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년 8월 29일 - 1867년 1월 14일 )는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 받고 있다.
18년간 로마에서 옛 그림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고전파의 대가로서 환영을 받았으며 르누아르·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1]
과거를 깊이 중시했던 앵그르는, 한창 떠오르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양식을 대표하는 낭만주의에 맞서 아카데미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그가 언급했던, 그의 모범상은 라파엘로가 영속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예술의 장엄한 영역을 정립한 때인 영광스러운 기억의 세기의 꽃을 피운 위대한 거장들이었다. 그는 '혁신가'가 아닌 좋은 예술체계의 '보존자'가 되려고 했다.[2] 하지만, 현대에는 앵그르와 당시의 다른 고전주의자들이 당대의 낭만적 정신을 구체화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3] 앵그르는 인상적인 공간과 형태의 왜곡으로 현대 예술의 주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대표작으로 <리뷔에르 부인의 초상> <목욕하는 여자> <터키 목욕탕> 등이 있다.
작품
주석
- 이동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 이동 ↑ Condon, et al., 1983, p. 14.
- 이동 ↑ Turner, 2000, p. 237.
[영문 자료 보기 -Jean-Auguste-Dominique Ingres]--------------------------------------------------------- 그가 40여 년 만에 자화상을 고쳐 그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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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다시 고쳐 그릴 권리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19세기 프랑스 화가 앵그르가 그린 〈스물네 살의 자화상〉에 담긴 속내를 들춰보면 꽤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이 그림은 실제로 앵그르가 스물네 살 무렵에 그린 자화상이지만 그 당시 원본 그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앵그르는 〈스물네 살의 자화상〉을 일흔이 다 된 나이에 고쳐 그려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 원본 그림이 남아 있지 않아 어디를 어떻게 또 얼마나 고쳤는지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빈약한 사료에 근거해서 그림이 어떻게 고쳐졌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화가가 왜 청년시절에 그린 자화상을 그것도 40년이 훨씬 지난 뒤에 고쳐 그려 세상에 다시 내놓았는지 그 이유는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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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가 활동하던 당시 화가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려면 자신의 작품이 여러 출품 대전에 입상해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야 했다. 당시 살롱전 입상은 화가들이 성공한 직업화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발판이 되었다. 앵그르는 〈스물네 살의 자화상〉을 그리기 전인 1801년에 이미 로마상(Grand Prix de Rome)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를 계기로 훗날 국비로 이탈리아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른 바 젊은 엘리트 예술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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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의 자화상〉은 앵그르가 살롱전에서 입상은커녕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들어야 했던 작품이다. 살롱전에서 입상을 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 자존심 강한 엘리트 화가를 충분히 불쾌하게 만들었는데, 거기다 이사람 저사람 쏟아내는 혹평은 젊은 화가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초상화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앵그르이지만, 그렇다고 자화상을 살롱전에 내보낸 것부터가 실수였다. 젊은 화가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소재가 되지 못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위인을 모델로 삼은 인물화나 역사화 등에 후한 점수를 줬다. 따라서 살롱전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그러한 소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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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들은 여러 사료들을 토대로 해서 1850년경에 앵그르가 이 자화상을 일부 고쳐 그렸다고 추정한다. 앵그르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젊은 시절 자화상을 꺼내어 수정한 것이다.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앵그르의 마음 한 켠에는 자화상에 관한 상처가 똬리를 틀며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화상에 얽힌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인지 앵그르는 생전에 자기 자신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자화상을 그린 것은 일흔여덟 살이 되어서다. 당시 그는 이미 성공한 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아울러 2등 명예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또한 정계에 발을 디뎌 화가로는 처음으로 상원의원을 엮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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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여덟 살의 자화상〉은 구도 등 여러 면에서 〈스물네 살의 자화상〉과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 두 작품 속 화가의 눈빛과 입술은 물론 심지어 가운데 가르마까지도 닮았다. 앵그르는 〈일흔여덟 살의 자화상〉을 그릴 때 몇 년 전 수정해서 다시 완성한 〈스물네 살의 자화상〉을 보고 그린 것이다. 이 늙은 화가는 온갖 영예를 누리는 저명한 인사가 되었지만 자화상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불안했었나보다.
그런 탓인지 앵그르가 남긴 두 점의 자화상은 자화상 특유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고전주의 초상화의 대가라는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스승 다비드가 그린 〈앵그르의 초상〉에서 훨씬 앵그르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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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
미술사에서 앵그르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로 간추린다면 '초상화', '소묘', '누드화' 그리고 '고전주의'일 것이다.
