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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실제 주인공, 고급창녀(코르티잔)]마리 뒤플레시스

Bawoo 2016. 1. 18. 23:46

 

 

 

  마리 뒤플레시스

(Marie Duplessis, 1824.1.15~18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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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onsine Plessis: Portrait by Édouard Viénot

 

 

 

마리 뒤플레시스의 본명은 알퐁신 로즈 플레시스(Alphonsine Rose Plessis)이며 후에 결혼해서 페레고(Perrégaux) 백작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파리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는데 그녀의 짧았던 일생은 나중에 수많은 문학작품과 오페라, 희곡, 영화로 그려져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뒤플레시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의 원전은 알렉산더 뒤마, 아들(Alexandre Dumas, fils, 1824~1895)의 소설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1848)이다. 이 소설에서 ‘마리 뒤플레시스’는 ‘마르그리트 고티에(Marguerite Gautier)’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등장하고 있으며 이 소설을 원작으로 작곡된 쥬셉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1853)에서는 ‘비올렛타 발레리(Violetta Valéry)’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뒤플레시스는 1824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Basse-Normandie) 지방의 노낭 르 팽(Nonant-le-Pin)에서 태어났으며 그녀는 매우 빈곤하고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에다가 폭력적이었으며 두 딸(Alphonsine, Delphine)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뒤플레시스는 성장기서부터 일찌감치 여관의 종업원이나 우산 공장 직공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했다. 뒤플레시스는 좀 더 나은 형편의 일거리를 찾아 무작정 파리로 와서 변변찮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에 어떤 부유한 사업가를 사귀게 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6살 때부터 뒤플레시스는 파리 사교계를 드나들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영리해서 모든 분야의 학문과 예술을 혼자 힘으로 습득했는데 문학에 조예가 깊을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뒤플레시스는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천부적인 매력을 갖고 있어서 수도 없이 많은 상류층의 남자들이 그녀의 매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도 원래 그녀의 이름이었던 플레시스(Plessis) 앞에 ‘뒤(Du)’를 붙여서 더욱 귀족적인 느낌을 주는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라고 바꾸었다.

 

뒤플레시스의 여러 남자관계 가운데 제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아제노르 드 그라망(Agénor de Gramont)과의 관계였다. 프랑스 최고 귀족 가문 중의 하나인 귀셰(Guiche)의 공작 그라망은 나폴레옹 3세 집정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적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뒤플레시스를 멀리하라고 그라망에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모든 자리에 그녀와 함께 나타났고 항상 뒤플레시스와 함께 있으려 했다. 그런 그의 태도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으며 그는 결국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고 모든 사회적인 지위를 버려야만 했다.

 

그녀의 연인 중의 하나였던 알렉산더 뒤마(아들)의 묘사에 따르면 뒤플레시스는 큰 키에 검은 머리카락, 흰색 피부와 특이하리만치 커다란 눈을 갖고 있었다. 뒤마는 1844년 9월부터 그 다음 해인 1845년 8월까지 그녀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뒤마와 뒤플레시스는 한 동안 파리 교외(Saint-Germain-en-Laye)의 전원저택에서 함께 지냈다. 이 시절의 추억은 나중에 뒤마가 소설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를 쓰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뒤플레시스의 태도와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화가 난 뒤마가 편지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다.

 

한편 뒤플레시스 역시 충동적으로 뒤마와 헤어진 뒤 얼마 간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와 함께 지내다가 이후에는 에두아르드 드 페레고(Édouard de Perrégaux)와 사귀었고 결국 그와 1846년에 런던에서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결혼도 얼마 오래가지 않아 파경을 맞게 되고 뒤플레시스는 다시 파리 사교계로 돌아온다. 끊임없이 향락을 추구하는 사교계의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뒤플레시스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사교계 생활을 접고 마들렌가 11번지의 아파트에 칩거하던 뒤플레시스는 1847년 2월 3일,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 많았던 그녀의 연인들 중에서 그녀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스웨덴의 스타켈베르그(Stakelberg) 백작과 남편 페레고(Perrégaux) 백작 두 명뿐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4일 만인 1847년 2월 27일에 그녀가 남긴 유품들을 판매하는 경매가 열렸다. 파리 사교계 최고의 유명 인사였던 뒤플레시스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과 그녀를 흠모해서 그녀의 유품을 한 가지라도 소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경매장은 엄청나게 붐비었다고 한다.

