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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장군으로 항우에게 투항하여 옹왕에 봉해졌으나 , 유방에게 패해 자결한 인물>장한(章邯)

Bawoo 2015. 10. 21. 21:03

장한(章邯, ? ~ 기원전 204년) 또는 장함(秦)의 장군이다. 진승오광이 일으킨 봉기를 진압했으나

항우에게 투항했고 삼진 중 옹왕에 봉해져 한왕 유방을 견제했으며 유방에게 패해 자결했다.

생애

진 이세황제 시대에, 진승오광이 봉기하여 진이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각지에서는 진에 멸명됐던 구 제국의 왕족들이 거병하여 독립을 부르짖었다. 진 이세황제 원년 9월(기원전 209년), 진승은 진 본토의 목전인 희(戱)에 십만 명이 넘는 군대와 장군 주장〔즉 주문〕을 파견했다. 황제가 놀라고 조정이 뒤집어지자, 당시 소부 벼슬을 지내던 장한이 죄수들을 사면해 군을 꾸리라고 진언하자 이세황제는 대사령을 내리고 장한을 대장군으로 삼아 봉기군을 치게 했다. 장한은 이세 2년 11월(기원전 208년)에 주문을 격파해 죽였고 진에서는 사마흔동예를 보내 장한을 돕게 했다. 장한은 더 나아가서 진승을 격파하고 위왕(魏王) 위구를 단월(정월)에 포위하고 5월에 위왕 구를 구원하러 온 제왕(齊王) 전담을 죽여 위구를 자결하게 했으며, 9월에는 초군과 벌인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1][2]

 

이후 황허를 건너 진 이세 3년 10월(기원전 207년)에는 공격으로 선회했다. 마침 조나라는 장수 이량이 왕 무신을 죽여 수도 한단이 혼란에 빠졌고 조왕 헐, 장이, 진여는 신도로 달아나 어수선했다. 장한은 진여 등을 공격했다 패퇴한 이량의 항복을 받아 한단을 접수하고, 한단의 주민을 하내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한단성을 파괴했다.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으로 달아났고 진여는 대로 달아났다.[3] 장한은 왕리와 섭간에게 거록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남에서 용도를 쌓아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이세 3년 11월, 초의 항우가 구원군을 끌고 와서 거록의 포위를 풀고 진 군대를 무찔러 소각을 죽이고 섭간은 자결했다. 12월, 왕리마저 사로잡혔다. 포위군이 격파당한 후에도 장한은 극원에 주둔하면서 장수 이남의 항우 군과 대치했다. 장한은 2월에 초군에게 패해 물러났고 4월에 초군이 맹렬히 공격하자 장사 사마흔을 보내 조정에 원군을 청했으나 이미 조정은 조고가 농락했고 진 이세황제는 진군이 싸우지도 않고 수차 후퇴했다고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은 조고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마흔의 권유와 진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초군을 무찌르든 아니든 조고가 장악한 진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초군에게 항복했으며 항우에게서 옹왕으로 책봉받았지만, 항우는 반란의 불씨를 우려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투항한 진군 20만 명을 신안에서 생매장했다.[1][4][2]

항우가 관중 지방에 입성한 후, 한왕 원년(기원전 205년) 정월에 옹왕(雍王)에 봉해져, 진 땅을 갈라 받아 부장이었던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와 함께 관중 수비를 담당했다. 옹의 판도는 함양 이서 일대며, 폐구(廢丘)[5]에 도읍을 두었다.[4]

 

8월, 한나라에서 한신(韓信)의 계책을 받아들여 고도현의 폐쇄된 구 도로로 나와 옹을 습격하자, 장한은 진창(지금의 보계시 진창구)에서 한군을 요격했으나 패배하고 달아나다 호치에서 한군에게 다시 패해 폐구성으로 달아났다. 한은 번쾌에게 장한이 도망친 폐구를 포위하게 하고 옹의 나머지 판도를 모두 정복했다. 한왕 2년(기원전 204년), 한은 물을 끌어들여 폐구를 공격했다.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결했다.[4] 한은 옹을 폐하고 지명 폐구를 괴리로 바꿨으며, 구 옹의 판도에 농서군, 북지군, 중지군〔후의 우부풍군〕을 설치하여 한의 군현으로 편입했다.[6]

가족 관계

  • 아우: 장평

주석

  1. 이동: 사마천: 《사기》 권6 진시황본기제6
  2. 이동: 상동, 권16 진초지제월표
  3. 이동 위와 같음, 권89 장이진여열전
  4. 이동: 위와 같음, 권7 항우본기제7
  5. 이동 현재 싱핑 시에 있다.
  6. 이동 반고: 《한서》 권13 이성제후연표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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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章邯) ?~BC 205

장한(章邯)


초한쟁패기에 살았던 진나라(秦)의 장군. 초한지에서도 등장한다.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 둘도 없는 대장군이였으나 주군복이 지나치게 없었다. 호해와 항우. 두 명 다.

