 맛깔스러운 대사조차 모차르트의 공으로 돌리려는 오류가 있어 다 폰테의 업적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최고에게만 열광하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보니 다 폰테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뛰어났던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 폰테는 그냥 묻히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도 리더의 능력과 실적을 빛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공적을 묻어두는 사례가 흔하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뛰어난 한두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성과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리더는 주변 어디엔가 있는, 자기 못지않은 인재를 찾아내고 인정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밤을 밝히는 것은 달빛 하나가 아니다.
[유형종 음악칼럼니스트ㆍ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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