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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ieuxtemps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Op.37

Bawoo 2015. 11. 23. 20:38

Henri Vieuxtemps

1820 ~ 1881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Op.37

 

 

1. Allegro non troppo - Moderato
2. Adagio
3. Allegro con fuoco

Shlomo Mintz, Violin
Sinfonieorchester des Südwestfunks
(Southwest German Radio Symphony Orchestra)
Conductor: Myung-Whun Chung

The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Op. 37, by Henri Vieuxtemps was published in 1861 and composed 1858--1859. The second movement borrows from "Où peut-on être mieux qu'au sein de sa famille?" in Grétry's opera Lucile. The work originally held only two movements, but Vieuxtemps later added a third; they are played without interruption: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베르비에 출생.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루쿨루와 안젤로 베리오(Angelo Berio)에게 바이올린을,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와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833년부터 유럽 각지와

시아·미국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져 절찬을 받았고, 1846년부터 1852년까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음악 연주가로 있으면서 그곳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71년부터 1873년까지는 브뤼셀음악원의 교수로 있었다.

 

그는 근대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연주법은 근대 프랑스의 바이올린 연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외탕은 모두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다. 그 가운데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곡은 단연코 5번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 부분에 벨기에의 작곡가 그레트리(Andre Gretry)의 오페라 선율이 사용되고 있어 ‘그레트리’란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한 이 곡은 1862년 초연 당시 베를리오즈로부터 “나에게 이 곡은 지극히 위대한 동시에 새롭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또 “만약 비외탕이 뛰어난 비르투오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서 환호할 수 있을 텐데..라고도 말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곡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협주곡의 형식을 과감히 탈피해 단악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관현악 부분의 규모와 역할이 더욱 확대되어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의 조화가 돋보이는 점, 등에서 남다른 음악적 깊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작곡가로서의 비외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 베를리오즈의 이 말은 그러나 그만큼 비외탕이 연주가로서 탁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대 대부분의 비르투오조들이 그러했듯이 비외탕도 자신의 곡들, 그리고 이 5번 협주곡 안에서 역시 탁월한 연주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교적 주법들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우선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스타카토의 사용이다. 비외탕은 슬러 스타카토(slur staccato, 또는 flying staccato), 펼친 화음 안에서의 스타카토, 약박에서 스포르잔도로 표현해야 하는 스타카토, 중음의 스타카토 그리고 심지어는 빠른 템포 안에서 포르테로 연주되는 스타카토 등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아티큘레이션을 함께 포함하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우선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슬러 스타카토는 활을 현에 붙인 채 활 끝부터 중간 부분까지를 사용해 한 활 안에서 연속되는 여러 음의 스타카토를 계속해야 하는 주법이다. 이는 보잉을 하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의 순간적인 압력과 손목은 경직된 상태로 두고 앞 팔만을 가지고 연주해야 하는 자세 등 작과 활의 이동에서 많은 연습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패시지를 화려하고 경쾌하게 이끄는 매력 또한 만만치 않다.

 

Lucilla Mariotti (13 years) plays the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Grétry", op. 37, by Henri Vieuxtemps.
She is accompanied at the piano by Susanna Pagano.
The concert, organized by Stefano Strata's Music Academy was held at the Certosa Monumentale of Calci near Pisa in Tuscany on 24 ma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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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

 

대가의 눈에 띈 잠재력 넘치는 소년의 연주

 

비외탕은 1827년 11월 29일에 리에지(Liege)의 Socie、te、 Gretry 연주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이듬해 초에는 브뤼셀에서 몇 차례 연주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대(大)바이올리니스트인 베리오(Beriot)의 이목을 끌어 그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1829년 5월에 제자를 파리로 데리고 간 스승은 비외탕의 데뷔를 위한 무대를 개최해 주었고, 그는 로드 협주곡 제7번을 연주하여 청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본 음악회를 지켜본 페티(Fetis)는 비외탕을 ‘타고난 연주가’라 격찬하기도 하였다. 1831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베리오는 탁월한 기량을 지닌 제자를 열성을 다해 4년 동안 지도하였다.