조고는 2세 황제 호해에게 아첨하여 정사를 멀리하고 놀기만 하도록 만들었으며, 진승 ·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육국의 후예들의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도 황제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고 제대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장한은 본래 무관출신은 아니고 소부(少府)라는 재정부서의 관리였다.[1] 그러나 정국이 이러하자 반란 진압 사령관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함곡관에 들이닥쳐 진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간신 조고라도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에 장한을 불려들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한다. 진나라가 망조가 들어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한은 여산에서 부역을 하고 있던 죄수들을 풀어줘서 죄수들로 군대를 편성했다. [2]

비록 죄수들의 군대였지만 장한의 통솔력이 뛰어났고, 진승, 오광의 장초군은 쉬운 승리로 군기가 해이해져있었기 때문에 쉽게 격파당하여 무너져버린다. 이후 진군의 전열을 가다듬어 재기의 기반을 마련하고, 장한은 대대적인 반군 토벌에 나서게 된다.

항우에게 패배하는 BC 207년 거록전투 전까지 장한의 전공은 걸출한 것이었다. 제의 전담을 죽였고, 위나라를 격파하고 가장 강력한 반군 세력인 초의 항량과 싸워 그를 패사 시키는 등 분주히 돌아다니며 각지의 반군을 소탕했다.

이후 조나라 공략에 나서 거록을 포위했는데, 이때 송의를 죽여 초의 군권을 장악한 항우의 맹공에 패하게 된다. 장한은 이에 전열을 재정비하려고 했으나 진압이 늦어지자 간신 조고는 승상 이사를 숙청하고 장한까지 모함하려 들게 되고, 진나라에 회의를 느낀 장한은 진나라 군 20만을 이끌고 항우에게 항복해버린다. 항우는 장한과 장수들은 살려주었지만 항복한 진나라 군대 20만명은 반란을 우려하여 신안에서 생매장해 죽여버리게 된다.

항우가 진을 멸망시킨 뒤 범증의 진언에 따라 장한은 같이 항복한 진나라 장수인 사마흔, 동예와 함께 진의 영토를 셋으로 쪼개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의 하나인 옹왕(雍王)으로 봉해졌다. 같은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들을 다스리면 불만이 적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학살자인 항우에게 붙은 앞잡이로 여겨져서 원망을 받고 인심을 얻지 못했다. 예를 들어 만약 조선 총독으로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완용 같은 자를 임명했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장한, 사마흔, 동예 삼인방이 이완용 따위에 비교될만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그 정도의 증오의 대상이었다.(항우가 삼진왕을 뺀 진나라 병사들 수십만명을 생매장해 몰살 시켰으니...)
좀 더 비슷한 역사적 인물이라면 적국인 나치 독일에 항복해서 비시 프랑스 정부를 이끌던 페탱 장군을 들 수 있다.

유방의 한군이 진창로로 나와 삼진을 격파할 때, 한신의 공격을 받아 도읍인 폐구에서 9개월간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수공을 받아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자살하고 만다.

초의 투항 전까지 최소한 신안 학살 전까지 항우 이상으로 빛나던 명장이었으나, 신안대학살로 인망을 상실해 그 명암이 극명히 갈린 비운의 장수다.