 [출처] <라 트라비아타>의 실제 주인공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작성자 David

 

Marie Duplessis (15 January 1824 – 3 February 1847) was a French courtesan and mistress to a number of prominent and wealthy men. She was the inspiration for Marguerite Gautier, the main character of La Dame aux Camélias by Alexandre Dumas the younger, one of Duplessis' lovers. Much of what is known about her has been derived from the literary persona and contemporary legends.[1]

 

Early life

Marie Duplessis was born Alphonsine Rose Plessis in 1824 at Nonant-le-Pin, Normandy, France. At the age of 15, she moved to Paris where she found work in a dress shop.

As recorded in art of the day[2] Marie Duplessis was evidently an extremely attractive young woman, with a petite figure and an enchanting smile. By the time she was 16, she had become aware that prominent men were willing to give her money in exchange for her company in both private and social settings. She became a courtesan and learned to read and write, and to stay abreast of world events so as to be able to converse on these topics with her clients and at social functions. She also added the faux noble "Du" to her name.

Life as a courtesan

Passport issued to Alphonsine Plessis, January 1846

 

Duplessis was both a popular courtesan and the hostess of a salon, where politicians, writers, and artists gathered for stimulating conversation and socializing. She rode in the Bois de Boulogne and attended opera performances. She also had her portrait painted by Édouard Viénot.

Duplessis was the mistress of Alexandre Dumas, fils between September 1844 and August 1845. Afterwards, she is believed to have become the mistress of composer Franz Liszt, who reportedly wished to live with her. Throughout her short life, her reputation as a discreet, intelligent, and witty lover was well known. She remained in the good graces of many of her benefactors even after her relationships with them had ended.[3]

She was briefly married to at least one of her lovers: a French nobleman, Count Édouard de Perregaux.

Death

Marie Duplessis died of tuberculosis at the age of 23 on 3 February 1847. Her husband the comte de Perregaux and her former lover the Baltic-German count Gustav Ernst von Stackelberg were by her side. Within a few weeks of her death, her belongings were auctioned off to pay her debts. Still, her funeral in Montmartre cemetery, where her body still rests, was said to have been attended by hundreds of people.

Novel, play and opera

Dumas' romantic novel La Dame aux Camélias was based on Duplessis. It appeared within a year of her death. In the book, Dumas became "Armand Duval" and Duplessis "Marguerite Gautier". Dumas also adapted his story as a play, which inspired Verdi's opera La Traviata and various films.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s Dumas fils, 1824~1895,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뒤마의 아들)는 1848년 소설 『동백꽃 여인(춘희)』을 발표한다.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뒤마는 자신의 작품을 5막의 희곡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뒀는데 베르디는 이 연극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동백꽃 여인』을 원작으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사라 베른하르트가 주연한 연극 [동백꽃 여인]의 포스터. 1896년. 알폰스 무하의 작품 <출처: Wikipedia>

초연에 실패한 오페라

첫 비올레타 역을 맡았던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Fanny Salvini-Donatelli) <출처: Wikipedia>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La Fenice)에서 초연되었다. 이미 인기 절정의 오페라 작곡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베르디의 작품이었으니 관객들의 기대는 크기만 했다. 하지만 정작 [라 트라비아타]를 본 관객들의 평가는 혹평 일색이었다.

‘신성한 무대에 매춘부를 주인공으로 올리다니!
폐결핵으로 세상을 마감하는 여주인공이 저렇게 뚱뚱하다니!’