초상화는 당시 화가들에게 괜찮은 수입원이자 권력층과 연을 맺는 끈이기도 했다. 화가들은 왕족이나 귀족 등 저명한 인사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일수록 초상화를 그리는 대가가 비쌌다. 당시 앵그르는 그림값이 꽤 비싼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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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는 흔히 앵그르를 가리켜 다비드와 함께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을 완성한 화가라고 평가한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혁명으로 왕권이 무너졌고,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자처한 군인들이 사회를 쥐락펴락 했다. 어수선한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프랑스 미술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저속하고 퇴폐적이라는 혹평을 들어왔는데, 당시 앵그르는 이러한 프랑스 미술계의 현실을 경멸했다. 그의 그림은 매우 진지했고 학구적이었는데, 그가 그린 초상화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한껏 묻어나 있다. 그런 이유로 당시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은 앵그르의 고풍스런 화풍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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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탱의 초상〉은 앵그르의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뚜렷한 윤곽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소묘가 만들어 내는 조형미가 일품이다. 작품 속 인물 베르탱(Louis-François Bertin)은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ébats)」란 잡지의 발행인이자 유명한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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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는 유화가 아닌 소묘로도 초상화를 그렸다. 밑그림 성격이 강한 소묘는 아무래도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앵그르의 소묘는 달랐다. 앵그르는 당시 프랑스로 관광 오는 부유한 여행객을 상대로 소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소묘 초상화는 물감이 필요 없고 빠른 시간에 완성할 수 있어서 수익성이 꽤 괜찮은 사업(!)이었다. 〈스타마티 가족의 초상〉은 앵그르가 그린 소묘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스타마티(Stamaty)는 여행객은 아니고 그리스에서 프랑스로 귀화한 사업가 출신 관료다. 이 그림은 한 가족이 프레임 안에 모두 들어가 있다. 구도와 표정이 매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인물 각자의 개성이 앵그르의 섬세한 필치로 잘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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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계 저변에 깔려 있던 퇴폐와 저속함을 경멸했던 앵그르지만 그렇다고 누드화를 그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의 스승인 다비드가 활동하던 때까지만 해도 많은 화가들이 남성 누드를 그렸지만 앵그르는 주로 여성 누드를 그렸다. 미술사에서는 프랑스 회화에서 여성 누드의 시작을 알린 화가로 앵그르를 지목하기도 한다. 앵그르는 대부분의 누드화를 주문에 의해 그렸다. 인간의 벗은 몸은 화가가 예술로 구현해야 할 최고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컬렉터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다.
앵그르가 그린 작품 속 벗은 여인의 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체형이 조금씩 왜곡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왕국의 하녀들을 그린 〈대 오달리스크(La Odalisque)〉를 보면 여인의 팔과 허리는 길게 늘어져 있고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도 자연스럽지 않다. 고전 미술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작품 깊숙이 침잠해 있는 것이다. 앵그르가 20여 년 동안 구상해오다가 일흔여섯의 나이에 완성한 〈샘(La Source)〉이라는 작품은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여성의 인체미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살롱전이 외면한 화가
앵그르는 1780년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Toulouse)에서 북으로 40km 떨어진 몽토방(Montauba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건축가이자 그림도 제법 잘 그리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앵그르는 열한 살 때 툴루즈의 미술학교에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6년 뒤 파리로 가 당시 최고 화가인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다.
앵그르의 예술가로서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살롱전이다. '살롱(salon)'이란 프랑스어로 상류층 집안의 거실을 뜻한다. 근대 프랑스 사회에서 예술애호가들이 모여 작품에 대한 담소를 나누던 곳이 공식적인 전람회 장소로 발전한 것이다. 앵그르는 평생 일곱 차례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대체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앵그르의 작품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것만은 확실하지만 비평가나 애호가들의 까다로운 취향까지 만족시키진 못했다. 그래서 살롱전은 앵그르에게 하나의 딜레마 같은 존재였다. 40여 년 전 자화상을 늙어서 다시 그리게 된 것 역시 살롱전에 얽힌 우여곡절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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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는 1867년 겨울 갑자기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면서 여든일곱의 나이로 긴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 500여 점을 전시하는 거대한 회고전이 열렸고, 곧이어 앵그르 미술관이 세워지기도 했다. 말년에 귀향길에 올라 타향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스승 다비드에 비한다면 그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산 화가였다. 앵그르 스스로가 자화상에 얽힌 아픈 기억을 추억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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