초한쟁패가 테마가 되는 작품에선 대체로 원래 날리던 진의 명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3] 아예 진시황을 다루는 소설에선 이미 장한이 시황제 천하통일 패업시기부터 명장이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야기 흐름 상 중간보스격에 해당되는 위치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선 원래대로 소부의 관리로 묘사. 사명감에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지극히 성실하며, 전력을 분산시켰다 유리한 전장으로 적으로 끌어들여 전력을 집중해 강타하는 전략을 장기로 한다. 그 무략에 항우마저도 내심 경의를 가지고 있을 정도. 하지만 신안 학살 이후 완전히 루저화되고 만다. 얼굴도 통통해지고 차분한 성품이 괜한 말에도 화를 내는 등 예전과 같은 명석함을 상실해 버린다. 특히 투항과 신안 학살로 진나라 백성들에게 항우 이상으로 원수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영지의 백성들까지 그를 등져 장한군의 정보를 한군에게 알려주는 등 안습해진다. 결국 한신에 패해 자결. 1권 말미 작가의 평은 너무 뼈있고 처절하다.

생전에 그는 입버릇처럼 "나보다 더 진제국에 충성을 바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전반생은 실로 그러했다. 그러나 후반생은 사람들에게 충성심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존재로 살았다.


[4]

초한전기의 장한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조위우가 연기한다. 한국더빙판 성우는 김석환. 원래대로나 또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처럼 소부이지만 그 전부터 진시황의 근위대에 종군하고 있었다. 여타 작품에서 노장 또는 젊어야 중년으로 나온 것에 비해 여기서는 지용을 겸비한 청년장수다. 박랑사 암살사건에서 활약하는 무용과 소부로 임하며 전국의 지리와 사정을 통찰하는 지략을 보여준다. 또한 부소의 딸인 신희공주와 플래그를 세워 결혼에 이르는 등 작중에서 상당한 버프를 받는다. 하지만 대장으로 중용되기 위해 조고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의 경계를 사고 공주와의 결혼도 장한에 대한 인질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순탄치만은 않다. 게다가 노역장에서 기용한 영포가 배속된 부대를 거느리고 도주하는 등 대장군으로서의 카리스마도 좀 부족한 것 같다. 다만 이는 꼭 장한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경포가 쉽게 굴복시킬 수 없는 인물인데다가 진나라에 희망이 없어 보여 그런 측면도 있다. 진나라 다른 군사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다. 물론 그만큼 조고의 견제를 받는다.

지용을 겸비한 명장답게 불씨가 꺼져가던 진나라의 군대로 반란군을 연달아 물리치며 장도에서는 가장 큰 세력중 하나였던 항량의 군대를 박살내고 수장이었던 항량도 죽인다.그러나 조고의 견제를 받는지라 져도 죽고, 이겨도 나중에 토사구팽 당할게 뻔한 상황에서 신희공주는 조고의 심복 숭신과 몰래 손을 잡고 조고를 암살하려 한다. 숭신은 장한이 진나라 수도에 돌아와 축제에 참여하는 날 조고를 암살하려 하는데, 계획이 이미 들통난지라 숭신은 역으로 참살당하고, 신희공주는 장한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다.

부인을 잃었지만 반란을 진압해야하는지라 장한은 얼마 후 다시 군대로 돌아갔으며, 이후 거록대전에서 패전한 뒤,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러 사마흔을 보내는데, 오히려 조고가 사마흔을 암살하려 하자, 결국 꿈도 희망도 없다 여기고 항우에게 투항한다. 투항 이후 옹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지만 거록대전에서 패한 뒤 모조리 생매장한 진나라 20만 병사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방과 한신을 별 볼일 없는 떨거지라 생각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잔도를 보수하는 척 하면서 진창을 지나온 한신군에 의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한다. 죽고 나서도 종종 진나라의 명장으로 언급된다.

 

(주석)

 

[1] 고대에는 문관과 무장의 신분이 지금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 행정 업무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장수가 되어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고대의 사대부들은 문무 양면으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2] 이 여산에서 부역을 하던 죄수들은 세금을 못냈다거나, 노역에 늦었거나, 아니면 각 지방에서 끌어모은 죄수들이였고 그나마도 절도범등이라 중범죄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초나라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도 자기 동네의 죄수들을 여산으로 호송하던 도중 튀어서 세력을 만들었다. 즉 장한의 초기 병력은 멸망한 구 육국 백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중간에 전역을 시켜줄 상황이 아니니 항우가 후일 신안대학살을 벌일때 진나라 출신뿐만 아니라 육국 출신들도 대거 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고우영 초한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 등.[4] 장한이 항복을 고민하던 차에 결국 토사구팽 식으로 일생을 끝낸 백기와 몽염 이야기가 나왔으니 충성을 논하기에 앞서 진의 업보와도 같은 측면이 있다.

 

* 출처: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