 

1800년대의 보수적인 시선(어쩌면 보수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비판적인 시선에도 베르디는 자신의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배경을 1700년대로 옮기고 음악을 부분수정하고 가수를 교체하여 이듬해 5월 6일 베네치아에서 다시 [라 트라비아타]를 선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전히 결혼을 모독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갔다.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알프레도’는 파리 사교계의 여왕 ‘비올레타’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구애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두 사람은 교외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영원히 함께 하기로 한다. 어느 날, 알프레도가 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온다. 자신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오빠인 알프레도가 매춘부와 함께 산다는 소문 때문에 난처하니 알프레도와 헤어지라고 한다. 고민하던 비올레타는 결국 이별의 편지를 남기고 파리로 돌아간다. 돈 때문에 비올레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오해한 알프레도는 파티에서 재회한 그녀를 가혹하게 모욕한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랑을 맹세하지만 병이 악화된 비올레타는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베르디와 뒤마의, ‘동백꽃 여인’

마리 뒤플레시 <출처: Wikipedia>

소설 『동백꽃 여인(춘희)』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연인이었던 마리 뒤플레시(Marie Duplessis, 1824~1847)를 실제 모델로 하고 있다. 뒤마는 스무 살 때 뒤플레시와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뒤마의 열렬한 사랑을 뒤로하고 스물셋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한다. 동백꽃을 각별히 좋아하던 뒤플레시를 떠올리며 뒤마는 슈발블랑 호텔에서 그녀가 보낸 여러 통의 편지를 읽고 소설을 쓴다. 결국 뒤마는 그의 소설 속 아르망 뒤발이자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속의 알프레도 제르몽이라 할 수 있다. 뒤플레시 역시 뒤마의 소설 속 마르그리트 고티에이자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로 남았다.

 

한편, 베르디에게도 힘들게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뒤마의 연극 [동백꽃 여인]을 관람하던 당시 베르디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간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베르디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스트레포니에게도 사생아가 있었다. 편견과 체면을 신경 쓰면서 스트레포니와 마음 편히 사랑을 하지 못하던 자신의 상황 때문인지, 베르디는 연극 [동백꽃 여인]을 보고 무척 감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오페라의 제목을 ‘라 트라비아타(‘길을 잃은 여인’, ‘길을 잘못 든 여인’)‘로 지었다.

대표 아리아

제 1막 - 축배의 노래(Brindisi)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정식으로 소개받는 자리. 이미 비올레타를 마음에 두고 있던 알프레도는 기쁜 마음으로 세상 근심 모두 잊고 즐겁게 마시자는 내용의 ‘축배의 노래’를 부른다. 알프레도의 노래를 받아 비올레타가 2절을 부르고 뒤따라 좌중들이 이에 합류하면서 파티는 더욱 무르익어간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출처: Wikipedia>

제 2막 - 프로벤자의 바다와 대지(Di Provenza il mar, il suol)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은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아들을 간곡하게 설득하며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를 부른다. 우리에겐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로 알려져 있지만 원뜻은 [Di provenza il mar il sol], '프로벤자의 바다와 대지'이다.

제 3막 - 지난날이여 안녕 Addio del passato

비올레타는 알프레도가 곧 용서를 구하러 올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병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 비올레타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슬픈 선율에 실어 노래한다.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이라고.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주세페 베르디 <출처: Wikipedia>

19세기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일조했다. 북이탈리아의 농촌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키운 소박한 정신과 이탈리아 특유의 정열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 이탈리아 가극의 왕으로 불린다. 7세부터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고향의 작은 관현악단의 편곡을 도맡으며 음악 공부에 매진하다 개인 지도로 가창을 배우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오페라 작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39년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Oberto, conte di San Bonifacio)]라는 작품으로 라 스칼라에 데뷔한 이후, 수많은 작품으로 이탈리아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 초기에는 작곡가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19세기 중반 오페라 작곡가로서 원숙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 작품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전의 선율 중심의 오페라에서 연극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기 시작한다.

 

대표작으로는 [리골레토(Rigoletto)](1851),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1853),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1853),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1862), [돈 카를로스(Don Carlos)](1867), [아이다(Aida)](1871), [오텔로(Otello)](1887), [팔스타프(Falstaff)](1893)가 있으며, 현실 생활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베리스모(Verismo), 즉 사실주의 오페라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음악사에 중요한 인물로 남았다.

 

[출처: 정보- 책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