 

독일 연주여행의 성공과 파가니니와의 만남

1833년 비외탕은 늘 엄격한 연습을 고집했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음악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독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당시에 저명하던 음악가들­슈포어(Louis Spohr), 몰리끄(Wilhelm Bernhard Molique), 마이세더(Joseph Mayseder)­을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접하게 된다. 비외탕은 순회연주 도중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베토벤과 가까이 지내던 음악가들의 사교모임에 합류하게 되면서 1834년 초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실질적으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익히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외탕은 2주간의 연습 끝에 이루어진 1834년 3월 16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키게 된다. 지휘자이자 비엔나 음악원 학장이었던 란노이(Eduard von Lannoy)는 그의 연주가 ‘독창적이고 참신하면서도 고전적이다’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작곡가 슈만으로부터 그의 연주가 파가니니에 비견된다는 평을 듣는 등 연주여행을 통해 비외탕의 명성이 독일 전역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필하모닉 소사이어티(Philharmonic Society)에서 이루어진 그의 런던 데뷔 무대는 독일에 비하면 그리 열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심어주고 당시 런던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바 있는 파가니니를 만나 음악적 조언을 듣게 된다.

 

작곡 공부와 러시아 연주여행 재개를 통한 지속적인 발전의 길

비외탕은 1836년 초까지 라이하(Antoine Reicha)에게 작곡을 배우며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스스로 비오티 협주곡의 웅장하고 장대한 형식에 근대의 테크닉적 진보에 발맞춘 화려한 기술을 결합시킨 곡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파가니니로부터의 음악적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는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나중에 협주곡 제2번 Op.19로 출판되었다)이다.

라이하 밑에서 작곡 수업을 마친 비외탕은 1837년 유럽을 돌며 연주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특히 러시아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1840년 3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근간에 작곡된 「환상 카프리스(Fantaisiecaprice) Op.11」과 제1번 협주곡이 초연되기도 하였다. 첫번째 협주곡의 성공 여파는 브뤼셀에서도 이어졌으며, 1841년 1월 12일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는 “훌륭한 독주자로서의 기량이 넘쳐나는 비외탕은 이제 작곡가로서도 그에 못지 않은 명망을 얻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19일에 비외탕은 다시 런던을 찾아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런던을 자주 방문하였고, 1845년 첫 시즌부터 베토벤 4중주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843∼4년, 피아니스트 탈베르크(Talberg)와 함께한 1857∼8년, 그리고 1870∼71년 3회에 걸친 미국 연주여행을 성황리에 끝내었다.

 

러시아에서 맞이한 비외탕의 전성기

러시아 황제의 전속 궁정음악 연주자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성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지냈던 1846∼52년의 5년 동안 비외탕은 러시아에서 절찬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d단조를 완성하고, 1851년 12월에 파리에서 연주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제4번 협주곡을 ‘바이올린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장대한 교향곡’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비에니아프스키가 가장 아끼는 곡으로 유명해진 비외탕의 협주곡 제5번 a단조는 1861년에 완성되었다.

 

혼신을 다한 후진 양성과 벨기에 악파의 성립

1844년에 비엔나 출신 피아니스트인 요제핀 에더(Josephine Eder)와 결혼한 비외탕은 1855년 프랑크푸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나, 1866년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에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해외 연주여행에 몰두하여 그로 인한 성공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1871년 비외탕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뤼셀 음악원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게 된다. 그는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Eugene Ysa¨ye)도 이 시기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73년에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비외탕은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자신의 교수 자리를 임시로 위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877∼8년부터는 병세가 호전되어 조금씩 레슨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1879년에는 학교측으로부터 결국 사임 당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2년 후 알제리 무스타파의 한 요양소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비외탕 일가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은 1820년 2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조율사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르클루(M. Lecloux-Dejonc)를 사사한 그는 6세가 되던 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실력을 선보이게 된다.

 

 

 

가져온 곳 : 
카페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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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클래식사랑|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